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균의 문학 여행

진해-군항에서 올리는 문학의 깃발1.

이달균 2011. 9. 8. 14:14

    마진고갯길을 넘어봐요.

    늘어선 벚나뭇잎이

    서러운 놀빛으로 물들었어요.

    불꽃 꺼지고,

    애잔한

    꿈의 찌꺼기

    모락모락 타고 있어요.

    덧없음.

    지난날은

    한바탕 봄꿈.

    귀가 시려요.

    아, 바람도 없는데

    천근의 무게로 떨어지는

    마른 잎.

    가슴에 금이 가요. 금이 가요.

    우리

    눈물로 빌어요.

    죽음이

    영원한 만남이 되기를

    눈물로 빌어요.

                       - 황선하의 시「마진고갯길을 넘어봐요.」전문


 황선하의 시「마진고갯길을 넘어봐요.」를 읽으며 진해 간다. 지금은 직선으로 쭉 뻗은 새 길이 났으므로 산을 휘감아 돌던 예전의 그 길이 아니다. 굽이 많은 시인의 삶이 아니어도 허위허위 고개를 오르다 보면 바람도 없는 날 떨어지는 마른 이파리 하나가 천근의 무게처럼 느껴질 때가 있으리라.

 진해에서 청춘과 장년을 보낸 황선하 시인은 이 고개를 넘는 일이 수월치만은 않았으리라. 그는 1962년『현대문학』에 박두진의 추천으로 등단한 이후 단 한권의 시집『이슬처럼』을 펴내고 이승과 작별하였다.

 

  일본의 첫 노벨문학상의 작가 가와바다 야스나리의『설국 雪國』도입부는 ‘국경의 긴 터널을 지나니 설국이었다.’는 글로 시작된다. 고등학교 때 처음 읽은 ‘설국’엔 그렇게 번역되어 있었는데, 그 후에 읽은 어떤 책에선 오역을 바로잡는다고 ‘국경’을 ‘지방의 경계에 있는’라고 번역하였는데 그도 딱히 멋진 번역은 아니란 생각이 든다. 어쨌든 처음 진해를 찾았을 때 마진고개를 휘휘 돌던 버스가 숨이 턱에 찰 즈음, 좁은 터널이 나오고 긴 어둠을 빠져나왔는가 싶을 때 멀리서 손바닥만한 바다가 사금파리처럼 빛나는 것을 보았다. 그때 왜 설국이 생각났는지는 잘 모르겠다. 진해는 설국과는 반대로 눈이 오지 않는 도시인데 말이다. 차가운 공기는 장복산이 가로막고 햇살에 더워진 진해양의 훈풍은 불어와 제일 먼저 벚꽃의 눈을 틔운다. 바쁜 일상에 지치고 허기진 사람들은 조용하고 따뜻한 진해에 와서 장복산의 벤치에라도 앉아보라. 그러면 먼 이국의 어느 도시에서 느끼는 호젓함으로 자신을 돌아볼 수도 있으리라.


    불모산佛母山 성주사聖住寺에 안민수도安民隧道로 돌아들어

   분수중원 噴水中園  팔달로八達路에

   흘립吃立 제황산帝皇山 구충탑九層塔 일년계단一年階段 올라보니

   통제부統制府도 장엄하다.

   한려수도閑麗水道 가덕등대加德燈臺에 비친

   저도猪島, 잠도蠶島 , 대소죽도大小竹島, 옥포玉浦 안골安骨 관망하니

   성웅 聖雄의 싸움터라

   시루바위 천자봉天子峯에 주천자朱天子와 정동영당井同影堂 웅동수원熊東水源      대장포大莊布로 부인당夫人堂에 돌아볼까

   회로回路에 한내건너 벚꽃터 벽해정碧海亭 대광법계 大光法界

   양어장養魚場에 충무공상忠武公像 참배하니

   풍림절경楓林絶景 진해 형승形勝이 이에던가 하노라.

         - 석암石庵 정경태 鄭坰兌가 진해를 찬양하여 지은 시「진해풍경」


 석암 정경태는 이렇게 진해의 모든 것을 찬미했다. 현재의 젊은이들은 “설마!”라고 하겠지만 군사정권 시절에는 군항입성의 성가신 통과의례를 거쳐야 했다. 터널 지나면 제일 먼저 수상한 사람 수색을 당한다. 키 큰 헌병이 뚜벅뚜벅 차에 올라와 날카로운 눈빛으로 검문을 하면 괜히 죄 없는 사람들도 가슴을 졸여야만 했다. 인상이 맘에 들지 않으면 괜한 의심으로 주민등록증을 제시해야 했고, 이마저도 의심이 풀리지 않으면 내려서 여러 검문을 당하며 다음 차를 타야 했으니 진해의 첫인상이 좋을 리 만무했다. 한때 외지 사람들은 진해 처녀들과의 혼사에 부정적인 생각을 갖곤 했는데, 이런 군항의 분위기가 그런 편견을 낳게 하기도 했다.

 장복터널은 장복산을 가로질러 창원과 진해를 잇는다. 터널에서 조금 내려오면 진해시민회관이 있다. 진해는 군항이라는 선입관 탓에 문화의 불모지인 양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나 역사가 있고, 거쳐 간 예술인들의 면면이 만만찮은 클래식다방 ‘흑백’이 진해에 있음을 안다면 진해가 문화의 불모지란 말은 못할 것이다. 진해시 대천동 2번지, 언제나 전시 포스터가 걸려있던 이 다방의 검은 문은 무슨 각인처럼 뇌리에 박혀있다. 진해에 오면 습관처럼 이곳에서 차 한 잔을 마셨다.


그 다방은 이전에도 다방이었고

지금도 다방이다.

정겨운 이름 다방,

티켓다방 말고 아직도 다방이라니,

오래 산 것이 자랑이 아니듯

다방이 오래되었다고 자랑할 일은 아니다.

오래된 것으로 치면

그 다방이 있는 건물이 더 오래되었다.

그 다방은 일본식 이층건물 일층에 있다.

그래도 자랑할 만한 것은

다방 양옆으로 지금은 인쇄소와 갈비집이 있는데

그 인쇄소와 갈비집이

우리가 오래된 사진을 꺼내볼 때

양옆으로 선 사람이 사진마다 다르듯

여러 번 주인을 바꾸었다는 것이다.

그 다방에서 만난 내 친구 중에는

둘이나 벌써 저 세상에 가 있다.

사람들은 집에서도 커피를 끓여 마시고

자판기에서도 커피를 빼 마신다.

그러는 동안에도 여전히 그 다방은 커피를 끓여 내오고

오래된 음반으로 고전음악을 들려준다.

그러나 그 다방도 세월의 무게를 이길 수 없었는지

얼마 전 아내를 먼저 떠나보내고 매일 아침

삐꺽거리는 관절의 목제 계단을 올라가

이층에서 하루 종일 그림을 그리던 화가 주인을

저 세상으로 떠나보내고

피아노를 치는 둘째딸을 새 주인으로 맞았다.

늙은 화가 주인이 떠난 뒤로 머리 위에서

무겁게 발 끄는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목제 건물의 관절마다 박힌 못이 녹슬어

스러지는 소리가 바람결에 들리는 듯했고

그때마다 그 다방은 치통을 앓듯, 관절염을 앓듯 신음소리를 내었다.

엑스레이를 찍으면 골다공증을 앓고 있을

정겨운 이름 흑백다방

  

   -김승강 「흑백다방」전문


  시인 김승강은 “목제 건물의 관절마다 박힌 못이 녹슬어/스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드나든 ‘흑백’의 막내쯤 되지 싶다.

  클래식 음악에 심취했던 화가 류택렬이 이곳을 이어받아 사십 수십 년을 꾸려왔고, 그 후엔 아버지 뒤를 이어 피아니스트 유경아가 물려받았지만 안타깝게도 운영난으로 다방은 그만두고 음악학원으로 운영하고 있다.

 

  당시 흑백다방은 서울의 세느, 돌체, 모나리자와 더불어 꽤나 이름난 예술인들의 사랑방이었다. 그러므로 이곳은 진정한 진해 예술의 태동지다. 오디오가 흔해지기 전인 50년대부터 70년대 초반엔 부산 등지에서도 클래식 음악 애호가들이 버스를 타고 오기도 했다. 당시 정기적으로 열던 클래식 음악 감상회와 문학발표회 때는 경향의 여러 예술인들이 모여 낭만의 꽃을 피웠다고 한다. 조두남, 나운영, 이중섭, 유치환, 김춘수, 윤이상, 유한철, 정윤주, 금수현, 전혁림, 김동진, 설창수, 김수돈, 정진업, 박생광 등등 흑백과 인연을 맺은 이름들은 이루다 셀 수 없다.

 

  생전의 유택렬 화백은 “이곳은 사랑방을 넘어 전시장이고, 연주회자이며 작업실이었지. 제일로 기억나는 것은 나운영의 음악발표회였어. '2개의 사이렌과 12개의 타악기를 주제로 한 연주'란 긴 제목의 연주회였는데 당시 지방에선 들을 수 없는 첨단음악이었지.”

 

  흑백다방의 역사는 진해문학의 역사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60년대 흑백다방에서의 문학발표회는 1963년 문협 진해지부의 출범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다시 1981년 정일근, 이월춘, 정이경 등이 주축이 되어 토요시 동인을 결성하여 정기적으로 흑백에서 시낭송회를 개최하였는데, 마산의 오하룡, 이선관, 이달균 등등이 단골손님으로 초대되었다. 이후 다시 1986년부터 1990년까지 ‘진해와 진해사람들의 시’ 모임을 흑백에서 개최하게 된다. 진해문학의 번성기였고, 흑백다방의 새로운 전성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