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균의 평론

2015 유심 시조월평(9월호) - 이달균

이달균 2015. 9. 3. 19:08

 

 

 

 

 

 

사랑한다면 그 바다에 빠져죽어라.

 

 

1. 한일韓日, 시인들이 만난다면.

 

「2015통영한산대첩축제」가 8월 12일부터 16일까지 5일간에 걸쳐 통영전역에서 열린다. 어떤 이는 “놀기 좋고 먹기 좋은 봄가을 다 제쳐두고 왜 하필이면 이 무더운 삼복에 축제냐?”고 투덜댄다. 맞다. 축제란 즐기기 위한 것인데, 굳이 이런 무더위에 벌일 필요는 없다. 그런데 통영시민인들 그걸 모를 것인가. 이유인즉, 1592년(임진년) 한산대첩은 음력 7월 8일, 무더위 속에서 거둔 대승첩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23전 23승을 거둔 통제사 이순신제독의 빛나는 승첩과 구국 혼을 먼저 떠올리지만 그 승리 뒤편엔 손발이 부르트도록 노를 젓던 격군과 갑옷으로 무장한 채 화살이며 승자총통, 비격진천뢰 같은 화포를 쏘던 병사들, 의병과 승병들, 식량과 화약을 져 나르던 백성들의 무한한 노고가 숨어 있다. 그날 무더위를 견디며 왜군들과 싸웠던 조상들을 생각하는 축제가 바로 통영한산대첩축제인 것이다.

요즘 위안부할머니, 강제노동인력 동원 등 아베정권의 역사왜곡과 역사부정으로 인하여 어느 때보다 한일관계가 어렵다. 이는 정치적인 문제이지만 문인으로서는 이런 문제와 연관하여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머리를 맞대면 할 수 있는 일도 많다. 이를테면 이런 주제를 놓고 일본 하이쿠 시인들과 한국 시조인이 모여 함께 시를 지어본다면 과거를 통해 지속가능한 한일 두 나라의 미래를 정립해 나갈 수도 있다. 한일 두 나라를 대표하는 장르의 시인들이 시로써 함께 고민하고 화합하는 모습이 아름답지 않은가. 한국시조인협회가 나서서 이런 행사를 연다면 언론의 주목도 받고, 시조의 대중화에 기여하는 일석이조의 결과를 얻게 될 것이다.

 

2. 담백 혹은 탐닉

 

 

앵두나무 묘목이 첫 꽃을 피웠다

사방으로 번지는 명랑한 웃음소리

그때다, 멀리 또 드물게

새소리가 들렸다

 

맑은 분홍이었다, 첫 마음은 그렇다

성근 햇살 아래 속눈썹이 떨리는

분홍이 다녀간 적 있다

오래전 일이다

-정혜숙,「오래전 일이다」전문(《시조시학》2015년 여름호)

 

 

마약쟁이 래병이가 마약하다 죽었다

오랜 친구 원술이는 지금, 복역 중이다

 

꽃피는 봄 날 그 때를

아주 좋아했었던....

 

얼큰하게 생긴 그는, 오늘도 혼자였다

잡부에게 홀로란 건 공치고도 불콰한 날

 

그런 날 내리는 비를

우린, 단비라 했다

 

포장마차 포장위로 몇 순배 넝쿨이 돌았다

연탄불에 떨어지는 꽃잎과 둥근 이파리

 

그 봄이

타는 냄새가

눈물처럼 지독했다

-서정택,「라일락」전문(《시선》2015년 여름호)

 

 

정혜숙의 시조는 간결하고 담백하다. 여운도 있다. 여러 권의 잡지를 들춰보아도 쉽게 눈길이 가는 시조를 찾긴 쉽지 않다. 취향 탓이기도 하겠다. 하지만 설명에 설명을 덧붙이며 괜히 폼 잡는 시는 지겹기만 하다. 정혜숙의 위 시는 그런 거추장스러운 수식을 잘라내고 맨얼굴로 다가온다. 징검돌 몇을 밟다보면 어느새 개울을 건너 있다. 징검돌을 놓듯 시조의 마디를 짓고, 그 마디를 읽다보면 금방 두 수를 다 읽게 된다.

자신이 먼저 웃으면 실패한 개그다. 사무엘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에서는 고도가 오지 않는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특별한 것도 없는 말을 주고받으며 무대를 서성인다. 시시껄렁한 대화들로 시간을 때우는 부조리극은 허무하다. 바로 그 허무함이 이 연극의 묘미다.

첫 꽃과 첫 마음은 어떤 빛일까. 꽃마다 색이 다르지만 그 첫 개화의 이미지는 ‘맑은 분홍’이 아닐까. 그 분홍은 오직 첫 마음일 때만 존재한다. 그래서 ‘햇살 아래 속눈썹이 떨리는’ 찰나이고, ‘다녀간’ 기억이며 ‘오래전 일’일뿐 다시 오지도 않는다. 백지 위에 떨어진 그 분홍의 한 점은 잊혀지지 않는다. 시인은 짐짓 오래전 일이라며 별 관심 없는 듯 딴 곳을 바라본다. 독자들은 “이곳을 보라. 그 분홍을 생각하라.”며 강요하지 않는 그 무심함에 더 끌린다.

정혜숙의 시가 무심한 듯 툭! 던지는 방식이라면, 서정택의 시는 페이소스를 느끼게 한다. 나른한 봄날의 마약, 비오는 날의 술 한 잔, 연탄 석쇠 위에 올려 진 봄이 그것이다. ‘래병이’는 ‘마약하다 죽었’고, ‘원술이’는 감방에 가 있다. 그들인들 봄이 싫을 리 있겠는가. 봄에 탐닉하는 것과 마약에 취하는 것은 동일하다.

팔자가 비슷한 세 사내의 정경이 눈에 선하다. 그들은 우리 주변에 늘 있다. 내가 사는 통영 무전동 어느 골목에서 만난 사내처럼 낯익다. 안개가 내려온다고 무전동이라 했던가. 안개처럼 뿌연 일상을 사는 이에게 이런 시는 고통이다. 일용직 노무자에게 비오는 날은 공치는 날이지만 거꾸로 해물파전에 술 한 잔이 생각나는 날이다. 그래서 그 비는 단비가 된다. 포장마차 연탄화덕에 마주앉아 얘기는 꼬리에 꼬리를 문다. 계속되는 술잔과 헝클린 사연을 ‘몇 순배 넝쿨’로 표현한 것이 재미있다. 허나 그들의 사연이 이디 봄꽃처럼 황홀하기만 했으랴. 화덕 위로 신세타령이 난무하고 침도 튀기다보면 연기에 우는 건지 눈물에 우는 건지 허랑한 사내들의 시간은 간다.

공교롭게도 라일락의 꽃말은 ‘젊은날의 추억, 첫사랑의 감동’이란다. 그들에게 첫사랑은 감미로운 추억이라기보다 꺼내 보고 싶지 않은 미안한 그 무엇이다. 그녀들은 잘 있는지. 어김없이 라일락은 피고, 떠난 이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첫 사랑의 감동은 식어버린 찌개일 뿐, 연탄 위로 라일락 이파리 떨어져 지독한 봄날을 앓는다. 많은 시인들이 이들의 삶을 노래한다. 그런데 늘 피상적인 스케치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김신용의 시처럼 처절함의 극을 보여주진 못해도 손에 만져지는 무언가가 좀 있었으면 싶었다. 이 시가 그런 마음을 채워준다. 

  

3. 고사리장마도 한 철이다.

 

 

그래봤자 장끼도 한 철

고사리장마도 한 철

길 없는 쳇망오름 날아든 박쥐나무

메조록

철없이 내민

꽃술머리

너도 한 철

-오승철,「그래봤자」전문(《유심》2015년 8월호)

 

 

기억할까 수줍은 술잔을 건네면서

서로에게 넘치거나 꽝꽝 언 마음이나

한 때는 눈 안에 들고 싶어 키를 세워 발돋움했던,

 

믿을 것이 못되는 서너 가지 기억에

취기의 살가움은 오랫동안 생생하고

쌀밥을 꼭꼭 씹으면 좋은 안주가 된다는 것도,

 

출처가 불분명한 인연에 매달려서

있는 듯 없는 듯 보호색을 띠며 앉았다가

슬며시 눈치 채지 못하게 집으로 돌아왔다.

 

-옥영숙,「뒤풀이」전문(《경남문학》2015년 여름호)

 

 

오승철 시는 맛깔 나는 언어감각이 일품이다. 4.3사건을 다룬 시편들에서도 이런 제주말의 감칠맛이 없었다면 감동은 크지 않았을 것이다. 제주 시인들은 누구라 할 것 없이 제주 언어를 많이 쓴다. 당연하다. 그러나 자칫 우리 옛말이나 방언, 지역 말을 적재적소에 잘 싣지 못하면 억지스러워 보일 때가 있다. 비유는 신선해야 하고, 또 자연스러울 때 빛난다. 그렇게 해맑게 씻겨 다가오면 시는 살아난다. 오승철은 그런 장점을 잘 드러내 보이고 있다. 첫 마디 3·4를 이루는 부분에서 두 음절의 ‘장끼’를 불러내었는데, 다음 마디의 첫 3을 이루는 말로 ‘고사리장마’를 가져왔다. 그리고 종장 첫 마디를 이루는 3으로 ‘메조록’이란 말을 배치한다. 그리고 초장에서 반복한 ‘한 철’을 종장에서 수미상관으로 끝맺으면서 딱 떨어지는 단수를 이뤘다. 절묘한 가락이다. 새로울 것도 없는 얘기지만 이처럼 언어를 맛깔나게 다루면 좋은 시가 된다.

고사리장마는 3~4월 제주를 적시는 장마다. 이 좋은 봄날 햇빛 대신 웬 비냐고 투정하지만 이 또한 어느새 바람에 건 듯 지나가고 만다. 뿐이겠는가. ‘쳇망오름 날아든 박쥐나무’ 꽃잎도 ‘메조록’이 머릴 내밀었지만 너도 이 한 철을 살다 갈 뿐이다. 그렇다. ‘장끼도 한 철’ 이며 ‘고사리도장마도 한 철’이다. 제 아무리 얼굴에 분장하듯 분칠을 해도 미인도 한 철, 권력도 한 철이다. “이 자리를 더 지켜야겠다고, 날 잊으면 너를 죽이겠다.”고 총을 겨눠도 세월 앞에 장사는 없다.

 

옥영숙은 오승철의 보법과는 많이 다르다. 삶이 너무 팍팍해서인지, 요즘의 심경이 그래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대님 동여매지 않고 느슨히 풀어 놓은 시조에 매력을 느낄 때가 있다. 메타포도 버리고 산문처럼 누군가에게 귀엣말 하듯 실실이 풀어놓아도 3장6구라는 형식만 맞으면 절로 시가 되는 것이 시조의 미덕이다. 단단하여 더도 덜도 비우고 넣을 곳이 없는 시조야 말할 것도 없고, 이렇게 느슨히 풀어서 옆 동네 마실 가듯 노래하는 시조가 반가울 때도 있다.

우리네 보통 사람들 사는 모습이 다 이렇다. 어쩔 것인가. 사람도 세월도 다 ‘믿을 것이 못되는’ 것을. ‘한때는 눈 안에 들고 싶어 키를 세’웠고, ‘수줍은 술잔’에 넘치는 잔으로 ‘언 마음’ 푸시라고 두 손 받쳐 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예전 내가 알던 그이가 아니다. 이미 나는 속 다르고 겉 다른 그의 속사정마저 X선을 보듯 다 알고 있다. 그래서 그 왁자지껄함 속에서 쌀알처럼 밥을 씹는다. 차라리 안주처럼 밥을 씹는 이 순간이 편하다. 그래야 얼마동안이라도 침묵할 수 있으므로. 마음 같아서는 보호색을 벗고 “맞짱 한 번 뜨자”며 술잔을 던지고 싶지만 모두의 평화를 위해 ‘슬며시 눈치 채지 못 하게 집으로’ 간다.

이 시가 어찌 옥영숙만의 얘기이겠는가. 더러워 피하지 무서워 피하는 건 아니다. 우리들 생은 어차피 순결하지 않다. 겨 묻은 내가 똥 묻은 누굴 탓하기엔 우리도 이미 동류가 되어 있다. 뒤풀이란 그런 것이다. 평소에 쌓인 것을 풀고 더 나은 내일을 위해 건배를 하는 시간이어야 하는데, 그런 자리일수록 매인 매듭이 더욱 꼬여지는 현상을 본다. 인연이란 것도 그렇다. ‘출처가 불분명한 인연’이라면 훌훌 털고 일어서는 것도 한 방편이다. 사랑할 수도 없고 고함을 칠 처지가 못 될 때에는 핫바지 방귀 새듯 슬그머니 집으로 가면 그만이다.

우리 시대의 자화상은 서글프다. 김수돈은 대표시「우수의 황제」에서 “英雄이 너무 많다//絶海 가운데 외로운 섬에 살아/歷程을 되씹는 皇帝가 되랴.”고 노래했다. 1917년생인 김수돈의 생애, 그 풍운의 현대사엔 영웅이 많았다. 그런데도 시인의 눈엔 영웅은 눈을 씻고 보아도 없었나 보다. ‘英雄이 너무 많다’는 것은 영웅 없음의 반어적 의미다. 그러므로 이 삶이 절해고도처럼 외로운 것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歷程을 되씹는 皇帝가’되는 것이 낫다.

누가 있어 외롭지 않을 것인가. 피할 수 없으면 외로움을 사랑하면 된다. ‘보호색을 띠며 앉’는 것도 한 방편이다.

 

4. 천천히 가면 시가 보인다.

 

면장님은 오늘도 긴 면발을 뽑는다

 

이태리 면민들의 무병장수 기원하며

 

천 년 전 실크로드의 시간들을 돌돌 만다

 

 

면사무소 책상 위에 민원들이 쌓을 때마다

 

몇 가닥 희망도 불려 반죽을 치대던 소리

 

면장님 파스타에 감겨 배가 부른 골목들

-이송희,「이태리 면사무소」전문(《유심》2015년 8월호)

 

광주 어느 골목쯤인가 ‘이태리 면사무소’라는 이름의 파스타집이 있나보다. 면사무소라는 상호는 주인의 감각이 돋보인다. 면麵을 뽑아 파스타를 만드는 집으로 여길 수도 있고, 면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입방아를 찧는 공공의 장소, 즉 면사무소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그 가게 주인은 면장님이다. 면장이 하는 일은 면민들의 삶이 안녕한지, 세끼 밥은 먹고 사는지를 살피는 일이다. 그래서 그는 ‘오늘도 긴 면발을 뽑는다’. 다 뽑지 못한 면은 밀가루와 함께 쌓인다. 그것은 미처 처리하지 못한 민원이다.

면장님은 일용할 양식을 만들지만 시인은 이 모양 통해 ‘천 년 전 실크로드의 시간’을 떠올리게 한다. 파스타는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음식이다. 우리나라에 국수가 있듯 중국과 일본도 면 음식은 많다. 그렇게 보면 면은 동서를 막론하고 즐겨먹는 음식이다. 이태리 파스타에 대한 설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고대 로마시대부터 파스타를 만들어 먹었다는 설과 중국에서 전해졌다는 설이 있다. 어느 것이 진실이든 실크로드를 따라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동양의 것이 서양으로, 서양의 것이 동방으로 자연스레 전해졌을 것이다.

이송희의 이 작품은 현대시조의 규범처럼 읽힌다. 오늘 쓴다고, 소재를 현대에 맞췄다고 다 현대시조가 아니다.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구체적인 언어로 그려내고, 현대인의 사고, 현대인의 모습을 명징하게 이미지화 했을 때 현대시조일 수가 있다. 이 시는 그 흔한 파스타 하나로 천 년 전으로 가기도 하고, 실크로드 따라 이태리로 데려 가기도 한다. 소설 한 편으로 얘기할 내용을 2수로 시공을 초월케 하는 재미를 준다. 그런데도 음보가 안정되어 있고, 각 장의 완성도도 높다.

최근 등단하는 신인들의 경우, 새로움에 사로잡혀 구와 장이 완전치 못한 시조를 발표하는 것을 볼 때가 있다. 또한 할 말이 많다보니 장황한 연시조를 쓰기도 한다. 신인이므로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지만 잘 생각해 봐야 한다. 그런 오류를 범하는 이유는 여과의 시간보다는 열정이 앞서기 때문이다. 시간을 두고 삭힌 후에 보면 군더더기도 보이고, 치열함에 가려진 허점도 발견하게 된다. 섣부른 행보보다 천천히 가는 여유를 가진다면 더 좋은 작품을 쓸 수 있을 것이다. 이 시조는 짧은 2수에 많은 얘기를 녹여 넣었지만 할 말은 다 하고 있지 않은가.

 

에어컨이 꺼진 방에서 선풍기에 의지하며 월평을 적는다. 통영 바람은 소금끼가 묻어 있어 더 끈적인다. 이순신제독께서는 전장을 지휘하고 돌아와 일기를 썼다. 임란 초창기 한산도 해영은 급조된 탓에 공방이나 뒷간인들 제대로 갖추었을까. 왜군은 물론 끊임없이 견제하는 임금과 조정, 삼복더위와 싸우면서 계책을 세우고 부하를 지휘했다. 글이 쓰이지 않을 때엔 난중일기를 읽는다. 진정 큰 어른은 시대를 원망하지도 다른 이를 탓하지도 않는다. 얼마나 외로웠을까? 그래서 자주 고뿔에 걸리고 위병도 도졌으리라. 당신을 겨누는 이가 널려 있었지만 진정 사랑해야 할 백성과 조국이 있었기에 외롭지 않았으리라. 사랑한다면 그 사랑의 바다에 빠져죽을 용기가 있어야 한다. 그래, 참 스승은 도처에 있다. 스승이 그리울 때는 이런 책을 펴 들면 된다. 나의 여름 피서는 바로 난중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