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보도자료

이달균 시집 <장롱의 말>을 읽고-이웥춘

이달균 2011. 8. 23. 09:32

이월춘의 글쓰기 혹은 글읽기 4

사랑하라, 목숨 바쳐
    이달균 시집 <장롱의 말>을 읽고


 

  이 세상 모든 사물 가운데 귀천과 빈부를 기준으로 높고 낮음을 정하지 않는 것은 오직 문장뿐이다. 훌륭한 문장은 마치 해와 달이 하늘에서 빛나는 것과 같아서, 구름이 허공에서 흩어지거나 모이는 것을 눈이 있는 사람이라면 보지 못할 리 없으므로 감출 수 없다. 그리하여 가난한 선비라도 무지개같이 아름다운 빛을 후세에 드리울 수 있으며, 아무리 부귀하고 세력 있는 자라도 문장에서는 모멸당할 수 있다.                                                                                - 이인로

  시인 이달균(호가 눌재다. 워낙 말을 잘하는 사람이라 주변의 선배님들께서 호를 이렇게 붙여줬다고 전해진다. 지금부터 눌재라 부르겠다)이라. 이 사람을 이야기하려면, 이 사람의 시를 이야기하려면 아무래도 필자와의 관계에 대해 좀 끄적거려야 말이 될 듯싶다.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초, 얼마나 기가 찬 시절이었는지 다 잘 아실 것이다. 유신독재 반대다, 민주화다, 반정부 투쟁이다 해싸면서 사흘거리로 데모했던 시절. 그러니 걸핏하면 학교는 휴학이고, 마산 시내에 탱크가 돌아다니고, 캠퍼스에 공수부대원들이 천막 치고 살았던 때였으니. 학교 내 작은 동아리라도 맡은 학우들은 다 신원조회 대상이었고, 계엄 치하에선 다 수배되어서 끌려가던 시대. 나도 그때 수배 받던 중이었는데 다행히 경찰 정보과에 아는 분이 귀띔을 해주는 바람에 거제로 야반도주를 해서 무사했던 기억도 있다.


  그런 와중에도 우리는 학교에서 시화전이며 시낭송회를 열었고, 거기서 나는 눌재를 만났던 것이다. 그때는 정말 무엇 하나 보이는 것이라고는 없었고, 무작정 막막하기만 하던 시절이었으니 친구들은 만나면 막걸리에 오징어무침을 놓고 악을 써대며 노래나 부르던, 무엇을 어찌해야겠다는 생각조차 사치스럽던 시절이었다.

 

학교는 휴학이니 그는 고향 함안에 가 있었고 나는 진해에 있었으니 요즘처럼 인터넷도 없던 시절이라 편지를 자주 주고받았다. 그러다가 우리는 마산 오동동에 있는 찻집 <거목다방>에서 만났는데 그는 말없이 눈물을 흘렸다. 당황스러웠지만 나도 좀 울고 말았다. 나는 사실 잘 울지 않는 사람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혼자서는 가끔 울지만) 왜 우리가 울었겠는가.

 

새삼 이야기할 필요도 없으리라. 그만큼 답답했으니까. 가슴을 떨리게 하고, 주먹을 부르쥐게 하는 상황과 마음을 어쩌지 못해 울었던 것이다. 그렇게 지내온 시간이 어느덧 30여 년이 되었다. 조문규 형님이랑 정일근, 성선경, 성창경 등과 의기투합해서 <살어리>문학동인을 한 것이라든지, 정완희, 김형욱, 조성래 시인들과 삼일오 시동인회를 결성하고 마산에서 시화전을 하던 일 등등 어찌 다 나열할 수 있을까.


  또 있다. 눌재는 병석에 계셨던 부친을 위해 좀 이른 결혼을 했는데 그 결혼식 사회와, 1987년 첫시집 <남해행>을 냈을 때 출판기념회 사회도 내가 보았는데, 내 결혼식과 나의 첫시집 <칠판지우개를 들고> 출판기념회의 사회를 눌재가 보았으니 이런 인연과 관계도 흔치는 않을 것이다. 좋은 벗이란 어떻게 정의를 내려야 하는지 이 나이가 되도록 잘 모르지만 눌재와 나만큼 서로를 잘 아는 사이도 드물 것이다.

 

그래서인지 만나면 별로 말을 나누지도 않는다. 몇 마디만 건네다 보면 서로가 무얼 원하는지 다 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일일이 말을 해야 하는 일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서로가 알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행복하다. 좋은 글벗이 내 곁에 있으니, 평생을 함께 할 것이니. 스스로 고뇌하면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새삼 생각하게 만들고, 우리가 서 있는 자리를 좀더 깊이 들여다보게 만든다.

 

눌재와 나는 서로에게 결코 강요하지 않는다. 자신의 삶과 생각을 펼쳐서 보여줄 뿐, 그것이 부드럽든 딱딱하든, 차갑든 따스하든, 깊고 넓든 얕고 좁든 아무 상관이 없다. 눌재와 나는 같은 점보다 다른 점이 훨씬 많다. 그래서 더 가까운 지도 모른다. 나는 그가 늘 고맙다. 내 인생에, 글을 쓰면서 내 곁에 그가 있다는 것이 한없이 고맙다.


  하고 싶은 말이야 어찌 이것뿐이겠는가.  다음 기회가 있을 것이라 보고 각설하자.  시 이야기로 돌아가야지.

오늘도 한 사람을 등지고 왔습니다
슬픔을 나눠지라던 소명을 거역하고
냉정히 등만 보인 채 돌아온 내가 미워집니다
               
             - 이달균, 「등(背)」 전문, 시집 『장롱의 말』42쪽

  등을 뜻하는 한자 背는 긍정적 의미보다는 부정적 의미에 가깝다. 背信者(배신자)나 背恩忘德(배은망덕)이나 背叛(배반) 같은 어휘들만 봐도 알 수 있다. 손바닥에 못을 박고 하늘과 땅 사이에 몸을 누이신 예수님도 유다라는 배신자가 있었다. 사람살이에서 배신하거나 배신당하는 일은 다반사일 것이다. 그것은 삶의 곡절이 만들어낸 문화의 한 단면일 수도 있겠고, 팍팍한 세상의 뒷골목을 이야기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그래서 우리는 義人(의인)이니 비겁자(卑怯者)니 하는 말들을 쓴다. 

  하루에도 수없이 만나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그야말로 복잡하기 그지없다.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있고, 기분 좋은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으며, 오랫동안 같이 있고 싶은 사람이 있는 반면에 아예 만나기도 보기도 싫은 사람도 있다. 오늘도 화자는 어느 누구와 <등지고> 돌아왔다. 화가 나서 소리도 지르고 욕도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감정 표현까지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 그를 이해하고 용서하지 못한 자신을 꾸짖는다. 누구나 공감하는 상황이요 누구나 이런 일을 겪어보았을 것이다. 스스로를 미워하는 화자의 마음이 저절로 읽혀진다. 나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슬픔까지 나눠지라던 소명>을 다하지 못하고 돌아온 시적화자의 잔잔한 반성은 마치 윤동주의 시를 읽는 것 같다. 


  네가 내 등에 비수를 꽂아도 나는 너를 용서해야 한다. 이해해야 한다. 넓은 가슴이 없더라도 나는 너를 껴안아야 한다. 그리하여 너와 내가 함께 살아갈 수 있다고 석가도 예수도 공자도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게 어디 쉬운가. 필부의 삶과 생각이라는 게 어디 그렇겠는가. 좁은 땅덩어리 위에서 수억의 인간들이 지지고 볶으며 살고 있는데, 각종의 이해관계에 얽혀 오래 쌓아온 신의를 쉽게 던져버리는 세태에 익숙해진 우리가 어찌 그런 삶을 살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살아야 한다. 그렇게 살기 위해 애써야 한다. 그래야 희망이 있다.  시인의 마음을 그저 읽는 것 같다.


  눌재의 세 번째 시집 <장롱의 말(고요아침)>을 읽으면서 느낀 첫 번째 마음이 여유와 눅진함이었다. 여기서 여유란 사전적 의미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하게 변주된 여유를 말한다. 사물에 대한 시각과, 사람에 대한 나아가 인생에 대한 여유와 사랑의 시선을 의미한다.

나이든 바람들은 옹기를 넘나든다
네모난 소금들이 절어 눈물이 되는
곰삭는 일의 참맛을 알기 때문이지

체념에 길들기란 쉬운 일이 아냐
햇살에 씻겨져 빛나던 감들이
곰팡이 뒤집어쓰고 곶감 되는 모양을 보아

장맛 된장맛이 뉘 집 아낙 손맛이라지만
뒷각담을 들며나는 바람이며 세월이며
시름도 삭여야하는 곡절맛이 아니더냐

때깔 고운 푸른 잎만이 다 제 맛은 아냐
어찌 젊은 놈이 묵은 장맛을 알까부냐고
껄껄걸 눙치고 웃는 여유가 바로 발효인게야
    
          이달균, 「발효」-고초산방에서 전문 시집『장롱의 말』84쪽

  이 시의 부제에 있는 ‘고초산방’이란 필자도 알고 있는 고초 우화명 선생님의 경남 고성군 마암면 댁을 일컫는다. 눌재는 고초 선생과 오랜 친분을 쌓아왔고 그분의 철학과 삶을 동경해왔다. 고초 선생은 진해 출신으로 오래전부터 고성의 자연 속에서 심신을 닦으며 지내고 있다. 최근엔 진해의 위곡 이강대 형이 고초 선생의 소개로 고성에 자리를 잡는 중이다. 고진 김상석 형과 수일 내에 고성 그 푸근한 자연 속으로 가자고 약속했는데 가급적이면 빨리 그 날이 왔으면 좋겠다.


 
  이 시를 읽고 나는 화자가(시인이라도 틀린 게 아니다) 고초 선생의 삶에서 평소 느껴온 바를 ‘장맛’이라는 발효미로 풀어낸 것이라 단정했다. ‘나이 든 바람’이니, ‘곰삭는 참맛’들이 ‘껄껄껄 눙치고 웃는 여유’를 만나고, ‘체념에 길들기’를 거쳐 ‘바람과 세월과 시름도 삭여야 하는 곡절맛’에 이르면 비로소 ‘묵은 장맛’ 바로 발효의 미학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시인은 말을 누르고 다독이며 달래는 자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안 잊어버리려고 종이에 깨알 같이 적어두고 꿈에서도 깨어나 항아리에 담아두었다가 결국 익혀 말의 술을 빚는 자이다.(최정례)
 
  눌재의 시가 힘을 갖는 이 자연스러운 맛은 인스턴트의 시대에 사는 오늘의 우리를 다시 한번 돌아보게 한다. 순간의 맛, 속도의 맛, 그저 가볍고 드라이한 맛에 길들여진 우리를 젖혀두고 두고두고 깊은 맛이 우러나는 참맛에 대한 그리움을 눌재는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눌재의 나이 지천명이다. 그렇다고 복고의 의미를 붙이진 마라. 자극적이고 순간적인 삶의 맛을 버리고 눅진하면서도 곡진한 사람살이의 참맛을 그리워하는 것이니까. 그것이 시인의 숙명이니까. 결국 눌재는 시적 대상과 대상 사이의 관계를 애정의 시선으로 살피고 나아가 사람살이의 모든 의미를 사랑으로 엮어내고 있다는 생각이다.
                                       
 <계간진해 54호, 2006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