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해원海原을 향해 귀를 틔우고 3.
불현 듯 바다가 그리웠다. 바다에 와서 바다가 그립다니. 혀끝이 짜릿해 오도록 열망할 무엇이 필요하다. 쓰디쓴 한 잔의 술을 청해 마시고 싶다. 무작정 ‘노도’에 가고 싶다. 서포 김만중의 유배지 노도, 문득 눈이 아려온다.
김만중은 인조 15년인 1637년에 출생하였지만 태어난 곳은 모른다. 1665년, 현종6년에정시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1671년 암행어사가 되었다가 1675년, 숙종1년 삭탈관직되어 강원도 금성으로 첫 유배길에 오르면서부터 그의 인생은 벼슬(예조참의, 대제학, 공조판서, 대사헌)과 유배를 거듭하게 된다. 평안도 선천으로 다시 숙종15년, 1689년 53세의 나이로 섬 속의 섬 남해 노도로 유배되었다.
노도에선 서포를 '묵고노자할배'라고 불렀다고 하니 유배 생활의 한 단면을 읽을 수 있다. 무슨 욕심이 있어 농사짓고 고기 잡을 것인가. 그저 글이나 쓰고 세월이나 낚을 뿐인 것을, 그래서 묵고 놀고 할 밖에. 이곳엔 초옥터, 우물지, 허묘 등 유허지를 표시해 놓았다. 그는 이곳에서 '사씨남정기'와 구운몽을 썼고 3년을 살다 56세의 일기로 모진 목숨을 거두고 만다.
설천면 노량리 충렬사 밑에는 자암自菴 김구金絿 의 적려유허비謫廬遺墟碑가 있다. 김구는 성종과 중종 대의 큰 시인이며 학자, 명필가로 중종14년 기묘사화 때 조광조 일파로 몰려 개령으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남해로 이배된 후 13년간 노량에서 후학들을 가르치면서〈화전별곡〉을 지었다.
〈화전별곡〉은 남해를 소재로 쓰여 진 전6장의 경기체가다.
한양에서 멀고 먼 남해로 귀향 와 보니
남해는 곧 하늘의 끝인「천지애天地涯」요.
땅의 머리격인「지지두」이나
한 점 신선이 사는 섬으로
왼편엔 망운산, 오른편엔 금산, 봉내와 고내가 어울려
산천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이런 내용으로 제1장을 시작하며 마지막인 6장까지 남해를 노래하였다.
서포 김만중, 자암 김구, 어디 그 뿐이던가. 후송 유의양, 약천 남구만, 태소 김용, 소재 이이명 선생 등등 이름을 다 거론하기에도 한계가 있다. 척박한 섬일수록 유배객의 발길이 많았는데 그 중 남해는 온 몸으로 역사를 살아낸 그들의 땅이었다. 그러나 그 서러운 발길로 인해 이제는 유배문학의 터전이 되었다. 2010년 10월 1일 군민들의 탁월한 생각으로 유배문학관이 개관되어 기대를 걸게 한다.
물살 센 노량해협이 발목을 붙잡는다.
선천서 돌아온 지 오늘로 몇 날인가
윤삼월 젖은 흙길을
수레로 천리 뱃길로 시오리
나루는 아직 닿지 않고
석양에 비친 일몰이 눈부신데
망운산 기슭아래 눈발만 차갑구나
내 이제 바다 건 너 한 앞
꽃같은 저 섬으로 가고 나면
따뜻하리라 돌아올 흙이나 뼈
땅에서 나온 모든 숨쉬는 것들 모아
화전을 만들고 밤에는
어머님을 위해 구운몽을 엮으며
꿈결에 듣던 남해 바다
삿갓처럼 엎드려 엥강에 묻혀
다시는 살아서 돌아가지 않으리
- 고두현「남해 가는 길」전문
서면 우물리에서 태어난 젊은 시인 고두현은 위 시로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한다. 정일근 시인이 다산을 생각하며〈유배지에서 보내는 정약용의 편지〉를 써서 보냈다면 후배 고두현이 김만중을 생각하며 위 시로 답신을 보낸 듯한 느낌이 든다. 조지훈과 박목월이 ‘완화삼’과 ‘나그네’로 그러했듯이. 그가 만약 남해 만경창피를 바라보며 젊은 한때를 보내지 못했더라면 이런 시를 써 문단에 이름을 걸지는 않았으리라.
상주면 양아리 나루에서 배를 기다린다. 낚시꾼들을 태우고 나간 배가 시간이 되어도 오지 않는다. 유배란 바로 이런 것, 손 뻗으면 닿을 듯한 뭍을 향해 부질없이 팔만 길어지는 것, 이런 느낌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