핏빛 장미꽃 위에 나부끼는 자유 -국립 3.15묘지에 세워진 시비
핏빛 장미꽃 위에 나부끼는 자유
-국립 3.15묘지에 세워진 시비
이 달 균
국립 3·15묘지를 찾아왔다. 깃발은 들지 않았지만 두 주먹 불끈 쥐고 민주를 외친 올해 일흔이 된 이승기 선생과 함께. 그분은 영화연구가답게 3·15 그날 마산의 극장에서 상영하던 영화는 무엇이며 관객은 얼마나 들었고 극장문은 언제 닫았는지를 술회한다.
그렇다. 3.15는 누구에게나 있다. 어떤 방식으로 기억하든 제 몫의 3·15는 있다. 3·15의거야 누가 모르랴만 당시의 상황을 간략히 요약해 본다. 대통령 이승만과 자유당은 12년간의 독재 권력을 연장하기 위해 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선거를 온갖 부정한 방법을 다 동원하여 치른다. 선거준비과정에서부터 노골적인 부정행위를 자행하였으므로 대구에서 첫 시위(1960년 2월 28일)가 터진다.
선거 당일에는 금권으로 표구하기, 유령유권자 조작, 야당참관인을 축출한 상태에서의 공개투표, 투표함 바꿔치기 등등 우려했던 모든 방법들이 다 동원되자 울분에 찬 마산시민들은 “협잡선거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며 항거하기 시작했다. 경찰은 시민을 향해 무차별 발포를 하였고, 사상자가 나오면서 시위는 격해지기 시작했다. 4월 11일, 28일 동안 실종되었던 마산상고 입학예정이었던 학생 김주열의 시체가 마산중앙부두에 떠오르면서 대규모 2차 시위가 일어난다. 이 의거에서 12명이 사망하고 250여명이 경찰이 쏜 총에 맞거나 체포 구금되어 모진 고문을 당한다. 마산시민들의 의로운 투쟁은 전국으로 확산되어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다.
현재의 마산시 구암 1동 국립 3·15묘지는 2003년 3월에 준공되었다. 의거 7년이 지난 후 구암동 야산 3,960㎡(1,200평)에 12명의 희생자묘역이 생겨났다. 이후 1993년부터 시민의 뜻에 따라 본격적인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였고, 1998년 3월 총 부지면적 143,200㎡(43,390평)규모의 3·15성역공원 조성공사에 착공하게 된다. 2000년 12월에는 민주 열사들의 묘를 이장하여 묘역조성을 완공한다. 2002년 8월 1일 3·15성역공원에서 국립 3·15묘지로 승격되었으며, 2003년 3월 역사적인 준공식을 가졌다.
2001년 12월 27일, 국립3·15묘지에는 3·15의거를 기념하는 10인의 기념시비가 건립되어 제막식을 가졌다. 마산정신이라 일컬어지는 3·15의거를 체험한 김춘수, 이석, 김세익, 정공채, 김용호, 김태홍, 이제하, 장하보, 정영태, 조정남의 비분강개한 시들이 당시를 생생히 보여준다.
<3·15의거기념사업회>는 3·15의거가 정치, 사회, 문화, 역사를 감싸 안으면서 완성된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진력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3·15의거기념시선집 『너는 보았는가 뿌린 핏방울을』을 발간하였고, 이어진 역점 사업으로 기념시비가 세워진 것이다.
강희근, 박태일, 이성모, 변승기 등 4인의 선정위원이 전체 230여 편의 시들 중 10인의 10편을 선정하였다. 시비는 책 6권을 펼친 모양을 취하고 있는데, 12면의 화강암 벽면은 12편의 시를 새길 수 있게 조형되어 있다. 시비 앞 바닥에 작은 부조를 하였고 제목을 ‘역사의 장’으로 붙였다. 설계는 조각가 김동숙이 맡았고, 제작비는 9천 5백만원, 토목 및 환경조성 사업비 3천 7백만원은 마산시에서 지원하였다.
실질적으로 시비 제막을 지휘한 변승기(3·15기념사업회 사무국장 역임) 시인은 “12면 중 10편을 새겨 2면을 남겨둔 이유는 3·15가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현재에서 미래로 이어지는 유구한 것임을 의미한다. 그래서 나머지 2면은 미래의 시인들에 의해 채워질 것이다.”고 힘주어 말한다.
남성동 파출소에서 시청으로 가는 대로상에
또는
남성동파출소에서 북마산파출소로 가는 대로상에
너는 보았는가....뿌린 핏방울을,
베꼬니아의 꽃잎처럼이나 선연했던 것을....
1960년 3월 15일
너는 보았는가....야음을 뚫고
나의 고막도 뚫고 간
그 많은 총탄의 행방을...
남성동파출소에서 시청으로 가는 대로상에서
또는
남성동파출소에서 북마산파출소로 가는 대로상에서
이었다 끊어졌다 밀물치던
그 아우성의 노도를....
너는 보았는가....그들의 앳된 얼굴 모습을....
뿌린 핏방울은
베꼬니아의 꽃잎처럼이나 선연했던 것을.....
-김춘수「베꼬니아의 꽃잎처럼이나-마산사건에 희생된 소년들의 영전에」전문
60년 3월 28일 국제신문에 발표한 시다. 잘 못쓴 저항시는 거친 비유, 투박한 이미지들로 이루어진다. 직접 몸으로 부딪히다보면 감정의 절제를 잊기 쉽다. 그러나 시의 본령은 어떤 경우에도 지켜져야 한다. 이 시는 김춘수 특유의 명징한 이미지를 바탕으로 한 현장시다. 밀물 치던 아우성의 노도 속에서 앳된 얼굴들이 흘리는 핏방울을 “베꼬니아의 꽃잎처럼이나 선연했던” 것으로 비유한다. 과연 꽃의 시인답다. 베고니아의 꽃말은 친절, 짝사랑 혹은 영혼의 사랑이란 뜻도 있단다. 꽃잎은 크지 않지만 화려해 보인다. 작지만 열정이 있는 도시 마산의 순수한 영혼들은 베고니아꽃잎을 닮았다.
이 시를 읽을 때마다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이 떠오른다.
...............<앞부분 생략>............
너는 열세 살이라고 그랬다.
네 죽음에서는 한 송이 꽃도
흰 깃의 한 마리 비둘기도 날지 않았다.
네 죽음을 보듬고 부다페스트의 밤은 목놓아 울 수도 없었다.
죽어서 한결 가비여운 네 영혼(靈魂)은
감시(監視)의 일만(一萬)의 눈초리도 미칠 수 없는
다뉴브강(江) 푸른 물결 위에 와서
오히려 죽지 못한 사람들을 위하여 소리 높이 울었다.
다뉴브강(江)은 맑고 잔잔한 흐름일까,
요한·슈트라우스의 그대로의 선율(旋律)일까,
음악(音樂)에도 없고 세계지도(世界地圖)에도 이름이 없는
한강(漢江)의 모래 사장(沙場)의 말없는 모래알을 움켜 쥐고
왜 열 세 살 난 한국(韓國)의 소녀(少女)는 영문도 모르고 죽어 갔을까
...........<뒷부분 생략>..........
부다페스트에서의 한 소녀의 죽음은 열 세 살 난 한국소녀의 영문도 모르는 죽음과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베고니아 꽃잎처럼 포도를 적신 그 선연한 핏방울과도 무관치 않다. 거기엔 ‘자유’란 한 마디로 요약된다. 1960년 그날을 예언이라도 한 듯 이 시는 한 해 전(1959년)에 쓰여 졌다. ‘무의미 시’를 주창한 김춘수지만 역사적 의미망으로 가득 엮인 이 시들은 김춘수적 저항시로 읽어도 무방하리라.
문학평론가 김현이 쓴 ‘김춘수를 찾아서’엔 이런 얘기들이 나온다. 일본 유학 시절 비교적 넉넉했던 집안이었으므로 친구들 술값을 곧잘 냈다고 한다. 술자리에서 이런 저런 시국 발언을 하였는데 친구 중 밀정이 있어 결국 불령선인의 죄목으로 끌려갔다. 그러나 자신은 의연하게 반항하지 못하고 살고 싶은 욕심에 복종해버린 자신을 부끄러워했다고 한다. 김현은 그 글에서 솔직히 자신을 반성하는 마음을 높이 사고 있다. 없는 경험을 날조하여 투사연하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에 진솔한 자기반성을 하는 시인은 흔치 않기 때문이다.
삼월에서 사월
계절은 봄이 있지만
꽃이 피었던지 새가 울었는지
그것보다는 가도(街道)에 뿌려진 붉은 피
그 피가 봄을 상징해야 하던 슬픔의 봄이었다
지금은 새삼 간 봄이 돌아와
거리거리 사람들의 마음속에
또 하나의 꽃 피는 봄이 오고 있다
마산이라 내 사랑의 보금자리
고요한 바다가 한 번 아닌 두 번도 더
격랑의 물길이 일 수 있었던 것은-
마산의 학도들의 시민들의 애저린 목소리가
온 세계를 울리는 종소리가 되고-
허망한 독재의 꿈을 불살라 버리게 한 것은-
그것은 이십대의 싱싱한 꿈의 안타까움에 애저린 마음들
낡고 썩은 사회보다 먼저 무사(無事)를 바라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스승들에게 도전이기도 했다
아직도 가라앉지 않는 싱싱한 꿈이
또 무엇을 겨누고 있는지 두렵고나
바다가 좋고 술이 좋고 인심이 좋다는
마산이여!
온 세계를 울리던 그 아우성 그 싱싱한 마음을
고요히 잠재우고
지금은 모두가 내일의 생활에 진정한 민주의 꽃을 피우자
-이석 「마산에서의 봄-민주승리의 날에」전문
이석 시인은 1927년 함안에서 출생하여 1945년 진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42년부터 1962년까지 마산고교에 근무했다. 이후 마산상고 교사를 지내는 등 20년간 마산에서 살았다. 초대(1962년), 2대(1963년) 마산문협회장을 지내기도 한 지역문단의 뿌리다.
위 시는 1960년 4월 29일 마산일보에 발표되었다. “그것은 이십대의 싱싱한 꿈의 안타까움에 애저린 마음들/낡고 썩은 사회보다 먼저 무사(無事)를 바라는/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스승들에게 도전이기도 했다”는 구절은 자신을 포함한 기성세대를 향한 준엄한 꾸짖음이다. 그들은 젊은 청춘들의 자유를 갈망하는 몸짓을 무모한 도전처럼 여긴다. 그 싱싱함이 바다를 깨우고 민주의 꽃을 피우지 않는가. 그래서 그들이 “또 무엇을 겨누고 있는지 두렵”다고 했다.
1960년 3월 15일 그날 그때, 그는 마산고교 교사였다. 꽃같이 떠나간 학생들 중 그의 제자 2명이 있었다. 한 명은 마산고 1학년 2반 반장으로 장래가 촉망되던 자산동 몽고빙과점의 아들 김용실(金湧實), 또 한 명은 이북에서 피난 와서 형과 함께 살고 있던 김영준(金泳濬)이었다. 그들의 죽음은 큰 충격이었다. 시인은 그들을 위해 조시를 읽었고, 학교 교정에 세운 위령비에 “교사 이순섭(李淳燮)은 이 글을 짓고 이훈경(李勳擎)이 이 글을 쓰다.”라고 새겼다. 이순섭은 시인의 본명이다.
1957년 마산일보에 연재한 <마산의 삽화>의 머리말을 보면 산문을 쓰는 것이 문학수업에 있어 결코 도움이 되지 않지만 마산 이야기를 해야 함은 이곳에 사는 문사로서 교사로서의 숙명이라고 적고 있다. 이석 시인이 그토록 젊은이들의 기개와 열정을 높이 사는 이유를 알만하다. 불의를 참지 못하는 강직함과 호방함을 동시에 가졌기에 단숨에 써내려갔을 것이다.
그날 밤
황혼이 밀려가고
어두움이 항구를 무겁게 덮고 있던
3월 15일 그날 밤
돌아오지 않으리라고 마지막 말을 남기고
어머니의 손을 뿌리치고 나온 젊은 사자들의 성난 얼굴에
눈물 어린 눈동자 더욱 커지며
두 손에 불끈 쥔 커다란 돌멩이에
있는 힘 다하여
원수의 가슴팍을 향하여
독재자의 대가리를 향하여 던지던 그 용맹이
청춘보다 소중하다던 조국의 운명을 구하기 위해
부르던 애국가도 끝나기 전에
원수의 총탄에 쓰러진 젊음이여
차마 감을 수 없었던 눈을 감고 간 젊음이여!
아침 햇빛이 찬란히 빛나는
푸르고 푸른 하늘가 높은 곳에
민주혁명의 꽃이 되어 그대들 곱게 피었으니
아! 생명보다 더한 아름다움이 없고
조국보다 귀한 사랑이 없을진대
값있게 죽어간 청춘들이여
이 진혼가의 가락에 고이 잠드소서.
-김세익 「진혼가(鎭魂歌)-학생위령제에 붙이는 시」전문
1960년 6월 4일 마산일보에 발표한 시다. 김세익 시인은 단 한권의 시집 ‘석류’와 유고산문집 ‘낙우송(落雨松)’을 남겼다. 마산여중 교사를 거쳐 1990년 이화여대에서 정년퇴임을 했다. 10년간 마산에 살면서 마산문학인협회 창립에 밑거름 역할을 했다.
당시 마산에 살던 시인은 역사의 소용돌이를 피해갈 수 없었다. 억압하는 것으로부터 저항하는 힘이 바로 민주주의다. 잔잔한 바다도 때로 분노의 파도를 몰고 온다. 노도는 늘 예기치 못한 곳에서 온다. 그날 희생된 영혼들도 순수하였으므로 더 빛난다. 그들의 넋을 위로하는 위령제에 어찌 시인인들 가만히 있겠는가. 소년은 돌아오지 않겠다고 말하며 집을 나선다. 그리고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 죽음은 영원하여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다.
지금 하늘이여
총을 맞은 이 땅의 봄이 마산에서
마산에서 핏빛으로 안타깝게 타고 있습니다.
꽃같이 피어 오르는 소년을
남쪽바다 부두 앞 수면 위로
실종은 얼굴에 포탄을 박아 십칠세를 떠올렸습니다.
하늘은 웬 일로
이렇게 구름을 거칠읍니까
민주주의의 수목(樹木) 때문에
그 수목에 총과 피의 내음새가 자욱합니까.
하늘이여, 어서
본래의 뜻대로 우리들 민주주의의 나무가
자유와 평화와 행복의
바로 백성들의 꽃과 열매의 수목으로
자라게 하여 주소서.
이제 거칠은 구름을 하늘에서 거두시고
총에 맞은 한국의 봄을 마산에서 살리소서.
타골의 노래처럼 일찍이 아세아의 황금시대에
빛나던 그 등불의 복지를 주시고
아 아-
전쟁에서도 죽음으로 조국을 지킨
용감한 이 땅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정공채 「하늘이여」
이 시는 1960년 4월 14일 이례적으로 국제신보 1면 사설란에 실렸다. 당시 국제신보 편집국장이었던 이병주는 이 시를 받아들고 사설을 비우는 대신 1면 정치면에 이 시를 싣는다. 그리고 1963년 현대문학에 1500행의 장시 ‘美 八軍의 車’를 발표하게 되는데 이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5~6회의 신원조회를 당했고, 사상이 의심되는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혀 직업선택 등 여러 면에서 어려움이 따랐다고 한다.
시인은 마산의 횃불을 치켜든 소년들을 가리켜 민주주의의 수목이라 말한다. 그 이름 위에 김주열의 얼굴도 겹쳐 놓는다. 이마에 총탄이 박힌 채 마산 앞바다에 떠오른 소년은 그 모습 그대로 한국의 봄을 알리는 전령사가 된다. 그리고 일찍이 인도의 시성 타고르가 우리나라를 가리켜 「빛나는 아세아의 등촉」이라고 말한 웅혼한 민족혼을 일깨운다.
“일찍이 아세아의 황금시절에/빛나는 등촉의 하나의 조선(Korea)/그 등불 한번 다시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갈 수 없구나 청산가리 극약
품에 품지 않고서는
프로펠러 달린 최루탄
눈에 꽂지 않고서는
오늘도 어제도 내일도
김주열이 헤엄치는
저기 저
바다
부르짖던 사람들
산비탈로 쫓겨 올라가고
텅 빈 햇볕 드는
텅 빈 바라크
솥뚜껑만한 화경(火鏡)
한 손에 쥐고
멍하니 바라보는
저기 저
바다
-이제하「다시 바다」
이제하에게 마산바다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타관에서 많은 세월을 살다 문득 마산에 와서 바다를 본다. 그는 마산고교를 졸업했다. 소년기에서 청년기로 접어드는 시절을 마산에서 보냈으니 어찌 맨 몸 맨 정신으로 그때를 찾아갈 수 있을까. 청산가리라도 품지 않고는 차마 대면할 수 없는 얼굴들이 있다. 그들은 어제의 이름이 아니다. 오늘도 내일도 영원히 살아 있는 이름이다. 그 바다는 아직 그대로인데 왜 부르짖는 사람들은 자꾸 산비탈로 쫓겨 올라가는가.
시인이 바라본 마산의 70년대는 햇볕과 그늘이 극명히 공존하던 시절이다. 한일합섬이 번창하고 수출자유지역에선 수출의 노래 소리가 들려오지만 도시는 영양실조와 실어증에 허덕인다. 텅 비어서 햇볕만 우두커니 들어와 선 바라크. 아직도 마산은 열병에서 해방되지 않았나 보다. 그래서 시인은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옳아! 장했거니
너 푸르른 불꽃이여!
타고 또 붉다 못해
터지고 밟힌 이름이여!
애띠고 어린 가슴이 불러
깨어난 이 조국이여
조국은 하나여도
가슴마다 갖은 조국
자다가 불러봐도
포근한 이름이여
무너진 저 악의 아성을
너희들이 보는가.
-장하보「송가-4월에 쓰러진 학생들을 위하여」
1961년 4월 29일 마산일보에 발표한 이 시조는 3·15만이 아니라 4·19에 희생된 영령들까지 아우르고 있다. 통영 출신 장하보는 <문장>지로 등단하였으며 조남령, 김상옥, 이호우 등과 함께 일제 말 암흑기를 거쳐 해방 이후의 시조단을 이끈 중요한 인물이다.
고려말부터 시조는 시대적 소명을 함께 하였고 역사의 변혁기를 거칠 때마다 그 궤적을 뚜렷이 그려왔다. 그러다가 70년대 말부터 80년대 초반에 이르면서 그 기운은 많이 소진된 듯 했다. 하지만 노도의 시대를 거치면서 두드러진 활동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뼈아픈 반성은 더욱 투철한 시대정신을 장착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장하보의 이 시조는 나름의 의미를 부여한다. 3·15에서 4·19에 이르는 혁명의 공간에서 치열하게 세상과 부딪힌 시인의 시세계를 엿보게 된다.
나는 보았다
최루탄이 쳐박힌 김주열 군의 얼굴을
그 위에 덮힌 피묻은 태극기를
나는 들었다
하늘을 찢는 만세소리와
불의, 부정을 규탄하는 분노의 함성을
나는 보았다
피보라 속에 쓰러져 간
그 수많은 젊은 꽃들을 자랑스러운 죽음들을
아아 나는 보았다
「내 아들아 민주주의 위해서 잘 죽었다」고
눈물조차 보이지 않던 어머니의 얼굴을 그 눈을
그리고 나는 알았다
총칼로써도 민권을 뺏을 수 없다는 것을
인민의 불타는 염원은
그 누구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지금 우렁찬 기적소리 높이며 민주열차는
내일을 향해 속력을 놓는다
나는 믿는다 나는 믿는다
민족의 영광을
피로 뿌린 씨
꽃 필 우리들의 봄이 찾아올 것을.
-정영태 「피로 뿌린 씨 내일은 꽃피리」
정영태 시인의 이 시는 3·15의거의 역사적 의미와 미래에 이어져야 할 당위를 말하고 있다. 시로 썼지만 사설처럼 읽혀지기도 한다. 이 시에도 김주열은 등장한다. 김주열이 상징적 인물이 되었지만 12위의 영혼이 3.15와 함께 한다. 자칫 김주열로 인해 다른 11위의 이름들이 묻혀서는 안 된다는 것이 마산의 보편적 정서다.
“나는 보았다”에서 시작하여 “나는 들었다”로 다시 “아아 나는 보았다”로 마지막 연에선 “나는 믿는다 나는 믿는다”고 두 번 반복하여 점층적으로 감정을 드러낸다. 거기에다 시적 완성도를 더하기 위해 희생당한 학생의 어머니를 불러낸다. 민주주의를 위한 것이든 아니든 간에 자식의 죽음을 “잘 죽었다”고 말할 어머니는 세상에 없다. 하지만 시인은 굳이 그렇게 표현한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이다. 눈물을 보이지 않는 강인한 어머니는 내일을 향해 속력을 놓는 민주열차를 응시한다. 피로 뿌린 씨는 더 붉은 꽃잎으로 피어날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데모」도 끝났다.
등교한 날 아침 동무들은 풀이 죽어 있었다.
상학종이 울려도 자기는 그날 배를 앓아 누웠었노라 했다.
또 다른 아이는 시골에 있었다고 변명한다.
선생님은 흑판에 글만 쓰시는데,
군데군데 비인 책상과 걸상
딴 동무들은 머언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창에 붙어 앉은 나는
정원의 이파리와 그 이파리 위에 춤추는 바람을 보며
생각했다.
내 바로 옆자리의 눈이 큰 누이를 가졌던 동무를.
그리고
저 핏빛 장미꽃 위에 나부끼는 건 필시
「자유」일 거라고.
-조정남「피빛 장미꽃 위에 나부끼는 것」
이 시는 1960년 학생혁명시집에 수록되었으며 진주사범 3학년 재학 중에 썼다고 한다. 김태홍, 정공채, 김용호, 이석, 김세익, 정영태, 장하보의 시들이 대체로 웅변적이고 조시적 성격을 띠고 있는 것에 비해 이 시는 매우 잔잔하고 구체적이다. 의거가 끝나고 등교한 교실의 분위기를 통해 의거 그날을 보여준다.
거리에 나오지 못한 친구들은 부끄러워 빈 책상과 걸상을 바로 보지 못한다. 누군 배를 앓았고 또 누군 시골에 가 있었다고 변명한다. 선생님도 마찬가지로 그저 흑판에 글만 쓰신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학교에 나온 학생들은 누구나 서로의 눈을 바라보지 못한다. 시인은 교정에 나부끼는 바람과 잎새 위에 빈자리의 친구 얼굴을 겹쳐본다. 장미는 왜 저리 붉을까. 붉은 장미 꽃잎과 불어오는 바람, 그리고 떠나버린 그 친구가 외친 것은 ‘자유’란 한 마디가 아닐까 곰곰 생각한다.
조정남 시인은 여기에 새겨진 시인들 중 유일하게 60년대에 등단한 시인이다. 1930년에 등단한 김용호로부터 장하보(1935년), 정영태(1946년), 김춘수(1948년), 김태홍(1950년), 김세익(1953년), 이석(1956년), 정공채(1957년),이제하(1958년) 조정남(1966년) 순으로 이어진다. 이 비어 있는 두 군데 여백엔 70년대 이후에 등단한 시인들의 시가 들어갈지도 모른다. 바로 미래를 계승한다는 의거정신의 연속성을 말해준다.
그늘이 없는 팔월의 뙤약볕 아래서 10편의 시를 읽었다. 인용한 8편의 시 외에도 김용호의 「해마다 4월이 오면 」, 김태홍의 「마산은 」이 그날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이들 시인들은 <마산편. 1>의 「시의 거리엔 우수의 황제가 산다 」에 실었으므로 이글에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다시 마산을 생각한다. 그리고 나와 3·15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1983년 이월춘, 조성래 시인과 함께 <3·15시동인>을 결성하여 사화집『비 내리고 바람불더니』(도서출판 청운)를 출간하였고, 2002년 9월엔 마산창신대학 문예창작과 학생들과 함께 1개월의 연습 끝에 시극 <3·15 그 못 다 부른 노래>를 공연했다. 그렇게 내 핏줄 속에도 3·15는 살아있다. 그러므로 간혹 쓴소리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불멸의 역사 3·15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 3.15가 구현하려 했던 자유정신에 대한 견해 차이를 피력했을 뿐이다. 압제로부터 돌려받았던 자유라면 더 큰 용서와 화해를 가져야 한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국립 3·15묘지를 내려오면서 영화연구가 이승기 선생은 그날 마산극장에서는 문정숙, 김진규 주연의 ‘흙’을 상영했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 9시 마지막 상영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시위가 거세어진 탓도 있었지만 불붙은 북마산파출소를 향해 출동한 소방차가 무학초등학교 앞 전봇대를 들이받는 바람에 마산은 정전으로 암흑천지가 되고 만다. 그렇다. 영화를 연구하는 이에게 3·15는 영화와 함께 기억될 것이고, 어시장에 고깃배를 대던 어부에게는 어판장의 분위기와 함께 기억될 것이다. 시인은 시로써 그날을 증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