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균의 대표시

2017 『서정과 현실』상반기호 원고 - <「요절夭折」외 4편>

이달균 2017. 4. 11. 10:54

2017 『서정과 현실』상반기호 원고 - <「요절夭折」외 4편>

 

 

요절夭折  

이달균

 

칠흑의 밤을 밝히는 이들에게 들려주리

촛불에게 약속에게, 부딪는 부싯돌에게

내 미처 이름 짓지 못한

한 순간의 섬광에게

 

눈물에 닿기 전에, 선잠이 깨기 전에

뿌리마저 태우고 쓰러지는 나목처럼

눈 감은 밀랍인형의

창백한 새벽처럼

 

내일은 저 홀로 달려오지 않는다

지친 이름이여, 짧은 몇 줄 시여

도저한 생을 할퀴고 간

상처의 흔적이여

 

 

잊혀 진 우물  

이달균

 

짐승도 산그늘도 다녀간 흔적 없는

 

외로운 북향의 우물이 있습니다

 

간간이 치열 어긋난 빗방울만 찾아옵니다

 

하늘이 적막하면 별에도 녹이 습니다

 

곤궁한 못 자국처럼 웅크린 만년필 하나

 

메마른 상상력의 샘을 가만히 바라봅니다.

 

 

무하마드 알리

이달균

 

그 주먹에 필적할 복서는 있었지만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쏜다”는

 

불멸의 명구를 남긴 선수는 없었다

 

 

 

난중일기 14

-은퇴隱退

이달균

 

가방을 동여매고 만나는 늦봄의 항구

오랜 사랑을 잃고 그렇게 치통을 앓고

적도의 눈망울들과 야자수와도 작별이다

 

떠도는 개들은 낮술에 젖어 있다

고장 난 바람은 수선을 기다리고

묵중한 시계탑 아래 시간이 앉아 존다

 

굵은 손금 속에 그려진 항해일지

오늘도 나침반은 수평선을 향해 있다

도처에 바다는 있고, 어디에도 바다는 없다

 

허공의 담벼락을 저 홀로 허청이다가

어설픈 눈빛으로 건네는 위로의 잔

썰물의 발자국 하나 밀물에 지워진다

 

난중일기 15

-마도로스 최

이달균

 

거침없는 엔진은 이곳에서 멈춘다

산처럼 쌓여진 컨테이너는 청춘의 꿈

고단한 강철의 하역도 역사에 묻는다

 

휘파람을 불어라 그리운 라스팔마스

낡은 사진첩에도 사랑은 있었으니

음악과 파도의 지중해, 그 추억에 입 맞춰라

 

파독 간호사와 광부로만 기억되는

지나온 땀의 영토, 하지만 20세기여

제복과 구리빛 얼굴, 말보로를 잊지 마라

 

해양의 지도 위에 구축한 나만의 섬

별빛 내린 갑판에선 내가 중심이다

그리운 박명의 시간, 그 십자성에 건배!

 

 

 

 

약력

57년 경남 함안 출생

87년 시집『南海行』과 무크 『지평』으로 등단.

『늙은 사자』외 5권의 시집이 있고,

영화에세이집『영화, 포장마차에서의 즐거운 수다』가 있다.

중앙시조대상, 경남문학상 외 수상

 

주소 : 53040 경남 통영시 통영해안로 통영시청 집필실

E-mail : moon1509@korea.kr

010-2590-15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