이달균의 문학 여행

이달균의 디카시-오홍진(문학평론가)

이달균 2019. 8. 9. 14:50

제29호 오홍진/ 일상 너머를 꿈꾸는 사물의 미메시스:이달균 시인의 디카시

프로파일 dpoem21 2019. 7. 26. 0:25

비평/

일상 너머를 꿈꾸는 사물의 미메시스

오홍진(문학평론가)

디카시는 사진이미지가 없으면 성립될 수 없는 장르이다. 마찬가지로 디카시는 언어표현이 없어도 성립될 수 없다. 디카시는 사진이미지와 언어표현이 절묘하게 만나야 하나의 작품미학으로 승화될 수 있다. 사진이미지가 먼저냐, 언어표현이 먼저냐 하는 문제는 사실 알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 하는 질문만큼 의미가 없다. 사진이미지가 없는 디카시, 언어표현이 없는 디카시를 생각해 보면 이 질문이 얼마나 무의미한지 우리는 금방 알 수 있다. 하지만 디카시가 창작되는 과정을 따진다면 아무래도 사진이미지에 더 힘을 보탤 수밖에 없다. 사진이미지는 시인이 일상에서 순간적으로 발견한 이미지를 가리킨다. 시인은 길을 거닐다 순간적으로 눈에 들어온 광경(!)을 사진이미지로 담는다. 순간적으로 눈에 들어온 광경을 이상옥은 ‘날이미지’로 명명하는데, 디카시는 날이미지를 담은 사진이미지에 언어표현을 입히는 과정을 거치며 창작된다.

디카시를 읽는 독자들은 사진이미지를 보고 시(언어표현)를 읽는다. 시각 우위의 세상에서 우리 눈은 아무래도 언어보다는 사진이미지에 더 익숙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독자가 보는 사진이미지가 시인이 생각한 사진이미지와 같을 수 없다는 점이다. 시인은 자신이 직접 본 현실을 사진이미지와 연결시키지만, 독자는 사진이미지를 보며 시인이 본 현실을 역으로 상상한다. 시인이 현실을 사진이미지로 압축시킨다면, 독자는 사진이미지를 현실로 개방시킨다.

시인은 현실 이미지가 압축된 사진이미지에 언어를 입혀 한 편의 디카시를 완성한다. 독자는 현실로 개방시킨 사진이미지를 재구성하여 시인이 쓴 시(언어표현)을 읽는다. 그 과정에서 시인이 사진이미지에서 미처 발견하지 못한 흔적을 독자가 발견할 수 있다. 디카시를 읽는 묘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사진이미지는 순간을 포착하기 때문에 언제나 흔적이나 여백을 남기기 마련이다. 그 흔적과 여백에서 우리는 디카시를 더 깊고 더 넓게 읽을 수 있는 단서를 찾는다. 일상으로 깊이 들어간 디카시가 일상 너머로 멀리 나아가는 까닭은 무엇보다 이 지점에서 찾아야 하겠다. 이달균이 쓴 디카시 「이슬」을 먼저 보도록 하자.

주탁의 그대가 참이슬이라면

들판의 이슬은

거짓이란 말인가?

-「이슬」

상 위에 ‘참이슬’ 소주가 보인다. 사람들이 많이 마시는 술이다. 시인은 ‘참이슬’에 붙은 ‘참’이라는 말에 주목한다. ‘참’이 있으면 ‘거짓’이 있기 마련이다. 이슬에도 참이 있고, 거짓이 있는 것일까? 소주병에 담긴 저 술이 ‘참이슬’이라면 “들판의 이슬”은 무엇이냐고 시인은 묻는다. 들판의 이슬은 그저 이슬일 뿐이다. 어떤 것은 참된 것이고, 어떤 것은 거짓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시인은 우리네 일상에 드리워진 통념에 제동을 건다. 사람들은 자꾸만 참과 거짓을 나누려고 한다. 참은 좋은 것이고, 거짓은 나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니 이슬에도 ‘참’을 붙여 하나일 수밖에 없는 이슬을 참과 거짓으로 나눈다. 소주에 ‘참이슬’이란 이름을 붙인 사람은 무엇보다 사람들이 얼마나 참과 거짓을 나누는 논리에 빠져있는지 잘 알고 있다. 논리라고 했지만, 사실은 무의식에 깊이 박힌 비논리이다.

참과 거짓을 나누는 게 왜 이리 논란이 될 수 있느냐고 물을 수 있다. 좋은 것을 좋다고 말하는 게 그리 나쁜 것이냐고 물을 수도 있다. 참이 제대로 세워져야 거짓을 다스릴 수 있는 게 아니냐는 말에 이르면 참과 거짓을 논하는 일이 괜한 트집인 양 싶기도 하다. 시인이 이런 생각을 모를 리 없다. 그러면서도 시인은 왜 ‘참이슬’이라는 말에 제동을 걸고 있는 것일까? 이분법에 익숙한 사람들은 거짓을 참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말한다. 참은 거짓보다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참이 거짓보다 좋다고 누가 정했는가? 이것은 참이고, 이것은 거짓이라는 것은 또한 누가 정했는가? 참과 거짓을 나누는 논리가 문제가 되는 까닭은 그 속에 서린 ‘차별’에서 비롯된다. 가부장제에서 참은 ‘가부장 남성’에게 있다. 이 제도에서 여성은 당연히 거짓이 된다. 무엇을 참으로 내세우느냐에 따라 참에서 배제되는 대상이 생기고, 그것은 곧바로 거짓이라는 탈을 쓰게 되는 것이다.

구름이 낡았다고

뜨고 지는 태양이 지겹다고

하늘을 재개발한다

-「재개발」

사라졌다

거기 산이 있었는데

-「마술」

「재개발」에서 참과 거짓을 나누는 논리는 하늘을 향해 치솟은 크레인으로 표현된다. ‘재개발’은 다시 개발한다는 의미이다. 무엇을 개발한다는 것일까? 시를 보면 하늘을 다시 개발하는 것이다. 하늘을 개발한다고? 그 이유로 내세운 게 참으로 기묘하다. 구름이 낡았고, 뜨고 지는 태양이 지겨워 하늘을 재개발해야 한단다. 누구 생각일까? 당연히 재개발을 하려는 사람들의 생각이다. 자연은 해마다 똑같은 일을 반복한다. 봄에는 꽃을 피우고, 여름에는 무성한 녹음으로 세상을 물들인다. 가을이면 열매를 맺고, 겨울이면 휴식을 취한다. 자연은 겨울에 꽃을 피우지 않는다. 겨울에 꽃을 피우는 존재는 인간이다. 인간은 언제나 자연의 뜻을 거스르려고 한다. 인간에게 자연은 개발을 해야 할 대상일 뿐이다. 개발 대상으로서 자연은 더 이상 수많은 생명들이 살아 숨 쉬는 세계가 아니다. (재)개발은 자본의 논리를 따른다. 이익이 되면 개발이 되고, 이익이 되지 않으면 개발이 되지 않는다.

하늘을 재개발하는 상황에도 이러한 자본의 논리가 개입한다. 「마술」에서 시인은 수십 층 아파트가 건설되는 장면을 사진이미지로 제시한다. 아파트 너머로 하늘이 보인다. 아파트가 없었다면 무엇이 보였을까? 산이다. 아파트가 생활의 중심이 되면서 우리는 하늘과 산이 닿으며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선을 잃어버렸다. 사각형 아파트는 둥근 하늘조차도 사각형으로 만든다. 「재개발」이란 시에서 이미 말했듯, 사람들은 아파트를 지으면서 하늘을 재개발하고 있는 셈이다. 태양이 지겨워진 만큼 사람들은 산 또한 지겨워진 것일까? 태양이 일상에서 사라지면 어떻게 될까? 산이 일상에서 사라지면 어떻게 될까? 시인은 ‘마술’이라는 제목으로 인간이 빚은 세계가 얼마나 허상에 불과한지를 에둘러 드러낸다. 사람들은 개발의 마술에 환호하지만, 그로 인해 우리가 무엇을 잃는지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태양은 날마다 뜬다. 구름은 날마다 하늘을 흐른다. 하늘이 펼쳐내는 이런 일상이 있어 우리는 숨을 쉬며 이 세상을 산다. 과학 혁명으로 인간은 이전보다 풍요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하늘에 뜬 별을 보며 가야 할 길을 들여다보던 시대는 근대 저편으로 사라진지 오래다. 수많은 마천루가 하늘을 향해 경쟁하듯 몸체를 세운 이 시대를 우리는 현란한 마술을 보듯 몽롱한 눈으로 바라본다. 개발에 현혹된 사람들은 이제 근대라는 마술에 흠뻑 빠져 있다. 개발은 자본을 낳는 고리가 되고, 그것은 마술을 통해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된다. 사람들은 아직도 더 많은 생산을, 더 많은 소비를 원하고 있다. 웬만한 산보다 더 높은 건물을 지으며 자연보다 위대한 인간의 모습을 재현하려고 한다. 자연을 넘어선 자리에서 인간은 무엇을 찾으려고 하는 걸까? 아니, 자연을 넘어선 자리는 과연 있기나 할까?

자유를 만져 본적은 없다

하지만 이 담 너머엔 자유가 있다

-「쇼생크」

자연을 정복했다고 자부하는 인간은 과연 자유를 얻은 것일까? 시인은 사진이미지로 교도소를 제시한다. 교도소는 말 그대로 감옥이다. 제목 ‘쇼생크’ 또한 감옥이다. <쇼생크 탈출>이라는 영화를 보면, 이 감옥에 갇힌 죄수 하나가 땅굴을 파고 탈출하는 장면이 나온다. 탈출에 성공한 주인공은 하늘을 향해 팔을 뻗으며 온몸으로 비를 맞는다.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쪽은 자유롭게 살 수 있는 곳이고, 저쪽은 억압만이 지배하는 곳이다. 시인은 “자유를 만져 본 적은 없다”라고 이야기한다. 자유는 추상이다. 동시에 자유는 느낌이다. 탈출에 성공한 주인공은 비를 맞으며 자유를 만끽한다. 감옥 안에 있으면 이 비를 어찌 맞을 수 있을까? 시인의 말마따나 우리는 자유를 만질 수 없지만, 자유를 느낄 수는 있다. 주인공은 온몸으로 비를 맞을 뿐만 아니라 입을 벌려 한껏 빗물을 마시기도 한다.

사진이미지에는 안과 밖을 나누는 하얀 담이 보인다. 담 바깥 길로 자동차가 어딘가를 향해 달려간다. 담 너머로는 낮은 산이 보인다. 그 위로 짙은 구름에 덮인 하늘이 있다. “이 담 너머엔 자유가 있다”는 진술이 사진이미지에 덧붙는다. ‘담 너머’는 자동차가 있는 쪽일까, 아니면 낮은 산이 있는 쪽일까? 자동차가 있는 곳이 자유의 공간이라고 쉽게 이해되지만, 이 시를 이렇게 읽는 건 무언가 아쉽다. 낮은 산이 있는 담 너머를 자유의 광장으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담 이쪽과 저쪽은 동시에 자유의 공간이 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담 이쪽과 저쪽은 동시에 억압의 공간 또한 될 수 있다. 우리는 얼마나 일상에 얽매여 사는가? 우리가 걷는 발걸음 하나에도 일상의 제도가 묻어 있다. 이러한 제도(도덕도 포함되는)를 어긴 사람들은 하얀 담 너머에 갇히지만, 저 낮은 산과 하늘 역시 그렇다고 할 수는 없다.

하늘과 산은 담 이쪽과 저쪽을 가로지른다. 하얀 담을 기준으로 자유를 보는 건 인간의 생각에 불과하다는 얘기다. 쇼생크에서 탈출한 죄수는 담을 넘어 세상으로 나오고, 세상을 탈출한 시인은 저 담을 넘어 낮은 산으로 들어간다. 우리가 지금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담 너머가 달라질 수 있다. 자동차를 타고 가는 곳에 자유가 있는지 누가 장담할 것인가. 시인은 자유를 만져본 적이 없다. 자유는 만질 수 있는 사물이 아니다. 달리 말하면 담 너머에서 사람들이 찾는 자유는 환상에 불과하다. 저 하얀 담은 어찌 보면 진정한 자유로 가는 길 위에 서 있는 하나의 이정표일지도 모른다. 담 너머에 자유가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담을 넘는 일만으로 자유에 이르렀다고는 볼 수 없다. 하얀 담을 기꺼이 넘는 순간 우리는 자유로운 느낌을 만끽하게 된다고 표현하면 어떨까. 그런데, 자유의 공간은 담의 이쪽인가, 저쪽인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자유’가 허상이 아니라고 누가 말해줄 것인가?

그대, 육신은 가고

한권 시집으로 남다

-「요절」

시인은 저세상으로 갔지만, 시집은 이 세상에 남았다. 시집을 이 세상에 남겨두고 시인은 하얀 담을 넘었다. 하얀 담을 넘은 시인은 자유를 얻은 것일까? 한권 시집은 시인이 이 세상에 살아있었음을 증명한다. 살아서 시인은 시를 썼고, 그 시들을 모아 시집을 냈다. 육신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이 시집은 과연 무엇일까? 시인은 한 편의 시를 쓰기 위해 끊임없이 세상 밖으로 나가는 훈련을 했다. 세상 밖으로 나가야 보이지 않는 세상이 보인다. 세상 안에서는 아무것도 볼 수 없다. 시인은 언어를 들고 세상 너머로 나아가는 꿈을 꾼다. 그 꿈을 기록한 것이 한권의 시집이라면, 시인이 남긴 시집은 살아있는 자가 남긴 꿈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우리는 살아있는 상태로 이미 죽은 자가 살아있을 때 남긴 시집을 읽는다. 삶과 죽음이 하나로 이어지는 순간이라고 말하면 너무 지나친 것일까?

사진이미지를 보자. 책꽂이에 꽂힌 수많은 시집들이 보인다. 누군가가 떠난 자리를 누군가가 메운다. 시인들은 그렇게 저세상으로 떠나고, 그들이 남긴 시집들은 이렇게 우리 앞에 놓인다. 우리는 지금 한권의 시집을 사진이미지를 보며, 한 편의 (디카)시를 읽고 있다. 한 편의 시는 한권의 시집으로 남은 시인을 애도한다. 사진이미지는 그러니까 시집의 초상이면서 동시에 시집을 쓴 시인의 초상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사진이미지에 담긴 시집이 한 권이면서 수십 권, 수백 권으로 뻗어 나가고 있다는 점이다. 저마다의 시집들은 지금 육신을 지니고 있거나, 아니면 지금은 육신을 버린 사람들이 남긴 사람들의 마음을 담고 있다. 지금 육신을 지닌 사람들도 언젠가 육신을 잃고 다른 세상으로 갈 것이다. 시인은 이렇게 사진이미지로 육신(시간)과 육신 너머를 가로지르는 ‘시집’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육신은 가고// 한 권 시집으로 남다”라는 시구=이야기가 사진이미지에 담긴 흔적을 채 담아내지 못하는 것은 이리 보면 당연한 결과라고 하겠다.

디카시에 실린 사진이미지는 이야기된 것과 이야기되지 않은 것 사이에 놓여 있다. 시인이 사진이미지로 드러내는 내용과 독자가 사진이미지를 보며 상상하는 내용은 언제나 하나로 모이지 못하고 끊임없이 어긋나는데, 나는 바로 이런 특성에서 디카시가 지닌 다면성을 발견한다. 한 편의 시를 읽고 시인의 의도를 파악하기에 급급한 기존 시에 비한다면, 디카시는 확실히 독자들이 상상력을 발휘하며 읽을 만한 특성을 내포하고 있다. 나는 그것이 사진이미지에 담긴 수많은 흔적들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발터 벤야민의 말마따나 사진에는 사진가가 채 발견하지 못한 흔적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벤야민은 그 흔적을 ‘미메시스’로 명명한다. 그가 말하는 미메시스는 근대가 의미로 환원해버린 사물의 흔적을 다시 복구하는 예술적 작업을 가리킨다. 디카시가 지금 이런 미메시스 작업에 충실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사진이미지에 내포된 그 수많은 흔적들이 내는 소리에 귀 기울이다 보면 우리는 의미 뒤로 숨어버린 사물을 어쩌면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달균의 디카시는 그런 점에서 사물과 그 그림자 사이에 드리워진 틈에 가로 놓인 흔적에 목말라하는 이 시대 시인들의 아픈 현실과 맞닿아 있다.

오홍진 대전 출생. 2003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으로 등단. 저서 『한국문학과 대중문화』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