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균의 문학 여행

통영 - 상처입은 龍들의 도시 3.

이달균 2011. 10. 10. 22:08

忠武市 東湖洞

눈이 내린다

옛날에 옛날에 하고 아내는 마냥

입술이 젖는다.

키 작은 아내의 넋은

키 작은 사철나무 어깨 위에 내린다

밤에도 운다

閑麗水道 南望山

소리 내어 아침마다 아내는 가고

忠武市 東湖洞

눈이 내린다

- 김춘수의 <李仲燮> 전문

통영에 오면 누구나 제일 먼저 남망산에 오른다. 산이라기보다 남향의 작은 공원이다. 남망산 오르막길 옆으로 동백이 벽을 둘러 서 있고 이따금씩 동백 울타리 너머 항남동 반짝이는 물살이 보이곤 했다. 그리고 늦은 겨울 햇살이 연인들의 걸음을 더 천천히 걷게하던 낮고 호젓한 공원이었다.

 

지금 남망산은 약간 아찔하다. 시민문화회관이 공원의 어깨 위에 거대한 위용을 뽐내며 시내를 굽어보고 앉아있기 때문이다. 오늘 공원은 제법 번잡하다. 무슨 행사를 하는지 검정색 승용차들이 잇달아 올라온다. 이 거대한 문화회관의 위용만큼 시민들의 문화의식도 융성해질 수 있을까.

 

유치환의 시비가 있던 곳이 이 근처 어디쯤이었는데, 잘 보이지 않는다. 동백 숲길을 따라 올라가니 시비가 하나 그 자리에 오두마니 앉아있다. 시비치곤 그리 작은 편이 아니지만 예술회관의 거대함에 눌려 공원 한켠에 밀려나 있는 모습이다. 아니, 외려 소박해 보여 좋다. ‘깃발’이란 노스탤쟈의 손수건처럼 작고 애잔한 것이 아니냐. 담배 파이프처럼 생긴 돌을 흰색 기단에 얹어「깃발」전문을 새겼다.

 

한려수도가 내려다보이는 공원의 정자 수향정에서 한가로운 학생들 몇이 사진을 찍고 있다. 대학 입시를 치르고 입학식을 기다린다고 했다. 나는 그들에게 청마와 김춘수를 물었다. 이름을 들어본 정도라고 했다. 그러나 그뿐 더 이상 물을 말이 없다. 어쩌면 김춘수의 청마를 추억하는 시 <靑馬 가시고, 충무에서>는 청마가 없는 도시와 더 이상 청마를 추억하지 않는 도시의 쓸쓸함을 짐짓 모른 척 노래한 것이 아닐까. 역사는 잊혀지는 것이다.

 

유장한 세월 속에서 포충망에 걸리는 이름과 사건들의 나열이 바로 역사다. 이 지역 예인들의 발자취도 어떤 것은 남고 또 어떤 것은 잊혀지리라. 이중섭과 박생광, 그리고 그들과 함께 어깨를 걸고 걸었던 이들의 사연은 잊혀질 것이다. 그 거리를 차들은 경적을 울리며 지나간다.

 

동호동과 항남동

한 때 문화의 꽃이 피었던 거리다. 이 거리를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을 펼치던 충무의 예인들은「통영문화협회」를 결성하게 된다. 반탁과 찬탁으로 날이 지고 새던 혼란한 시대에 통영의 예인들은 냉정을 잃지 않으려 했다. 그들은 해방과 함께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문화운동이라 판단하고 이 단체를 결성한다. 일본 사람들이 비우고 간「문화 유치원」을 본거지로 하여 본격적인 활동을 해나갔다.

 

당시 부서는 문학부, 연극부, 미술부, 음악부의 4부로 구성되었고 중요회원으로는 시인 유치환, 김상옥, 김춘수, 소설가 김용익, 작곡가 윤이상, 정윤주, 연출가 김용기, 허창언, 극작가 박재성, 배우 서상탄, 화가 전혁림, 한글학자 옥치정 등등 한국 현대사를 빛낸 많은 예인들이 활동했다. 오늘날 <통영문화협회>의 흔적은 없어졌지만, 통영시 어디쯤 <문화 유치원>이 있던 자리에 열정으로 가득찬 예인들의 눈빛이 빛나고 있었다고만 말하면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