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균 <가사로 쓰는 통영이야기>
역사의 땅, 예술의 종가(宗家)
-가사로 쓰는 통영이야기 1
한줄 문장으로 빛나는 시인이라도
붓 하나로 신화가 된 천재화가일지라도
청아한 빛의 도시, 무수한 윤슬의 도시
남도 끝자락에서 한반도 떠메고 선
이 도시 미항을 단숨에 그릴 수 있으랴
여기는 역사의 땅, 찬란한 예술의 종가
별빛에 젖고 물빛에 씻고 싶다면
돌연한 걸음으로 훌훌총총 이곳에 오라
세병관 마루에 앉아 떠가는 배를 보라
음악당 지붕은 거대한 정신의 날개
그 뒤로 펼쳐진 오백 칠십개의 섬들
이순신 구국 혼과 삼백년 통제영 전통
여기선 폐선 한 척도 수려한 그림이 된다
먹고 버린 전복껍질이 영롱한 나전이 되고
일상의 장인들이 12공방을 가꾸었으며
공예와 미술이 삶속에 스며들어
진정한 예향의 텃밭을 이뤘으니
당신이여 보았는가, 멋과 맛을 느꼈는가
언필칭 문화로 맺고 관광으로 피어나는
이 바다 이 하늘 섬들과 해안선
어른은 어린이에게 산자는 죽은 자에게
지배하고 지배당하며 교감하는 영혼의 도시
과거는 오늘이 되고 오늘은 미래가 된다
상처 입은 용, 윤이상 기일
-가사로 쓰는 통영이야기 2
제 이름의 문패를 고쳐달아 드립니다
이름을 불러본다, 자랑스럽고 아픈 이름
호드기 소리처럼 애잔한 음률의 이름
우리 슬픈 현대사의 방점 더듬어 가면
도드라진 눈물과 그리움의 조각보
누가 윤이상을 모른다 하는가
누가 윤이상을 다 안다 하는가
올해 정유년은 탄신 백주년이 되는 해
오늘은 주옥같은 음악들 남기시고
총총히 타계하신 스물 두 번 째 기일.
그렇게 오매불망 돌아오고 싶었건만
내 고향 통영의 갯내음 맡으며
생애의 마지막을 추억하고 싶었건만
끝내 돌아오지 못하고 쓸쓸히
타국에서 삶을 마감하신 선생의 모습이
이 도시의 가을을 먹먹하게 합니다.
운명은 신께서 점지하신 것인가
어느 날 불현듯 예언처럼 다가와
어머니 태몽 속에 피어난 꽃구름
민족의 영산이라 부르는 지리산
그 능선을 날고 있는 늠름한 한 마리 용
그러나 그 용은 가엽게도 상처 입은 몸
조국의 자궁이 잉태한 비운의 용
바로 당신의 존재이며 운명이었지요.
오늘 후인(後人)들은 그 발자취 아래서
엎드려 한잔 술로 추모의 정을 전하며
제 이름의 문패를 고쳐달아 드립니다.
경계를 넘나드는 금자탑
윤이상을 윤이상이라 부르지 못하고
먼 길 돌고 돌아 영혼으로 돌아와
문패 하나 걸고서 사립문을 밀었으니
그 숱한 우여곡절 어찌 다 말 하리까.
당신의 생애가 곧 우리네 현대사
그 영광과 비극의 발자국 따라가면
역사의 험난한 질곡이 보이나니
역사의 수레가 허방에 빠진 그해
일천구백 육십 칠년 올가미로 동여맨
‘동베를린 간첩단사건’ 영혼마저 옭죄던
기약 없는 징역형, 그 감방의 수형생활
조국은 당신을 매몰차게 버렸지만
세계인의 탄원은 줄기차게 이어져
음악인 윤이상, 독일인 윤이상으로
경계를 넘나드는 금자탑을 쌓았지요.
허나 조국은 여전히 문을 닫아걸었고
자유로운 선율마저 품어 앉지 못했으니
절명의 순간마저 타국에 보낸 심정
사랑은 왜 이리 미욱하고 가혹할까
세월의 더께에도 주홍글씨는 그대로 남아
급기야 이천 십일 년 타도 윤이상의
자욱한 먹구름이 통영을 덮었다.
마음 졸였지만 옹송그린 마음은
청신한 바람으로 불어오지 못했다.
누가 있어 매물도 푸른 바람이 될까
누가 있어 죽도의 매운 죽비가 될까
내 비록 부족하나 남은 결기 모아
한 필 글로 고하여 감히 받들었으니
“누가 윤이상을 땅에 묻으려는가?”
글재주 미천하고 그릇 또한 옹졸하여
그런 마음 하나로 빌어 올릴 수밖에.
오늘 새로 문패 건 윤이상 기념관은
당신께서 즐겨 걸으시던 도천 바닷가
초등학교 교정이던 세병관 가던 길
충무공 향사 때엔 삼현육각 들었고
선교사네 집에선 피아노 소리 들었다.
생가 옆 아름답고 키 작은 기념관엔
손때 묻은 물건들과 책이며 사진들이
저들끼리 추억하며 올망졸망 정겹다.
윤이상 기념관, 교감하는 사람들의 성전
오늘은 안타까운 역사를 원망하기보다
지성으로 일깨우신 사랑과 음악을
듣고 배우는 날로 기억하려 합니다.
당신의 선율 속엔 남도인의 절절함
한려수도에 발목 담근 미륵산이 의젓하고
일렁이는 달빛과 뱃노래가 있습니다.
불멸의 작품은 아름답고 빛나는 역사
면면히 이어지는 전통에 기인하나니
이 집은 교감하는 사람들의 거룩한 성전
더운 흙 한 줌이 열망이고 사랑이듯
뜨거운 노래는 가슴에 묻을지언정
가없는 밀썰물에 흩뿌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입항식(入港式), 거북선이 온다
-가사로 쓰는 통영이야기 3
동면하던 짐승들 깨어나는 경칩이다
이제 성큼 봄이니 봄 따라 배들어 온다
아무리 동장군 회초리가 매서워도
한 장 손수건만한 바다의 훈풍을
작고 여린 매화송이 볼기를 어쩔거냐
오늘은 임진왜란 그 불멸의 최고 승전
세계 4대 해전의 으뜸인 한산대첩
돌격 귀선이던 전라 좌수영 거북선과
통제영 시대 통귀선(統龜船) 본떠 만든 거북선
강구항에 입항하니 징 울리고 북을 쳐라
기억하라 풍전등화 조국의 명운을
두 어깨에 걸고 사즉생 생즉사(死則生 生則死)
충무공 그 정신을 한시도 잊지마라
따져보면 지금도 난중이 아니던가
머리엔 핵을 이고, 미중일이 에워싼
이 나라의 오늘도 난중임이 분명하다
강구항에 입항한 거북선 무탈무고토록
별신굿 노래 한 자락 제물로 흠향하자
잊지 마라 임진란 그때를 잊지 마라
어찌 알았을까 조상님 염력 덕분일까
역사는 우연을 필연으로 만든다
전쟁 발발 하루 전날 거북선 완성하니
일천 오백 구십이일 사월 십이일
현자며 지자통총, 각종 화포 장착한
거북선 앞세우고 바다를 누볐으니
한산해전, 당포해전, 사천해전, 안골포해전
단 한 번 패배도 없이 연전연승 거두었다.
임란 후 제6대 이경준 통제사
세병관 중심으로 성 쌓고 망루 올려
통제영 찬란한 역사 기틀을 이뤘으니
이 바다는 조선수군 열병하는 병선마당
하지만 돌이켜보면 믿을만한 주력선인
거북선 판옥선만 있었던 건 아니다
주연 배우 주변엔 조연도 있었으니
척후선 역할을 한 통구미배 잊지 마라
평소엔 어부들 생계형 배였으나
적진 살피고 군수물자 나르던
작은 배 통구미도 한몫 요긴했다
거북선 올라보면 노 젓던 격군들
삼복염천 아비규환 바람 한 점 없는
배 안의 사투를 필설로 어찌 다 하랴
승자의 역사는 늘 영웅만 기억한다
산화해간 병졸이며 격군들 백성들의
무수한 죽음과 함성을 잊지 마라
거북선 입항식에서 뜬금없는 존재들
격군들과 통구미배를 혼자서 생각한다.
통영시립박물관을 서성이며
-가사로 쓰는 통영이야기 4
업이라면 업이고, 일이라면 일인데
평생을 한 길로 오로지한 사람이 있다
우리는 그들을 장인이라 부른다
더 좋은 말로는 명장이라 부른다
하긴 문화재란 이름을 얻지 못하면
국록의 땡전 한 푼도 받을 수 없지만
나를 그들을 일러 장인이라 칭한다
“이 소장품들은 나의 영혼이며, 숨결이요,
마지막까지 함께할 생명의 동반자이다.”
질풍노도의 젊음과 장·노년의 모든 것인
수집품을 통영시에 기증하며 남긴 말
타관을 전전하다 고향으로 돌아와
평생의 분신들을 내놓은 이영준씨.
여든 둘에 다시 만난 통영은 낯설었다
물길도 낯설고 인심도 낯설어
한 동안 뱃고동 소리에 잠을 깨곤 했다
부산 시절부터 청주의 한 때까지
문화재와 함께 산 어언 50년 세월
이병주, 이형기, 최계락 등과의
풋풋하고 뜨거웠던 국제신문 기자시절
시대의 전령사로 살아가는 그들 보며
문화재 수집으로 후대에 이바지하는
사람이 되겠다며 마음을 다잡았다
6·70년대 한국은 모든 것이 암울했다
자고나면 일본으로, 또 자고나면 유럽으로
우리 얼들은 조국바다를 영영 떠나고
나부터도 유품들을 지키리라 다짐했다
전승하지 못하고 계승하지 못하면
전쟁의 폐허와 무엇이 다르랴
내 비록 늙고 늙어 마음 더욱 분주해도
가치도 헤아리고 목록 적어가며
통영 시립박물관에 깃들어 살아가리
조선조의 민화류며 고려조의 도자류
그 보다 더 앞선 토기류와 청동검류
신라, 고려조의 금동불상, 용두장식
꼭두인형, 영패부적, 숱한 떡살종류
2000여점 세세하게 작성하고 채록한
각종 부적이며 다양한 문화재들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읽고 가나
원시적 정령숭배, 기층민의 소망성취
규방여인의 애절함, 민중의 풍자와 익살
민예품이 그러하며 산대놀이 가면들이
가히 제 모습으로 되살아나지 않는가
통영의 역사는 임진란이 아니라
욕지면 상노대도, 산양읍 연대도의
빗살무늬토기로 상징되는 선사시대
신석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박물관은 잊혀 진 어제의 기록이며
알 수 없는 내일을 보여주는 거울이다
역사여행의 재미를 여기서 느껴보라
명품은 명장과 함께 이곳에서 숨을 쉰다
내일의 제단 위에 바치는 한 송이 꽃
-가사로 쓰는 통영이야기 5
바람에 흩어지는 계사년 4월 꽃잎
남망산 봄 햇살이 숙연하고 애달프다
어느 땅, 어느 도시 기념비 없으련만
오늘 꽃비 속에 세워지는 정의비는
흔치도 않으련만 의미 또한 남다르다
미륵은 언제 오시나 물빛 이리 푸른데
한 시인이 노래한 시구를 읊조린다
오늘 읽는 헌시는 붉어서 더 슬프다
여자로 태어나서 여자가 되지 못한
골수에 사무쳐서 서러운 봉두난발
봉사 기름값도 되지 못한 설운 생애
누굴 위한 위안이냐 누굴 위한 봉사였나
추모식은 어쩌면 산자들의 거한 잔치
묵념과 비단헌사 의례적 행위들이
맨발의 가시밭길 한 동이 눈물바람
그 눈물 훔치어 줄 누더기에 비견될까
지금도 하롱하롱 꽃잎은 떠나가고
서편 봄 하늘은 먼지로 자욱하다
그래, 누가 있어 생애를 증언할까
정의라는 이름으로 무엇을 기억할까
그래도 돌비 하나 통영 땅 한 기슭에
제 값으로 서는 것이 마땅하고 마땅하다
그것은 약속이다 피로 쓴 맹약이다
고통의 역사를 되풀이 말자하는
약속의 실뿌리를 심어보는 것이다
유산은 아픔의 대물림이 아니라
썩어서 풍요로운 밀알이 되는 것
꽃이여 새봄이여 희망의 제전이여
내일의 제단 위에 바치는 한 송이 꽃
비경의 섬 수우도(樹牛島)
-가사로 쓰는 통영이야기 6
설운 장군 전설이 서린
섬이 많으면 첩첩이 사연 많고
사연 많은 곳엔 철철철 정 넘친다
어딘들 비경 없고 어딘들 절경 없나
하지만 오늘도 여행은 계속된다
제 자태 감춰두니 풍경 사뭇 다르더라
나무 수(樹) 소 우(牛), 수우도가 그렇다
말이야 통영땅에 속해 있다지만
기실 생활권은 사천시에 연해 있다
출발지는 삼천포항 정기항로 하루 두 번
여객선 놓쳤다면 임시배편 대절이니
통영 사람들도 못 가본 이가 대부분
사량도 금평항에서 낚싯배 대절하여
첫봄에 입 맞추며 섬 기행 떠나보자
저어기 손끝에 앉은 자태고운 바위섬
매바위 휘돌아 가까이 다가가니
거대한 바위가 솟아오른 형상으로
암벽은 남해 바다 물길을 막고 선다
선착장에서 내리면 고래바위 방향 계단
하지만 오늘은 해안길이 더 먼저다
몽돌밭 은박산 백두봉 고래바위
절경은 아꼈다가 절정에서 꺼내보자
지령사(至靈祠)란 사당에 얽힌 전설이 재미있다
한 어부의 아들은 반인반어(半人半魚) 모습으로
커가면서 행동 또한 유달라 보였더라
왜구들 출몰하여 노략질 일삼을 때
청년은 분기탱천 떨치고 일어서서
빼앗긴 식량 되찾고 왜구들 격퇴하니
사람들은 그를 일러 설운장군 칭송했다
왜구들 꾀를 내어 조정에 상소한 즉
반인반어 괴물이 어부를 괴롭히니
관군으로 하여금 죽여 달라 하였으니
이에 설운장군 과감히 맞싸웠네
욕지도 판관부인 아내로 맞았건만
어찌 알았으랴 부인의 내통으로
관군에 사로잡혀 칼끝에 죽고 만다
왜구들 다시 몰려 노략질 심해지자
원통하고 애통하다 그 혼백 위로하자
사당지어 음력 보름 제 지내어 위로하자
한목숨 보존하고 풍어도 기원하자
방문객들 부정탄다 얼씬도 못하게 하라
설운장군 이야기는 예서 그만 접고
수우도 섬구경을 다시금 떠나보자
누가 저 멧돼지 좀 잡아주오
여기저기 검색하면 동백군락 좋다는데
너무 큰 기대일랑 일단은 접어두라
기대가 지나치면 실망도 큰 법이라
눈대중 대충 봐도 과장된 설명이다
비진도 소매물도 장사도 군락보다
못하면 못하였지 나은 건 별반 없어
하지만 여행객들 실망은 너무 이르다
동백 군락 빠져 나와 진풍경 마주하라
은박산 암릉 따라 정상에 올라보면
수우도 진면목을 제대로 볼 것이니
카메라 눌러대는 손길이 바빠진다
백두봉 올라보면 바위섬 웅장하다
산은 낮다지만 등산길 만만찮다
비스듬한 바위 절벽 밧줄에 의지하여
건너편 조망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나무 사이사이 언뜻언뜻 드러나는
바다는 쪽빛 물살, 바람은 훈풍인데
이제 막 진달래꽃 드문드문 피어난다
섬마을 민박집은 두어 집 고작인데
이용객은 대부분 낚시꾼들 차지다
젊은 사내들은 온갖 구구 생각하여
담치며 홍합양식 돈푼이나 만지는데
노인들은 밭 한 뙈기 농사도 어렵단다
시도 때도 없이 내려오는 멧돼지가
마늘 순 고구마 순 요절을 내고 마니
철철이 포수 모시는 실랑이도 지쳤단다
여름 한 철 해수욕장도 걱정은 매한가지
육지에서 떠내려 온 쓰레기들 천국이니
섬에 나서 섬에 사는 운명이 야속하다
오후 3시 반갑다 일신호 잡아타고
사량도 돈지마을, 금평을 돌아들어
가오치에 도착하니 겹겹이 혼곤하다
멀미에 소금에 전 하루치의 섬 여행
돌아와 눈 감으니 그리웁다 수우도
박경리 선생을 추모하며
-가사로 쓰는 통영이야기 7
당신의 묘소에서 곰비임비 쓰린 마음 위로받고 갑니다
박경리 선생님, 바다가 잔잔합니다.
생명의 태실 묻힌 고향으로 오신지
올해로 어언 7년이 지났습니다.
한산도가 손에 잡힐 듯 보이는 언덕배기
산양읍 신전리 아늑한 미륵산 기슭
영원한 안식의 집 양지농원은 조용합니다.
열대야 간밤의 잠은 어찌 평안하셨나요?
요즈음 통영은 안녕하지 못합니다.
당신이 그토록 염려하던 결과처럼
지구는 뜨거워져 적조로 몸살입니다.
가두리 양식장 떼죽음의 고기들이
매몰되는 현장을 아프게 바라봅니다.
바람이 바람에 실려 더 푸른 바람으로
매물도 연대만지 달아에서 이곳까지
청신한 소식들 더더욱 청아하게
봇짐에 가득 담아 펼쳐내고 싶었건만
맘대로 느낌대로 이뤄지지 못함이
아프고 안타깝고 아리어만 옵니다.
그러니 그런 마음 가슴에 싸매고 와
곰비임비 쓰린 마음 위로받는 심정으로
애로라지 이 흙 내음, 이 골짝에 왔습니다.
손 모아 합장하면 제가 선 이곳이 바로
미타찰(彌陀刹)의 세계가 아닌가 싶습니다.
열정의 주마가편을 내려주십시오
우리 독자들과 문단의 후인들은
그리움과 안타까움에 가슴조이기 보다는
당신께서 살아생전 지성으로 깨우쳐주신
모국어 사랑과 문학적 자양분
생명과 환경의 소중함을 배웁니다.
보세요, 저 풍광, 면면히 빛나는 역사
통영은 그렇게 불멸의 작품으로
오롯이 별빛처럼 존재하고 있습니다.
낳아준 고향은 그렇게 다시 태어납니다.
낯익은 작품 속엔 통영다운 풍습과
짭조름한 감칠 맛, 그 게미가 좋습니다.
‘김약국의 딸들’엔 사연도 많습니다.
새로 난 신작로와 신촌들이 생겨나
영영 잊히어 사라질지도 모르는
옛 고을들 구절구절 행간마다 살아나고
해평나루 아랫녘에 발목 담근 미륵산과
먼저 간 남편 따라 순사한 아낙네의
지극한 전설 품은 열녀비도 있습니다.
작품 속 고향은 독자들의 고향으로
스미고 스며들어 꽃피우곤 합니다.
작가는 시공을 초월해 말해줍니다.
오베르 마을은 고호에게 배웠고
지베르니 마을은 모네에게서 배웠으니
작가를 품은 고장은 진정 축복입니다.
또한 우리들은 당신의 삶을 사랑합니다.
흙냄새 맡으며 채소를 가꾸시던
여인네의 소박함이 문학의 뿌리입니다.
조용히 당신의 자서(自序)를 떠올립니다.
“내게 있어 삶과 문학은 떨어질 줄 모르는
징그러운 쌍두아(雙頭兒)였더란 말인가”
경외심은 앙가슴 깊은 곳에 스미어
묵중한 교훈으로 각인되어 있습니다.
지금도 이곳엔 수많은 이들이
숨결을 느끼려 찾아오고 있습니다.
봄 가고 여름 가고 빈 가을 서리가 와도
꽃들은 피고 지며 우리를 반깁니다.
그러므로 작별의 술을 뿌리진 않으렵니다.
수많은 섬들이 바다를 지키듯
북극성이 길 잃은 배들을 인도하듯
뜨거운 열정의 주마가편을 내려주십시오.
옻칠 미술관에서
-가사로 쓰는 통영이야기 8
저기, 저 아래, 고무신만한 바다를,
그 바다 그윽이 굽어보는 용남면 언덕
통영 옻칠미술관, 오로지 옻으로만
한 장르를 열고자 한 칠예가 김성수
옻칠을 접한 것도 이미 역사였다
이력서 맨 앞에는 운명이 된 이곳
전쟁의 포성이 한창이던 1951년
도립 ‘나전칠기기술원양성소’
1기생을 수료와 함께 먼 길을 걸어왔다
김봉룡, 안용호, 장윤성 선생 등
이름만으로도 설레는 나전칠기 명장들과
계시처럼 맺은 인연 그 연줄 이어받아
고교 시절에도 애오라지 주경야독
31세에 국전추천작가 일가를 이뤘으니
'김성수 상감기법'은 고유명사가 되었다
한 가지 이루고 갈 바램이 있다면
내 고향 통영을 세계 옻칠 예술의
명백한 중심지로 만드는 일이다
옻칠 나이만으로도 환갑을 넘겼으니
그 일 하나 붙들고 세상과 싸워야지
옻칠의 계승이야 말할 것 없다지만
과거의 옷을 벗고 현대에 이끌어 내는
새로운 옻칠예술의 심화 확장이 그것이다
무엇으로 천년을 열어가려 하는가
천 년 전 그 무엇과 직면하려 하는가
나는 박제된 미라가 되고 싶진 않다
다만 미라를 입힌 옻칠을 전할 뿐이다
옻칠은 사명이며 내 삶의 존재이유
미래를 보려거든 예서 과거를 보라
유구하나 여전하고 여전하니 영원하다
이미 중국에선 7천년의 역사였고
삼국시대 고분에선 출토품이 증거하고
고려 나전칠기 중국 사서에 기록됐다
품격을 말하려면 앞자리에 거론하고
첨단 미래도료임을 명심 또 명심하라
애지중지 만져보라 무해하고 유익하다
목기며 전통악기, 대장경은 물론이고
승용차 광케이블, 잠수함에 이르기까지
옻칠은 과학이며 검증된 재료공학
먼 훗날 누가 날 묻거든 이리 전해다오
칠흑의 어둠과 흑진주의 광채 속에
미친 듯 살다 떠난 호호백발 노인이었다고
통영엔 제주 해녀가 산다
-가사로 쓰는 통영이야기 9
들리나요? 귀대고 들어보면 들려오는
낯익고 낯선 소리 그대여 들리나요?
썰물로 바람으로 일몰로 전해오는
놀멍 쉬멍 한 바당 제주 물새소리
갓물질 뱃물질로 바다에 넋을 묻고
바람아 불지마라 잠수배 떠나간다
이승 저승 왔다갔다 숨 끊어진 숨비소리
두렁박 가슴 앉고 죽고자 바다 가나
두렁박 가슴 앉고 살고자 바다 가지
낡은 태왁 물에 띄워 족새눈 갈고리에
호오이! 호오이! 자맥질하는 해핑이 바다
소라 미역 멍게에다 톳이며 전복까지
이 바다 맛을 건진 아낙네 웃음소리
바다는 아래로 흘러 제주에 이어진다
조가비에 비춰보면 서귀포의 푸른 햇살
통영에 제주가 있다 통영에 해녀가 있다
제주해녀 정착한지 벌써 한 세기
당동마을 마주보는 미수동 해안변에
바구니 어깨에 멘 젊은 해녀상 있다
펄펄뛰는, 살아있는 것들과의 교감
-가사로 쓰는 통영이야기 10
허오이 허오이 우럭이 팔천오백
허오이 허오이 문어가 구만삼천
18번 낙찰이요, 20번 낙찰이요
옷깃에 손 감춘 채 폈다 오므렸다
눈 분주 손 분주한 중매인과 경매사들
저들끼리 주고받는 암호인지 구호인지
펄펄 뛰는 사람냄새 진동하는 물비린내
통발배 들어오자 그물배 들어온다
저 마다 제 잘 낫다 물 튀기고 버둥대며
대가리 쳐드는 다종다양 수산물들
이 줄엔 우럭 광어, 저 줄엔 볼락 참돔
에라, 모르겠다! 담배 한 대 피워물자
기실 통영 와서 활어구경 해보자면
새벽엔 서호시장 대낮엔 중앙시장
이와는 전혀 다른 활어풍경 볼라치면
몇 군데 위판장을 차례대로 돌아보라
도천은 활어 나잠, 견유는 굴과 활어
어종 따라 시간 따라 위판풍경 다르더라
경매시작 알려주는 휘뚜루 호루라기
미리 찜한 어종들 손짓으로 불러내면
중도매인 눈짓 손짓 그러나 속임은 없다
오늘은 장어 참돔 도다리가 활항이니
경매가 아쉬우나 그런대로 만족이다
물량은 바다 몫이지 사람이 어쩔거냐
여섯물 열세물엔 어획고 부족이고
열네물 다섯물엔 풍어가 예상되니
그때 맞춰 오라지만 우리야 알 턱없다
이 모양 보다보니 근심 걱정 사라진다
귀한 구경 다했으면 뱃속이나 채워보자
도다리회 한 접시에 뚝배기도 좋으리라
볼 장 다 봤으니 가던 길 마저 가자
얼씨구나 사랑이야, 사량대교 이어진다
-가사로 쓰는 통영이야기 11
상도가 부르면 하도가 대답하는
사량도 두 개의 섬은 걸어서는 못간다네
두 섬은 마주보는 눈물의 아리랑이요
만나서 손잡으면 환희의 아리랑이니
그 세월 태초에서 오늘까지 이어졌네
아 지난 세월이야 돌이켜 무엇하리
오늘은 상하도 연결교량 낙성이니
한려수도 지도가 새빛으로 그려진다
사량도는 사랑도로 재탄생 하였다네
통영엔 물결 랑(梁)자 지명도 여러 군데
통영 거제 좁은 해협 견내량(見乃梁)이라 부르고
사량 욕지 통칭하여 원량(遠梁)이라 불렀으며
미륵도와 뭍 해협은 정량(貞梁)이라 부른다
그런데 왜 이 섬을 일러 사량도(蛇梁島)라 부르는가
두 섬 사이 해협이 뱀을 닮은 형상인가
이제는 사량도여 용이 되어 승천하자
다리발 완성되니 천지가 개벽이다
섬과 섬은 물론이요 사람과 사람 잇고
산과 산이 이어져 옥녀봉과 칠현봉
끊어진 산맥이 이제야 붙었구나
둘이 모여 하나 되니 얼씨구나 좋을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