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균의 평론

2015 유심시조월평 10월호 - 이달균

이달균 2015. 10. 6. 20:36

 

 

시조에 대한 반성

 

1.시조 700년의 뿌리

 

처음『유심』월평을 의뢰받았을 때 무척 망설였다. 아니 망설였다기보다 고민했다는 것이 적절한 표현이다. 시조 기백수를 지었다 하나 내가 시조를 얼마만큼 아느냐 하는 것이 그 고민의 시작이었다. 시조인들은 시조 700년이란 역사를 자랑스럽게 말하고 우리시의 뿌리라고 힘주어 주장한다. 그러나 노래를 뺀 문자만으로 된 현대시조의 역사는 100년 정도로 단축된다. 우리가 진정 700년 역사를 가진 유산이라고 얘기한다면 그 이전의 시조창을 외면하고 말할 수는 없다. 고백하건대 그 뿌리에 대한 공부가 턱없이 부족한 사람이 시조를 논하고 비평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시조인은 시조를 창작하는 시조시인과 시조를 노래하는 시조창인을 두루 일컫는 말이다. 무형문화재 제10호 이수자 향산 강재일씨는 “시조창인은 거의가 시조를 짓지 못하고, 시조시인은 시조창을 하는 이가 드물다. 그러므로 시조인은 반쪽으로 서로 분리되어 있다. 진정한 시조연구는 이 두 부분의 통합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말한다.

한국시단에서 시조를 보는 관점은 단시조 형식의 기본에 입각하지 않으면 시조가 아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이는 매우 잘 못된 시각이다. 전문연구가가 아니라하더라도 시조창보를 곁눈질로만 보아도 옛 시조의 다양성을 새삼 깨닫게 된다. 다시 말해서 시조는 오늘날 우리가 아는 형식을 뛰어넘어 매우 다양하게 변주되었으며 이미 자유롭게 창작되고 노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평시조는 대개 3분 내외로 노래되는데 사설시조는 평시조 서너 배의 가사를 갖고도 3~4분 정도로 압축하여 부른다. 이를테면 한 박자 안에 2자에서 5자까지 붙이기도 하고, 장단과 박자는 평시조의 흐름과 동일하지만 한 음이 여러 개의 음으로 세분됨으로 리듬감은 전혀 다른 양태로 드러난다. 다시 말해서 평시조가 길게 늘여 노래했다면 사설시조는 요즘의 랩처럼 빠르게 노래했다는 차이가 있다. 이는 조선 후기로 접어들면서 조금씩 삶이 복잡다단해 졌고, 그러다보니 자연 할 말도 많아지고 소재와 주제도 다변화되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일각에서는 사설시조는 자유시와 구별되지 않으므로 정체성을 갖기 위해서도 평시조를 고집해야 한다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시조창가집을 보면 자유시 이전에 이미 우리는 현재의 자유시를 뛰어넘는 매우 활달한 사설노랫말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평시조, 사설시조, 질음시조, 중허리시조, 엮음시조, 각시조, 반각시조, 우시조 등 여러 유형의 창법을 가졌을 뿐 아니라 전라, 충청, 경상에서 조금씩 차이를 보이며 노래되어 왔음도 알 수 있다. 평시조의 3.4조 율격은 말의 보법이 아니라 노래의 창법이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외형률을 지키는 것은 시조창에서 그 원류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평조는 편안하고 차분하게 노래하고, 계면조는 단조음과 비슷한 비애의 정조를 가지는 동시에 화려하고 구성진 특색을 보여주는 것이 그것이다.

 

현대에 와서 우리는 사설시조를 써도 가급적 종장만큼은 3-5-4-3의 음보를 지키려고 노력한다. 이는 자유시와의 구별을 위한 것인데 옛 사설시조는 종장마저도 엇시조 가락처럼 길게 늘인 노래가 많음을 유의해 봐야 한다. 다시 말해서 사설시조는 이미 엄연히 존재했었고 우리 조상들이 익히 노래해 왔던 선대의 소중한 유산임을 명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시조단에 들어와서 많은 세미나에 참석해 보았다. 주제발표의 대상은 메타포, 이미지 등 거의가 현대시의 관점에서 시조를 바라보려는 노력이 주를 이룬다. 또한 늘 빠지지 않는 것이 형식에 관한 것인데, 정작 위에 말한 이런 다양한 형식에 대해서는 애써 관심을 거두려 한다. 민족시를 말하면서 뿌리에 닿으려는 노력을 게을리 한다면 시조700년의 위의는 헛구호에 불과할 수도 있다.

 

어느 별이 보낸 인연이었나

부르지 않아도 찾아와서는

 

기꺼이, 하늘 아니어도 솟구쳤다간 날개를 펼쳐 선회하듯이 마땅히, 날 기다 리지 않아 날 붙잡아두지도 않아 아닌 듯, 내 마음 잔가지 흔드는 바람이었다가 정말은, 잠시도 날 가만두지 않는 파랑(波浪)이었다가

 

어느 날

보내지 않아도 떠나버릴 그대여!

 

-홍성란,「큰 고니를 노래함」전문(《유심》2015년 9월호)

 

위의 말대로 이 시조를 창(唱)한다면 그 곡조는 계면조가 적당해 보인다. 때로는 유장하게 때로는 격렬하게, 바람처럼 왔다가 한시도 고요를 허용치 않는 파랑처럼 시인을 흔들기 때문이다. 고니가 시인과 어떤 상관인지는 몰라도 인연과 절연의 아픔을 절절히 노래한다. ‘어느 별이 보낸 인연’이라면 고귀한 관계임을 전한다. 못 이룰 운명의 사랑은 원래 ‘부르지 않아도 찾아’오는 존재이고, ‘보내지 않아도 떠나버릴’ 존재이기도 하다. ‘그대’는 내가 저어하지 못할 그 무엇이기에 더욱 아프다. 날개는 심연 깊숙이 내려앉았다가 급격히 솟구치며 선회한다. 하늘이건 하늘만큼 넓은 바다이건 시인은 주의보에 떨며 혼절한다.

 

이 시는 외형의 제약은 어쩔 수 없지만 마음마저 갇혀서는 안 됨을 잘 보여준다. 결 고운 머릿결이 시조의 외형이라면 바람 따라 자연스레 흔들릴 수도 있어야 진정 웅숭깊은 시가 된다. 자세히 읽어보면 이런 가락의 높낮이를 위해 몇 개의 시어를 잘 배치해 두었다. 늘여 쓴 중장의 첫 음보로 ‘기꺼이,’ 하면서 목청을 가다듬고 다음엔 ‘마땅히,’를 배치하여 새로운 음률을 만든 후, 다시 중간쯤에서 ‘아닌 듯,’으로 가락을 끌어온다. 그리고 마지막엔 ‘정말은,’으로 숨결을 고르며 다음 말을 기다린다. 이런 장치는 시의 처음과 끝을 단숨에 읽게 하는 한편 고저의 여울을 만들어 입체감을 더해준다.

 

2. 행간 넓은 시들

 

오대산 월정사에 들렀던 오래전에

 

팔각의 소슬한 그 탑 아래 섰을 때

 

불현 듯 주체할 수 없는 도심(盜心)이 일었지

 

그 여러 층 가운데 한 층을 슬쩍해서

 

보료로 삼아서 깔고 앉아 지내왔는데

 

탑 위에 떠 있는 기분 그렇게 살았지

 

호사도 오래되면 싫증나는 이치 따라

 

이제 그만 제자리로 돌려주려 하는데

 

지금의 내 힘으로는 옮길 수가 없네

-박시교,「고백」전문(《내일을 여는 작가》2015년 상반기호)

 

솔기자국 없는 시를 만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우린 그런 경지를 천의무봉이라 한다. 내겐 이 시가 그렇게 다가온다. 3수의 시는 탑신처럼 잘 짜여 있다. 첫 수에선 탑의 아름다움을 도심(盜心)이 이는 마음으로 표현하고, 둘째 수에선 탑 한 층을 가슴에 여며 오래 기억 속에 묻어 두었음을 고백한다. 마지막 수에선 그것마저 되돌려 주어 더욱 허허롭게 살고 싶지만 그 또한 그리 수월치는 않다.

시인은 도심(盜心)으로 월정사 8각 9층탑 한 층을 슬쩍하였고, 이 시를 통해 독자의 마음까지 훔쳐간다. 언젠가 월정사에 들렀을 때엔 눈이 온 날이었는데, 적광전 정면에 선 탑이 늠름했다. 다만 탑 앞에 손을 모은 모조 보살상이 을씨년스러웠다는 기억이 난다. 이 시를 읽으면서 그때 난 왜 그 한 층을 들고 올 생각을 못했을까. 그저 추운 절을 바삐 떠나올 생각이 앞선 까닭이다.

 

늘 얘기하지만 시에서 발효의 시간은 중요하다. 시상을 묵힌 것과 묵히지 않는 것은 차이가 있다. 창고에 시가 예금되어 있는 시인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시인도 있다. 어느 날 문득 날아든 청탁서는 청구서처럼 부채의 느낌으로 다가온다. 모른 척 버려두기엔 편집자의 배려와 성의가 마음에 걸리고 적당히 분칠하여 떠나보내기엔 스스로 얼굴이 화끈거린다. 쫓기듯 시를 만들어 ‘보내기’를 누르면 그 구차함을 독자는 먼저 안다. 화장기로 덧칠한 얼굴일수록 더 애처롭다. 그러기에 과작의 시인이 미더울 때가 있다.

 

 

한 아이가

수평선이 어디냐고

묻고 있다

 

한 노인은

그곳은 없다고

중얼댄다

 

자벌레

나무에 떨어져

그곳 향해 꿈틀한다

-최연근,「땡볕, 그리고 지루한 여름날에」전문(《시조시학》2015년 여름호)

 

최연근의 시는 장자의 어법을 연상케 한다. 우화처럼 읽히는 이 시는 바람이 들고나는 옹기처럼 행간이 비어 있다. 아이는 또렷이 눈을 뜨고 ‘수평선이 어디냐고’ 묻고, 노인은 ‘그곳은 없다’면서 ‘중얼’ 댄다. 아이는 세상의 모든 것이 궁금하다. 그러나 노인은 이것이 진실이라고 단정하지 않는다. 살아보니 명쾌한 답도 없고, 답 아닌 것 또한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우주만물의 이치를 알 수도 없고 알려줄 길도 없다. 맥없이 아이와 노인이 선문답하듯 하는데 자벌레는 ‘꿈틀’하며 제 존재를 드러낸다. 나도 당당히 우주의 한 일원이라고 수평선 쪽으로 눈길을 준다. 자벌레는 한낱 미물이 아니라 우주만물의 한 구성원이다. 장자는 거칠 것 없이 천지의 정신과 교감하면서도 미물을 하찮게 대하지 않았다. 미물이란 말은 인간이 만든 말일 뿐이다. 세상에 존귀하지 않은 것은 없다. 우리가 진리라고 믿는 것이 어쩌면 오만의 덩어리일 수도 있다.

 

3. 두 젊은 시인의 시

 

‘21세기시조동인’ 제7집 『으짜꼬 으짜꼬』를 읽는다. 이송희, 황성진, 이석구, 조성문, 노영임, 임채성, 김남규, 박성민, 김영란, 김보람 등 10명의 2000년대 신춘문예 당선시인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 만큼 문단 안팎의 관심도 크고 나름의 성취도 얻고 있다. 2000년대 등단한 동인과 그 이전 시인들과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여러 번 읽어봤지만 그들만의 뚜렷한 변별력은 찾지 못했다.

 

동인은 ‘따로 또 같이’라는 명제 위에서 굴러간다. 지향점이 같은 사람들이 모여 서로 치열하게 품평하고, 피터지게 깨어지면서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한다. 그것이 동인의 목적이다. 그러나 이름만 동인일 뿐, 서로 치켜세우며 연중행사로 적당히 사화집을 내고 친목을 과시하는 모임이라면 좀 생각해 봐야 한다.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선민의식의 동류로 묶이는 것이다. 그 유혹은 너무나 달콤하기에 온실을 박차고 나올 이유마저 없어진다. 그런 모임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동인지에서 두 사람의 시를 들여다보기로 한다.

 

마음이 불타던 날 산으로 뛰었습니다 두 살짜리 아이 업고 담요 한 장 덮어 씌워 스물둘 신혼의 꿈도 그 때 모두 불탔습니다

 

쌀 한 되 간장 한 병 산사람에게 준 죄로 콩밭 소나무밭 벌레처럼 기어서 산 으로 숨었습니다 무자년 가을입니다

 

후다닥 피해 달아난 남편소식 끊어지고 몇 날을 헤매었을까 산에 눈, 내립니 다 두 손에 내린 곤밥을 와들와들 삼켰습니다

 

산에서 잡혔다고 산사람이 되었습니다 전기고문 비행기고문 팔 꺾여 허리 부 러져, 가는 숨 늘어진 아이 품에 안고 울었습니다

 

배에 태워 어딜 가는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무릎에 눕힌 아이 숨이 곧 멎을 것 같아 코에다 손을 대보면 아뜩한 숨소리

 

새끼가 무슨 죄냐 들여준 죽물, 서너 번 입에 넣었더니 똘, 깍, 똘, 깍 내리는 소리 이승의 마지막 난간에 간신히 매달려

 

배롱이 눈 떴습니다 살아있다는 신호처럼 그 아이 살아남아 지금, 일흔입니다 그 세상 살아서 넘은 질기디질긴 명줄입니다

-김영란,「목숨」전문(《21세기시조 동인 7집》2015년)

 

한 여성의 신산한 삶을 통해서 우리 현대사를 그려낸다. 무자년 가을, 즉 1947년 제주도에서 일어난 4.3사건을 전체 7수로 엮었다. 스물둘 신혼이었던 여인은 간난 아이를 들쳐 업고 산으로 몸을 피한다. 아이는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오르내렸고, 다행히 명줄은 길어서 어느덧 일흔이 되었다. 제주 방언 ‘곤밥’이 적재적소에 놓였고, 어설프게 역사를 끌고 와 생경한 관념어를 늘어놓지 않아 좋다.

그러나 아쉬움이 없지 않다. 어머니와 아이의 환난신고를 굳이 이렇게 늘여놓을 이유가 있었을까. 축약이 꼭 미덕은 아니다. 7수 서사를 고집한다면 본질을 빠뜨려선 안 된다. 4.3은 끝난 것이 아니라 청년과 중·장년기에도 분명 영향을 미쳤으리라. 그런 구체적 상상력이 빠진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또한 그것이 시인 본인에게 어떤 빛깔로 다가와 현재 나의 변화에 기여했는가도 중요하다. 그런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김영란 시인의 이런 시도에 박수를 보낸다. 정진을 빈다.

 

 

철가방 오토바이 날카로운 경적소리

다다닥! 분절음으로 허공 속 박음질하며

뒤돌아 힐금 바라 본

비장한 그의 눈빛

 

자장면 흰 면발이 퉁퉁 불어터질라

군만두 바삭거림이 눅눅해지기 전에

도착을 알려야 한다

자장면 왔습니다!

 

신호대기 멈추는 듯 사거리 관통할 때

끼익! 금속성 비명 번쩍 튀는 그 순간

다급한 핸드폰 울림

빨리요! 빨리 빨리

-노영임,「미필적 고의」전문(《21세기시조 동인 7집》2015년)

 

노영임에게서 저력을 본다. 활달한 보법에다 유머가 있고 무엇보다도 스토리를 엮어내는 힘이 있다. 이런 시인은 자수에 얽매여 음보에 갇히는 우를 범하지 않는다. 좋은 시조는 마지막까지 무리 없이 읽힌다. 막힘없이 읽히는 것은 그만큼 외형률을 잘 지켰기 때문이고, 눈길 주는 구절이 있다는 것은 표현의 묘를 제대로 얻었기 때문이다.

의성어와 의태어 구사도 맛깔 난다. 중국집 배달원에게 시간은 ‘다다닥! 분절음’으로 잘려간다. 이런 감각적 표현이 시를 더욱 생동감 있게 한다. 자장면, 전화소리, 다급한 부름 등 설정이 낯익은 것이 흠이긴 하지만 신명을 아는 말부림은 이 시인의 장점이다. 애써 구를 엮지 않고 자유롭게 결 따라 흐르게 한 것도 상당한 내공이다.

 

통제영 세병관에서 시조창보(時調唱譜)를 펼쳐본다. 예의는 차례를 말하고 음악은 화합을 일컫는다 했다. 시조창을 배워야지 하면서도 배우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 창 한 음도 얻지 못하고서 시조를 쓰는 일이 난망하고 월평을 쓰는 일은 더 고통스럽다.

민족 시인의 맨 윗자리를 차지하는 황진이를 생각한다. 달빛 교교한 만월대 지나던 벽계수에게 아름다운 음풍을 들려주던 황진이, 그날의 노래는 어떠하였을까. 『시조음악론』의 저자 장사훈(張師勛) 교수의 말을 빌리면 문헌적 자료가 없기 때문에 그 노래가 현재의 시조창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고 한다.

 

그렇다하더라도 시조인이라면 시조창을 비롯한 옛 시가에 눈과 귀를 기울일 필요는 있다. 오랜 동안 시조는 우리 민족의 생리와 삶에 깊은 뿌리를 두고 있었고 그 내용 또한 다양한 모습을 띠며 전해왔다. 우리는 여태껏 3장6구 45자의 자수를 맞추면서 “이것이 시조다”라고 막연히 생각해왔다. 시조창이 아닌 현대시조라 했으니 그 말이 틀릴 리는 없겠으나 뿌리는 역시 음률을 바탕으로 한 시조창에서 비롯되었음을 부인하진 못한다. 국문학자들 역시 여기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문자로써의 시가는 겨우 100년에 불과하다. 국문학의 원류를 따라가면 반드시 가사(歌辭)와 시조창의 벽에 부딪힐 것이기 때문이다. 시조창을 배우다 보면 한층 깊은 시조의 경지를 만나게 될 것이다. 오늘은 그런 반성으로 이 글을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