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시간의 매듭 위에서- 이달균
2000년, 시간의 매듭 위에서
이달균
1.
2000년이 저문다. 새로운 밀레니엄의 시작이라고 떠들던 기억도 이젠 사라졌다. 한 세기의 출발점을 떠난 사람들의 모습도 이전의 그들과 다르지 않다. 우리가 편의상 규정한 시간의 매듭이 달라졌을 뿐,삶의 모습과 본연의 것들은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올해의 문단 역시 이렇다 할 변화는 없었다. 한국 최초의 노벨상이 평화상으로 나왔고, 아직 문학상의 기별은 없다.
그런 와중에도 2000년 한국 문단은 서서히 변해 가고 있다.
그 첫 번째로는 사이버 공간 속으로의 문학의 이동을 들 수 있다. 발 빠른 문인들은 몇 해 전부터 이런 일에 익숙해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도 많다. 이 와중에서 올해 특히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그 동안 종이책 속에서만 존재했던 문학이 사이버 공간 속으로 발을 넓혀 온갖 논쟁을 확대 재생산시켰다. 전자문학 도서관, 사이버 문예지, 사이버 작가회 같은 움직임은 근년에 들어 특히 활발해진 변화 중의 하나다.
이런 흐름에 발맞추어 온갖 논쟁들이 쏟아졌는데 특기할 만한 것은 문단 권력 논쟁이 쏟아진 한 해였다. 이것이 두 번째 변화다. 그동안 이런 문제제기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나 올해처럼 이렇게 문단의 이슈가 된 적은 없다. 힘 있는 문예지와 권력자들에게 감정적으로 도전하다 상처를 입는 문인이 혹 있었지만, 이렇게 논쟁을 유발한 적은 별반 없었다. 한국 문단의 권력은 정말 존재하는가. 만약 이를 부정한다면 그는 문단의 중심부에서 기득권을 행사하거나,상당한 추종 독자를 가진 행복한 문인일 것이다. 전자는 원하든 원치 않든 비판적 시각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며, 후자는 문인이라면 누구나 열망하는 뿌듯한 성취일 것이다. 혹자는 문단 권력 논쟁은 지극히 소모적이므로 관심을 끄기를 바라는 이들도 많다. 독자들은 이런 문단의 이런 행태에 관심이 없기에 결국 감동을 주는 작품을 쓰느냐 못쓰느냐의 문제로 귀결된다.
하지만 문인은 귀거래사를 말하면서도 잊히지 않으리란 욕망으로 가득 차 있다. 그 욕망은 곧바로 작품 생산과, 문학적 행위의 에너지원이 된다. 그 행위가 어떤 이에겐 권력 지향과 헤게모니의 노림수로 비치기도 하고, 또 다른 이는 문인으로서의 본성, 즉 문인 기질의 표출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폭력적 언사가 난무하기도 하고 그 말에 대한 새로운 맹공이 가해지기도 한다.
세 번째는 이런 권력구조와는 별개로 지역 문학의 특질을 대외적으로 공유하고 질적 향상을 꾀하려는 지역 문학지의 창간과 교류를 들 수 있겠다. 몇 해 전부터 앞장서 정착시킨 몇몇 문예지가 있었고, 이들 문예지의 성공은 타 지역에도 파급 효과를 가져와 이젠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문예지의 전국화 경향이 괄목할 만한 성과를 보이고 있다. 이들 문예지들은 지역 간 교류를 통해 상호 발전을 꾀하려 한다. 이들은 또 하나의 권력을 만들지 않아야 하며. 변방을 탈피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지 않아야 하는 과제도 동시에 안고 있다.
네 번째는 문학이 기록으로서의 감동 차원을 벗어나 삶과 역사, 대중과 직접적 교류를 통해 공감의 폭을 넓히려는 움직임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 기존의 시비건립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기념관건립과 생가보존 등 문학과 지역, 역사가 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긴밀한 연관성 위에서 얻어진 구체적인 결과물이란 인식을 심어주려 한다. 이런 시도는 일정부분 성공을 거두고 있다.
이들 문인들의 기념관은 대개 그들의 고향이나 작품의 현장에 세워지게 되는데 이는 곧 문학의 중심 이동 현상을 낳게 한다. 그 동안 문학의 중앙 집중화 현상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지만. 생가 보존과 기념관 건립 등은 결국 자연스럽게 문학의 지역화를 정착시키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동시에 지역민들에겐 새로운 긍지와 문화적 자부심을 갖게 하여 그들 스스로가 문화 주체자가 되는 중요한 변모를 겪게 한다. 이런 식의 변화는 앞으로도 꾸준히 이어질 전망이다.
이상 언급해 본 몇 가지 현상들은 문학 환경의 구조적 변화와 직결된다. 컴퓨터는 발표 매체의 다변화-기존의 문학잡지와 매스미디어를 통하지 않고서도 직접 독자와 만나는 지면의 해체-를 가져왔고,그와 함께 문단의 권력화 문제도 앞으로는 크게 완화될 것으로 보인다. 이는 곧 탈 중심주의를 부채질하여 작가가 중심이고. 작품의 고향이 중심이 되는 바람직한 모습으로 정착될 것이다. 이런 지역 정서를 지역 문예지가 통합해내고 다시 대외적인 것들과의 가교 역할을 하여 문학의 균형적 발전을 가져오게 될 것이다.
2.
먼데서 은은한 포성이 그치자
전선은 일시 소강상태다.
병정들 숨죽이고 일제히 적진을 노려본다.
일순
정적을 가르며 하늘에서 번쩍 터지는 불빛.
번개를 신호로
일제히 총구가 터진다.
후두둑
발등에 총탄이 떨어진다.
이윽고
격렬한 전투 끝에 적진을 점령한 뒤
보무 당당 전선을 이동하는
푸른 제복들의 저 일사불란한
구둣발 소리.
- 오세영,「소낙비」전문(《작가》2000년 가을호)
설명이 필요 없는 명쾌한 시다. 이렇게 보니 소낙비와 전쟁은 너무 흡사하다. 멀리서 몰려오는 먹장구름과 먼 비울음은 은은한 포성으로, 비 오기 전의 정적은 숨죽이는 병정으로, 급기야 쏟아지는 굵은 빗방울은 총탄으로, 금세 사라져 버리는 소낙비의 군무는 푸른 제복과 일사불란한 구둣발 소리로 비유한다. 소낙비가 묻어오는 광경은 침략군이 세상을 점령하는 모습과 같다. 이 사실적인 비유로 소낙비는 또 다른 상상력 하나를 얻게 되었다. 시이기에 가능한 얘기다.
못
슬프면 차라리 웃지 그랬어
그래도 아프면 눈 감지 그랬어
돌아서 말 못할 가슴이라면 소리치지 그랬어
망치 혹은 공옥진
응어리진 슬픔은 때려야만 부서지나니
늘 배고픈 모서리 용서 없이 내리쳐다오
말 못할, 고꾸라져버릴, 환장할, 저 절복할
작은 사랑
내 사랑 이런 房이라면 참 좋겠다
한지에 스미는 은은한 햇살받아
밀화빛 곱게 익는 겨울 유자향 그윽한
(중략)
•
내력
아무래도 난 삼각형의 피를 가지고 있어
외려 후비는 붉은 상처 혹 빗면의 나태로움
직각의 외로움 조금, 모서리의 불온함 조금
하동포구에 와서
내 상처가 내게로 와 독약 같은 사랑 된다기로
풀꽃 같은 사람아 용서할 무엇 남겠느냐
우리는 두 갈래 강물, 한 바다에 가 죽으리
-이지엽.「交感」부분(《시안》2000년 가을호)
이 시조들은 따로따로 떨어져 완전한 한 수의 작품이 되기도 하고 또 전혀 다른 여덟 수가 모여져 한 작품으로 살아나는 재미가 있다 그것을 시인은 ‘交感’이라 말한다.
인용된 첫 수는 못 박힌 자의 고통을 통해 슬픔을 드러내고 있다면, 둘째 수〈망치 혹은 공옥진〉은 못도 외면하는 모서리, 즉 철저히 소외된 자들을 향한 절복한 아픔을 노래하고 있다. 그러나 시인은 공옥진을 데려와 슬픔과 한을 뛰어 넘는 춤판을 벌여 고통 받는 자의 눈으로 더 고통에 찬 춤을 보게 하여 한을 승화시켜내려는 노력을 보여준다.
첫 수의 못과 둘째 수의 망치는 늘 때리는 자와 소외된 모서리에 선 자를 대비시키며 한바탕 춤으로 얘기를 이어간다. 그래서 셋째 수에서 격렬함 뒤에 오는 작은 사랑.〈한지에 스미는 은은한 햇살〉같은 사랑을 염원한다. 하지만 이 염원은 끝내 시인의 것이 되지 못한다. 그것은 인용한 마지막 두 수에서 보여 진다. 이 두 수는 시인과 연관된 타자의 이야기에서 이제 자신의 모습으로 옮아와 중도자로서의 외로움을 말하고 있다.
90도의 완전 한 직각의 모서리도 아니고 모두를 포용할 평면도 아닌, 비스듬한 빗면을 가진 불안한 균형의 심상을 지닌 시인의 상처. 그래서 사랑을 이루는 방식도 완전하지 않다. 하동포구의 강물과 내가 합일을 이루지 못하고, 평행을 달리다 결국 한 바다에나 가서 이루리라는 아픈 다짐은 상처로 남는다. 이 8수의 시들은 따로 또 같이 흐르다 만나는 능선처럼 여유롭다. 시조의 묘미다.
금방 수면 위로 뛰어오른 물고기가 물고 간
달빛, 그러나 달빛은 물고기의 몸속에서 소화되지 않고
배설물과 함께 강 밑바닥에 쌓일 것이니
그렇게 쌓인 달빛들 수북할 것이니
비오는 밤이거나 달뜨지 않는 밤이 와도
강은 제 속에 쌓인 달빛들로 환해지리
그 환함으로 물고기들 더듬지 않고도 길을 가리니
내 한 중 강물을 마신다 내 몸 속도 환해져서
캄캄함의 세월이 와도 더듬지 않을지니
신발을 벗어놓고 정중히 강을 경배함이
어찌 사람의 할 일이 아니라 하겠는가
— 김충규,「강을 경배함」(《시와 생명》2000년 가을호)
김충규의 시는 진중하다. 강과 달빛. 빛과 사람의 관계를 통해 생명의 경이를 말해준다. 이 시는 요즘 진지한 사유를 거치지 않고 배설해낸 일군의 시들에 대해 성찰을 통한 시의 모범을 몸소 보여준다. 실험적 혹은 현대적이란 말로 쉽게 넘어가는 지나친 모호성의 시들에 대해 피곤을 느끼는 독자들도 많다.
김충규의 시는 어렵지 않게 읽히면서도 얘기를 풀어가는 호흡이 안정적이다. 또한 자연을 바라보는 시인의 마음이 깨끗하고 겸손하다. 달빛과 강물의 영원성은 과장도 미화도 아니다. 원래 그렇게 존재했던 그 신성을 우리가 느끼지 못했을 뿐이다. 시인의 다음 작품을 기대해본다
밤이 깊어집니다
지네가 활동을 시작할 시간입니다
며칠 전 어머니는 이마를 지네에 물려
얼굴이 퉁퉁 부었다고 합니다
홀로 방 속에 갇힌 채 굳어버린 육신
늙는다는 것이 서럽다고
두렵지 않은 건 죽음이라고,
아픈 다리 통증에 진통제를 먹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버린 꿈꾸는 것이 무섭습니다
친정에 가기도 전에 몸이 떨리는 것은
세월에 외식당한 지네들 부패된 내 오욕덩어리에
우르르 몰려들어 나의 사지를 갈기갈기
뜯어먹지나 않을까,
(하략)
— 조해숙.「어머니의 방」부분(《시현실》2000년 9〜10월호)
조해숙 시인은 담담히 문장을 밀고 간다. 지네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어머니를 무는 것이 아니라 긴장을 잃은 몸뚱어리를 공격하는 대상으로 화한다. ‘부패된 내 오욕덩어리’를 향한 공격은 곧 ‘황폐화된 정신’의 다른 말이다. 그렇다면 지네는 징그럽고 혐오스러운 녀석이 아니라 시인의 나태 혹은 무력감을 향해 적의를 보이는 긍정의 침 같은 것이다. 시인의 불안한 의식과 지네의 등식이 알맞게 녹아 난다. 시어 운용과 배행의 간결함을 더 추구했다면 더욱 단단한 작품이 되었을 것이다.
한적한 늦여름 오후.
종착역에서 한줄기 기적이 사라져간다.
어떻다 분간할 수 없는 목소리로
한참을 메아리치더니
무겁게 발길을 멈춘다.
함께 도착한 몇 사람은
옥수수밭 이랑을 따라 말없이 흩어져 간다.
철도중단점 앞에서 우두커니 서 있다가
나는 이정표를 잃어버렸다.
(중략)
건너편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집들을 바라보며
강물은 아무 말 없이 휘감아간다.
나는 오늘도 지워진 이정표를
적어 넣지 못하고 돌아선다.
- 김홍석.「신탄리 역에서」부분(《시현실》2000년 9·10월호)
시인은 소멸하는 것들을 불러내어 적막에 감싸인 시골 역사를 보여준다. 역은 풍경화처럼 객관화되어 서 있다. 이 시는 소멸하는 대상을 보여주면서 존재자로서의 ‘나’ 마저 사라지는 느낌에 사로잡힌다. 내 하루의 날들은 ‘지워진 이정표’가 되고 만다. 문득 어느 한적한 곳, 빛나지 않는 것들 속에 나도 하나의 풍경이 되어 서 있음을 볼 때가 있다.
한 사내가 앞서가는 그림자를 발에 묶으며
호프집 앞을 무심하게 지나가고 있다
한 사내가 두 여자와 함께 서로 등을 밀며
호프집 안으로 들어가 삭제되고
한 사내가 호프집 앞에 그림자와 함께
주춤주춤 멈추어 서 있다
건너편 궁전다방의 입구에는
퀵써비스 오토바이 한 대가 막 도착하고
두 사내가 서로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호프집 앞을 지나가고 있다
세 사내가 묵묵히 남의 그림자를 밟으며
호프집 앞을 지나가고 있다
길 건너편의 플라타너스 잎 하나가
서 있는 한 사내의 발 앞까지 가 좌우로 굴렀다
한 아이가 우와하하하 하며
앞만 보고 뛰어갔다
- 오규원,「거리와 사내」(《창작과 비평》2000년 가을호)
상상은 자유이므로 호프집 앞은 연극 무대로 설정해도 좋겠다. 기다리는 사람도 없고, 특별한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다. 호프집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무대에서 사라진다. 그러므로 시인은 ‘삭제’된다고 표현한다. ‘삭제’라는 표현을 얻으면서 앞의 상황도 연극적으로 변모되는 현상을 본다. 그들이 한 묶음으로 무대에서 사라지자 또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간다. ‘퀵써비스 오토바이’, 지나가는 두 사내, 길 건너편의 플라타너스 잎새까지 아무런 사건도 반전도 없다. 그리고 ‘한 아이가 우와하하하 하며/앞만 보고 뛰어’가면서 무대는 다소 극적으로 전개된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다. 뭔지 모를 의문과 여운을 남기고 연극은 끝난다. 그 의문과 여운이 시가 되는 이유다. 호프집은 나타나고 사라지는 중심공간이다. 연출자는 시인이다. 컴퓨터 마우스로 모니터 속의 누군가를 지워버리면 삭제된다. 그리고 마지막 아이의 웃음과 질주는 무엇을 의미할까? 베케트의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에서도 고도는 나타나지 않았고, 극적 반전도 없이 연극은 끝나고 만다. 시인이 모니터 속에서 지워버린 사내와 앞만 보고 뛰어가는 사내와의 상관관계를 딱히 무엇이라 규정할 수는 없다. 규정하지 않는 것이 묘미다. 행복을 강요하고, 눈물을 강요하는 시대를 우린 살고 있다. 그게 진실일까? 우리들 삶은 예사로운 일상의 연속일 뿐이다. 삭제된 그들처럼 결국엔 모두 삭제된다. 누군가에 의해.
2000년 한 해를 보내면서 몇 가지의 변화를 기술해 보았다. 그것은 ‘겨울호’라는 잡지의 성격, 즉 ‘마감과 반성’이란 역할도 함께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시현실》겨울호의 계절평을 쓰는 이 순간에도 후학들에게 가장 영향 을 많이 준 저명한 비평가의 표절 논쟁으로 뜨거운 설전이 전개되고 있다. 이런 현상은 이제 의외성의 사건이 아니라 문학 환경의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될 것이다.
-『시현실』2000. 겨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