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균의 영화 이야기

지난한 시대, 영화를 통해 읽는 세상-'라쇼몽(羅生門)’과 ‘곡성(哭聲)'을 중심으로

이달균 2017. 10. 30. 17:51

지난한 시대, 영화를 통해 읽는 세상

이 달 균

 

①‘라쇼몽(羅生門)’과 ‘곡성(哭聲)’, 그 기묘한 연상작용

 

한때 일본소설에 심취했던 적이 있다. 일본 전후소설을 읽으며 새삼 미국을 향해 선전포고를 한 일본인들의 공격지향성을 보면서 두려움을 느끼기도 했다. 동시에 한국 전후소설을 읽으며 두 나라 간의 차이를 새겨보는 기회를 갖기도 했다. 

 

이때 일본 소설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를 알게 되었고, 동시에 일본 영화감독 구로사와 아키라를 알게 되었다. 사실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 이름 정도는 다 알고 있다. ‘스타워즈’의 조지 루카스와 ‘인디아나 존스’의 스티븐 스필버그를 비롯한 여러 감독들이 영화적 스승이라고 치켜세운 것이 의아스러웠지만 영화를 보지 않은 상태에서 어떤 면이 영화선진국 감독들에게 영향을 미쳤는지가 궁금했던 것이다. 마침 그 당시 금지되었던 일본 영화들이 쏟아져 들어왔고, 상당한 영화들을 보게 되면서 그 갈증을 조금이나마 해소하게 되었다.


물밀 듯 밀려들어온 영화중에서 당연히 구로사와 아키라가 있었고, 대표작인 ‘라쇼몽’을 보게 된 것은 행운이었다. 이 영화는 1950년에 만들어졌으나 일본에서도 크게 빛을 보진 못했는데 이듬해인 1951년에 뒤늦게 베니스영화제 그랑프리, 아카데미 최우수 외국어영화상을 획득하면서 동양영화의 전설이 되었다. 이후 일본 영화는 1960년대 중반까지 황금기를 구가하면서 각종 국제영화제에서 숱한 상들을 획득하게 된다.


한편 2016년 개봉한 한국영화 ‘곡성’을 보면서 자연스레 ‘라쇼몽’을 떠올렸다. 두 영화는 전혀 닮지 않았다. 그런데도 기묘하게 연상되는 그 무엇이 있었다. 많은 화제를 몰고 왔고, 보는 이에 따라 제각각의 다양한 시각을 던져 주었기 때문이리라.


‘라쇼몽’이 그러했듯이 ‘곡성’도 해외 영화인들에게 많은 관심을 선사했다. 기존의 스릴러 영화는 극장을 나서는 순간 짜릿한 감전에서 깨어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 영화는 그때부터 다시 줄거리를 곱씹어보게 되는 독특한 경험을 하게 한다. 감독이 명쾌한 결론을 내려주는 것이 아니라 관객에게 다양한 결론을 내리게 하는 구조가 ‘라쇼몽’을 떠올리게 한 이유가 되었다.

 

②하나의 사건, 여러 관점의 기억

 

‘라쇼몽’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두 편의 소설(「숲속에서」와「라쇼몽」)을 얼개로 하여 만들어졌다. 이런 방식은 영화에서 즐겨 쓰는 방식인데 우리나라 영화(‘주홍글씨’, ‘고래사냥’ 등등)에서도 더러 시도되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서 하고 싶은 말은 그런 ‘구성 방식’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한 사건에 대한 여러 ‘관점의 기억’에 관한 것이다.


만약 우리가 어린 시절 운동회 날을 추억한다고 가정하자. 나는 백군의 일원으로서 마지막 릴레이에서 청군 선수를 극적으로 제치며 결국 백군을 이기게 한 수훈선수가 되었다. 그런데 다른 친구는 “아냐! 그때 나는 청군이었는데, 백군선수가 출발을 빨리하여 이등이 되고만 것이다. 결국 반칙으로 내가 진 것이다.” 거나 또 다른 누구는 “내가 원래 일등으로 가고 있었는데 누군가 호루라기를 불어 다시 시작하는 줄 알고 속력을 늦췄다. 결국 이로 인해 내가 삼등으로 쳐지고 말았다.” 이런 답이 없는 동창회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기억은 내가 믿고 싶은 대로 믿는 것이란 생각이 들게 한다. 이런 기억의 착각을 영화로 만든 것이 바로 ‘라쇼몽’이다. 음산한 흑백영화 한 편을 보면서 인간의 보편성이란 무엇인가, 혹은 진실이란 존재하는가, 하는 여러 의문을 가져보기도 했다. 원작소설이 갖는 문제성 때문이었겠지만 워낙 신선한 소재를 영화화했기에 깊은 인상으로 남아 있다.


그렇다면 2016년 곡성은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왔을까? 일찍이 이만큼 수많은 화제를 양산한 영화는 없었다. 김기덕 감독의 의식적인 폭력성, 박찬욱 감독의 문학성과 대중성과의 절묘한 결합, 홍상수 감독의 찌질한 지식인의 이중성 드러내기 등 독특한 개성을 내보이는 작품들이 많았지만 이번 나홍진 감독이 던져주는 스릴러는 그만의 차별화 된 독특함을 표출하기에 충분하였다.


심지어 어떤 영화평론가는 관객들에게 “감당할 수 있을까?”하는 의문을 표하기도 했다. 실제 영화를 보기 전이나 보고난 후에도 평론가의 글을 찾아 읽어야 할 만큼 난해하고 궁금증을 자아낸 영화임에 틀림없다. 스포일러에 화내지 않고 해설을 먼저 읽고 입장권을 사는 첫 영화이기도 했다.


그런데 정작 나홍진 감독은 코미디 영화라고 했다. 과연 그럴까? 극장을 나오면서 그동안 한국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짜증날 정도의 편집증과 혼돈에 사로잡혀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감독이 의도한 바는 있으리란 생각 때문에 여러 사람들과 대화를 나눠보았고, 남이 쓴 글을 읽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답은 없었다. 물론 감독을 만나 물어본다 해도 “그냥 본 대로 생각하세요.” 정도로 답하지 않을까 생각되었다. 

 

그래서 다시 두 번째 보았다. 그렇게 복잡해 보였지만 의외로 간단한 영화란 결론에 이르렀다. 워낙 연기자들의 연기가 좋고 배경이 그럴듯하고 음악과 음향이 리얼했기에 우리는 모두 그런 것에 빨려 들어가 정작 제대로 된 이야기는 흘려듣고 말았던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것 또한 감독이 의도한 것이며 우리는 충실히 따랐을 뿐이다.

 

③현혹되지 말라, 그러나 흔들리지 않을 자 누구인가?

 

그렇다면 두 영화의 구체적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먼저 ‘라쇼몽’이다. 한 사무라이가 숲 속에서 살해되고 그의 아내가 남편이 보는 앞에서 산적에게 강간당한 사건이 발생한다. 법정에서 사무라이의 아내, 살인 강간 혐의로 잡혀온 산적, 무당을 통해 증언하는 사무라이의 혼령, 목격자인 나무꾼의 말 등 사건은 술회자의 입장에 따라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


욕정과 배반, 살인에 얽힌 이 스토리는 4명의 인물들이 모두 자기 말이 진실인 것처럼 말하지만 범인이 누구인지 끝까지 알 수 없다. 이렇게 사건은 하나인데 각자 자신에게 유리한 서로 다른 증언을 한다는 스토리는 “과연 진실은 존재하는가?” 하는 질문을 던져 준다. 구로사와 아키라는 의식 속에서 각색된 기억의 모습을 통해 이기주의와 자기중심적인 관점을 들어내 준다.


산적 타조마루(미후네 도시로)는 “숲길을 가다가 마사코(쿄오 마치코)를 본 후 그녀를 탐했으나 그녀 역시 기꺼이 나를 받아들였고, 그런 다음 남편 타케히로(모리 마사유키)를 풀어주고 결투를 하다가 그 남편이 죽게 되었다.”고 했고, 마사코는 “산적에게 강간과 치욕을 당했다. 그리고 이를 본 남편까지 자신을 내쳐 그 분노로 발작상태에서 자신이 남편을 죽였다.”고 말한다.


죽은 타케히로는 영매를 통해 말하기를 “그들의 주장 중 자신이 죽었다는 것은 맞다. 아내가 산적 타조마루 못지않은 욕정을 보이면서 산적에게 자신을 죽이라고 요구했으나 살인을 해서 얻을 것이 없다고 생각한 타조마루는 달아나고, 마사코 역시 달아나 버려 혼자 남은 그는 자살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세 사람은 모두 자신에게 유리한 말을 했다. 그렇다면 타조마루는 무자비한 범죄자인가, 마사코는 죄 없는 피해자인가, 타케히로는 명예를 아는 사무라이인가 하는 의문은 풀리지 않는다.


나무꾼이 나타나 그늘에 숨어 지켜본 사실을 말하기 전까지는 모두가 사실처럼 보인다. 나무꾼은 “아내가 천박한 태도를 보인 것이 사실이고, 산적의 허세는 거짓이며, 사무라이 남편은 겁쟁이였다.”고 말한다. 하지만 평민이 나무꾼도 사건에 연루되어 있음을 지적하자 누구의 말도 완벽한 증언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만 남게 된다. 즉, 진실은 더 이상 찾을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린다.


이런 얼개는 ‘곡성’에서도 엿보인다. 누가 악령이고 누가 선한 존재인가. 이 물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감독이 만든 거미줄에 의해 혼돈을 일으킨다. 이 영화는 기독교적 분위기를 저변에 깔고 시작한다. 그러나 정작 감독이 의도하는 것은 윤리와 반 윤리가 아니라 하나의 게임이 아닌가 싶다. 존재하지 않는 인물, 일어날 수 없는 현상을 기묘하게 엮어 선과 악을 구별해 보라는 것이 감독의 의도가 아니었을까. 그래서 일각에서는 이 영화는 전형적인 상업영화이지 예술영화는 아니란 것이다. 그러나 “상업영화와 예술영화의 명확한 경계 또한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봉착하면 이 또한 대답은 궁핵해 진다.


영화 줄거리의 중요한 부분으로 등장하는 굿과 샤머니즘적 요소들은 하나의 장치에 불과하다. 굳이 무당을 등장시킨 것 자체가 감독의 숨은 의중이다. 우리로 하여금 곧바로 중심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빙빙 돌아오게 한 그럴듯한 장치였던 것이다. 일광(황정민)의 진짜보다 더 무당 같은 연기, 강렬한 눈빛을 가진 일본인(쿠니무라 준)에 대한 맹목적 반감, 주인공인 평범한 경찰 종구(곽도원)와 그의 딸의 신들린 듯 완벽한 몰입, 기괴하고 은밀한 눈빛의 무명(천우희) 등등으로 인해 시선은 자꾸 옆길로 샌다. 감독이 의도한 트릭이 빛을 발한 것이고, 관객들은 속수무책으로 넘어간다.


제일 첫 장면, 누가복음 24장 37~39절, “그들은 놀라고 무서움에 사로잡혀서 유령을 보고 있는 줄로 생각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당황하느냐? 어찌하여 너희는 당황하느냐? 어찌하여 너희는 마음에 의심을 품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보아라. 너희가 보다시피 나는 살과 뼈가 있다." 이 글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 말에 지나치게 현혹되어서도 안 된다. 이 말에 정답이 있다고 믿으면 여기서 헤어날 수 없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이 영화는 한국판 엑소시스트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매우 낯선 영화처럼 다가온다. 기독교적 영화를 가장 비기독교적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엑소시스트를 보면서 논리적 준거를 들이대지는 않는다. 한국적 정서인 무속, 시골의 폐가, 전라도 곡성지역의 사투리로 엮인 기독교적 영화란 얼마나 낯선 것인가. 관객은 당황스럽다. 그리고 “이게 뭐지?” 하는 반응을 나타내는 것은 당연하다. 

 

이 영화는 세 개의 시선으로 전개된다. 하나는 악마, 둘째는 악마에게서 마을을 지켜내고자 하는 선한 존재(예수의 분신), 셋째는 흔들리는 인간으로 구분된다. 악의 존재는 일본인과 무당 일광, 선한 존재는 무명, 흔들리는 이는 주인공 종구를 비롯한 대다수의 등장인물들이다. 

 

비교적 일정한 거리를 둔 주인공이었지만 자신의 딸이 혼수상태에 빠지고 기현상을 겪게 되면서 그도 그 소용돌이 속으로 돌진한다. 무성한 소문, 알 수 없는 기괴함이 뒤덮은 마을은 아수라장으로 변한다. 그런 그에게 무명은 “내 말을 믿어라, 흔들리지 마라, 나를 믿지 않고 흔들린다면 가족들은 다 죽는다.”라고 수차례 경고한다. 그러나 무당 일광은 그 반대로 말한다. “그녀를 믿어서는 안 된다. 다 죽는다.” 

 

이런 상태라면 그 누구라도 흔들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답은 간단하다. 누가복음, 그렇다. 종교는 따지지 않고 믿는 것이다. 믿음을 배신하든지 의심하면 이미 종교성은 상실되고 만다. 무명은 내 말이 진실이니 의심하지도 말고 흔들리지도 말고 믿어라, 그러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리라 말한다. 그러나 속세의 평범한 한 사람인 종구는 끝내 그 믿음을 배반하고 집으로 향한다. 그리고 절단 난 집안을 목격하게 된다.

무명은 종구에게 “닭이 세 번 울기 전에 집에 들어가지 마라.”라고 충고한다. 그러나 우리의 주인공은 닭이 두 번 울자 집으로 들어가게 되고, 집안 식구들을 모두 죽고 만다. 여기서 왜 닭이 세 번 울기 전이라 말하는가? 이것이 바로 앞에서 말한 기독교적 영화이고, 무명이 선한 존재임을 알려주는 장면으로 보인다. 예수는 최후의 만찬을 마치고 베드로에게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 고 말했다. 베드로는 끝까지 예수와 함께 하리라고 맹세했지만 결국 세 번 부인하였고, 나중에 그 나약함에 대한 참회의 눈물을 흘린다. 부인한다는 것은 두려움 앞에 굴복하는 것이다. 무명은 여기서도 “흔들리지 마라, 굴복하지 마라, 두려워마라.”고 말한다.

 

④진짜와 가짜가 모호한 세상

 

영화 ‘곡성’에서 흔들리지 않는 사람은 단 한 사람이다. 이 인물은 전혀 강조되지 않은, 그저 지나치는 한 사람이다. 하지만 난 이 인물에 대해 돋보기를 들이대고 싶다. 바로 그 마을의 나이 든 신부다. 젊은 사제는 주인공의 말을 듣고 이리 저리 흔들리면서 사건의 중심을 비켜가지 못하지만 늙은 신부는 흔들리지 않는다. 딸의 병을 보면서 신부를 찾아간 종구에게 신부는 “의사를 믿어라. 병원으로 가서 치료를 받아라.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고 단호히 말한다. 대수롭지 않은 장면으로 처리되었지만 분명 이 영화의 주제는 이 한 마디에 있다.


사람들은 모두 제가 본 것을 보고 제가 느낀 대로 산다. 그것이 진실이든 허구이든 거짓이든 제 판단을 믿으며 산다. 그래서 생은 정답이 없다. 종구를 비롯한 우리 모두는 환상에 사로잡혀 살고 있기도 하고, 단체로 마취 혹은 최면에 걸려 살고 있기도 하다. TV를 틀면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정치, 사회, 연예 기사들이 다 사실일 수는 없다. 그런대도 세상은 잘 굴러가고 있다. 곡성이란 마을에서도 죽는 자는 죽고 산자는 산다. 

 

극장 밖에서 이토록 치열하게 해설하고 각각 다른 주장을 드러낸 영화는 일찍이 없었다. 그런 설왕설래를 보면서 나홍진 감독은 빙그레 웃음을 머금었을 것이다. 결국 이 영화는 감독이 꾸민 한 편의 완벽한 코미디물이다. 영화 속에서 코미디를 그린 것이 아니라 극장 밖에서 온갖 현학적 수사들을 생산한 기현상이 바로 코미디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감독이 던진 미끼를 문 관객들의 허구에 찬 온갖 말들의 성찬, 진정한 코미디는 이런 것이 아닌가.

 

⑤안개 속에 있다면 안개가 걷히길 기다려라

 

‘라쇼몽’과 ‘곡성’, 두 영화는 전혀 다른 내용의 영화지만 분명 상당한 유사성을 내포한다. 사건에 대해 상충적 관점을 제시함으로써, 수많은 해석의 여지를 남기며 관객의 적극적인 참여를 요구한 점이 그렇다. ‘라쇼몽 효과’라는 말이 있다. 이는 한 사실에 대해 자신이 기억하고 싶은 것만 골라 취사선택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되었다.


이런 현상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정치권이다. 여야 대표가 같은 사안으로 만나고 나왔는데 정작 대변인의 성명은 전혀 다른 관점으로 나타난다. 회고록도 마찬가지다. 어떤 한 특정한 사안을 인식하는 것은 사람마다 다르다.


우리는 모두 한 역사의 질곡을 헤쳐 왔다. 그런데 똑 같은 길을 걸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는 그 과실을 따먹는 사람이 되어 있다. 생애를 관통한 역사도 코미디를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으로 변해 있다. 가짜뉴스가 판치는 세상, 우리는 어느 것이 진짜인지 구별이 모호한 사회를 살고 있다. 영화는 영화에 불과하지만 사회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다. 동시대인의 주목을 받았다면 분명 뭔가 보편적 공감대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안개가 짙은 바닷길에서 전조등은 무용지물이다. 그럴 땐 조용히 안개가 걷히길 기다리면 된다. 천천히 목적지를 향해 가는 것이 더 안전하고 현명한 항해의 자세가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