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균의 문학 여행

마산 <시의 거리>엔 우수의 황제가 산다.

이달균 2011. 8. 19. 10:22

마산 <시의 거리>엔 우수의 황제가 산다.

 

이 달 균

  마산 산호공원에 오른다. 용마산이란 이름에 더 익숙하다면 마산에 산지 오래된 이가 맞다. 마산은 공원이 없는 도시다. 물론 합포만이 가슴 깊숙이 들어와 있고 무학산이 등을 대고 있으므로 굳이 공원타령을 할 필요가 없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청소년기를 이곳에서 보낸 이들이라면 산호공원에 올라 마산바다가 어디쯤에서 끝나고 마을이 시작되는지를 본적이 있으리라. 고층건물도 없고 매립으로 길들이 완전히 닦아지기 전 바다는 공원에 훨씬 가까웠다. 자주 오가는 뱃고동 소리도 손으로 만져질 만큼 지척에서 들렸다.

 

  이곳에 <시(詩)의 거리>가 있다. 1990년 5월 1일 세운 <시의 거리> 표지석엔 이렇게 쓰여 있다.

  “마산은 <가고파>와 <고향의 봄> 시정(詩情)이 면면히 살아 숨 쉬는 예술의 고장이다. 우리 고장의 문화적 전통과 자긍심을 아끼고 기려야 한다는 시민의 뜻을 모아 여기 산호공원 산책로에 마산을 빛낸 시인들의 대표작을 빗돌에 새겨 전국 최초의 <시의 거리>를 조성함으로써 시민의 아름다운 정서와 애향심을 길이 꽃 피우고자 한다. 시민의 사랑을 받는 사랑스런 문화공간이 될 것을 믿으며 오늘 뜻 깊은 마산 시민의 날에 즈음하여 제막을 한다.”

 

  오늘은 <시의 거리> 추진위원장 이광석 시인과 함께 오른다.  마산 시내에 위치한 유일한 공원이다. 공원 입구 마산도서관 아래 길은 전혀 정비되지 않았으므로 이 공원에서 백일장 등 행사가 열리면 차들이 우왕좌왕 소란하다. 공원이 시작되는 초입에 마산도서관이 있는데 이 도서관을 옆으로 타고 담벼락이 시작된다. 화강암으로 석축을 쌓은 길을 따라 올라 가야 한다.

 

  공원의 효율과 미관을 생각한다면 이런 식 보다는 초입부터 곧바로 산으로 진입하는 길들을 내었으면 좋겠다. 석축을 허물고 나무를 솎아내어 여러 갈래의 산책길을 내면 한결 공원다워 보이지 않을까. 시비 역시 포장도로를 따라 일렬로 도열시키기보다 여러 산책길 중간 중간에 벤치를 놓고 그늘 아래 앉아서 시를 읽을 수 있으면 훨씬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어쨌든 이만 하기도 쉽지 않다. 조각공원은 많지만 시비공원은 국내에서 처음이니 말이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대궐 차린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꽃동네 새동네 나의 옛고향

파란들 남쪽에서 바람이 불면

냇가에 수양버들 춤추는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이원수 <고향의 봄> 전문


  이원수의 노래비는 세 곳에 세워져 있다. 양산시 춘추공원, 창원시의 용지공원, 마산의 산호공원 등이다. 홍난파 작곡으로 잘 알려진 이 노래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많이 부르는 노래 중 하나다. 그중 마산 산호공원의 노래비가 가장 오래되었다. 노래비 건립위원회와 경남매일신문사(현 경남신문)가 주관하고 새싹회 후원, 백숙기의 제작으로 1968년 9월 28일 세워졌다. 이곳은 이원수 선생이 졸업한 마산상업고등학교와 한때 살았던 생가가 이 공원 아래에 있으므로 특히 연이 깊은 곳이라 생각되어 마련한 것이다.

 

  2미터는 족히 됨직한 키에 건립배경을 쓴 철판을 국화문양의 테로 두르고 노랫말을 동판에 양각하였다. 빗돌에 동판의 녹물이 흘러 세월을 말해 준다. 작은 측백나무숲에 가려진 기단을 자세히 살펴보면 <39사단>이란 글이 새겨져 있다. 노래비와 군대, 이 부조화 속의 조화가 바로 이 비 제막 당시의 숨은 이야기를 짐작케 한다.

 

  이 부분에서 이광석 시인은 숨을 고른다. 내용인즉, 제막식을 위해 제반 준비를 하였지만 정작 노래비 본체가 도착되지 않았다. 빗돌은 열차에 실려 서울서 내려오는 길이었고, 제막식은 다음날이었다. 역에서 내린 빗돌은 겨우겨우 이곳으로 옮겨왔으나 장비가 없는 당시로서는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다. 부득이 창원 <39사단>의 중장비가 동원된 것이다. 키 큰 빗돌을 받힌 기단의 콘크리트가 채 굳지도 않은 상황에서 다음날 제막식을 맞는 마산 문인들의 노심초사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런 염려 덕분으로 많은 내외 귀빈이 찾은 가운데 무사히 제막식을 치룰 수 있었으니 결국 이 노래비는 민군 합작으로 만들어진 문학의 승리라 할 만하다.

 

  이렇게 우여곡절을 겪은 탓인지 이후에도 사연은 계속되었다. 이 노래비는 세 개의 동판으로 구성되어 있다. 맨 위쪽의 것은 건립이유를, 가운데는 노래비라는 글자를, 그리고 아래의 것은 노랫말 전문을 새긴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이 동판 세 개가 다  사라진 것이었다. 70년대 초반, 물자는 없고 배는 고파 무엇이든 돈이 될 만한 것이면 다 뜯어 가던 시절, 시비도 예외가 아니었다.

 

  여러 곡절 끝에 세워진 마산 최초의 시비 동판이 사라진 것은 인구 16만의 작은 도시에선 엄청난 사건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노래비는 마산 시내 각 초중고대학생과 뜻 있는 일반인들의 성금으로 만들어 졌으니 그 소동이 짐작할 만하다. 각 학교마다 통신문이 돌려지고 수색작업에 나섰다. 결국 어느 고물상에서 발견되었지만 위의 두 동판은 구겨지고 훼손되어 원형을 찾을 길이 없었고, 노랫말은 그나마 온전하여 다시 붙였다. 위의 두 개는 다시 제작하여 붙였다. 자세히 보면 콘크리트를 메운 흔적이 역력하다. 이렇듯 이 노래비는 수난의 역사를 간직한 채 묵묵히 산호공원을 지키고 있다. 

 

  이 외에도 이곳엔 이은상의 <가고파>, 김수돈의 <우수의 황제>, 김용호의 <오월이 오면>, 박재호의 <간이역>, 정진업의 <갈대>, 이일래의 <산토끼>, 김태홍의 <관해정에서>, 권환의 <고향>, 천상병의 <귀천>, 이광석의 <가자, 아름다운 통일의 나라로> 등과 마산 문인들이 함께 지은 <마산의 노래> 비가 있다.


내 고향 남쪽 바다 그 파란 물이 눈에 보이네

꿈엔들 잊으리요 그 잔잔한 고향 바다

지금도 그 물새들 날으리 가고파라 가고파


어릴 제 같이 놀던 그 동무들 그리워라.

어디 간들 잊으리요 그 뛰놀던 고향 동무

오늘은 다 무얼 하는고 보고파라 보고파


그 물새 그 동무들 고향에 다 있는데

나는 왜 어이타가 떠나 살게 되었는고

온갖 것 다 뿌리치고 돌아갈까 돌아가


가서 한데 어울려 옛날같이 살고지라

내마음 색동옷 입혀 웃고 웃고 지내고저

그 날 그 눈물 없던 때를 찾아가자 찾아가


물 나면 모래판에서 가재 거이랑 달음질하고

물 들면 뱃장에 누워 별 헤다 잠들었지

세상 일 모르던 날이 그리워라 그리워


여기 물어 보고 저기 가 알아 보나

내 몫엔 즐거움은 아무 데도 없는 것을

두고 온 내 보금자리에 가 안기자 가 안겨


처자들 어미 되고 동자들 아비 된 사이

인생의 가는 길이 나뉘어 이렇구나

잃어진 내 기쁨의 길이 아까워라 아까워


일하여 시름 없고 단잠들어 죄 없는 몸이

그 바다 물소리를 밤낮에 듣는구나

벗들아 너희는 복된 자다 부러워라 부러워.


옛 동무 노젖는 배에 얻어 올라 치를 잡고

한바다 물을 따라 나명들명 살까이나

맛잡고 그물 던지며 노래하자 노래해


거기 아침은 오고 또 거기 석양은 져도

찬 얼음 센 바람은 들지 못하는 그 나라로

돌아가 알몸으로 살꺼나 깨끗이도 깨끗이

 -이은상 <가고파> 전문


  마산에 가고파 시비는 다섯 군데에 있다. 월영동 마산여객선터미널(1981. 9), 자산동 통일동산(1991. 12), 양덕동 수훈공원(2006. 12), 돝섬 정상, 그리고 이곳 <시의 거리>에 있다.

 

  이 노래비는 경남매일 신문사와 노래비건립위원회가 주관하여 세웠다. 당시 건립위원회 명예회장은 김팔봉이었고, 회장은 김종신이었다. 병풍모양의 4면 검정바탕에 흰 글씨를 음각한 것이 이채롭다. 시 말미에 “1932년 1월 5일 지음”이란 글씨가 선명하다. 세로 글로 쓰여 있고 띄워 쓰기 자간은 넓은데 비해 10수의 연 가름 폭은 너무 좁아 읽기에 불편해 보인다.

 

  굳이 이 시를 다 전제한 이유는 거의가 앞의 노래 4수만으로 기억되기 때문이다. 이미 민족의 시, 민족의 노래가 된 이 시조는 1932년 동아일보 재직 당시에 쓰여 졌다. 집 뒤 작은 언덕 노비산에서 바라보는 마산바다는 “석양은 져도 찬 얼음 센 바람은 들지 못하는” 아담한 항아리를 닮아 있었다. 일본 유학 시절 양주동, 이광수와 함께 3대 천재로 불린 그였지만 고국에 돌아오자 모국어를 잃어버린 청년의 꿈만 허물어질 뿐이었다. 식민의 밤을 지새는 타관의 초라하고 허망한 삶 앞에서 항상 자신을 보듬어 주던 곳은 바로 마산항 그 ‘가고파의 바다’였다.

 

  언젠가 제주 일출봉에서 머리칼이 희끗한 노인들이 부르는 <가고파>를 들은 적이 있다. 그들은 미국에 사는 고교 동문들로서 고국 친구들의 초청으로 이곳에 와서 이 노래를 부른다고 했다. 먼 이국에서 느낀 향수는 노산이 겪었던 망향의 고통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노래는 우리 핏줄 속에 동질감을 느끼게 하는 그 무엇임에 분명하다.

 

  노래 <가고파>는 김동진 작곡으로 더 많이 알려지게 된다. 와세다 대학을 함께 수학하였고 평생 절친한 친구로 지냈던 양주동은 숭실전문학교 2학년 국어수업시간에 이 시조를 들려주었다. 그때 작곡가의 꿈을 키우던 김동진이 있었고, 그는 곧바로 전편의 4수를 작곡하여 발표한다. 김동진은 이후 40년간을 나머지 6수를 완성하기 위해 음률의 여행을 계속했다고 한다. 그가 전체 10수를 다 완성한 것은 마산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1973년 이 시비 건립 때 마산에 와서 직접 예전에 발표한 앞부분의 노래(4수)를 부른다. 여기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나머지 6수를 완성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고 그는 굳게 약속하였다. 드디어 1973년 12월 10일 노산의 고희에 맞춰 숭의여전 강당에서 김화용의 노래로 발표하게 된다.

 

  산호공원 입구 <시의 거리 100미터>라는 표지판을 따라 올라가면 거의 비슷한 형태의 시비들이 눈에 들어온다. 맨 먼저 권환의 <고향>을 만나고 차례로 천상병의 <귀천>, 박재호의 <간이역>, 정진업의 <갈대>, 김용호의 <오월이 오면>을 만난다. 이들 시비들은 밑에 화강석을 깎아 기단을 만들고 검은 사각의 비석에 시를 새긴 거의 대동소이한 모습을 하고 있어 통일감은 주지만 다양성면에서는 좀 불만이다. 물론 길을 따라 놓여 있으니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다. 그러나 이곳이 진정 <시의 거리>로 불리려면 이런 천편일률적인 형태가 아니라 조형미를 제대로 갖춘, 이를테면 시적 영감을 살린 조각 작품에 준하는 시비로 제작되었으면 하는 바램도 있다.


내고향의

우거진 느티나무 숲

가이없는 목화밭에서

푸른 물결이 출렁거렸습니다


어여쁜 별들이 물결밑에

진주같이 반짝였습니다


검은 황혼을 안고

돌아가는 흰돛대

당사(唐絲)같은 옛 곡조가

흘러나왔습니다


그곳은 틀림없는

내 고향이었습니다


꿈을 깬 내 이마에

구슬같은 땀이 흘렀습니다

-권환 <고향> 전문


  한국현대사를 관통하는 한 여울목에 카프파가 있다. 그 격동의 시기를 사회주의적 관점에서 극복해 보려 했던 지식인 집단이었다. 그 중심에 권환이 있었다. 이동순 시인이 펴낸 권환 시집 이름이 『깜박 잊어버린 이름』인 것만 보더라도 그는 자칫 잊혀 져 버릴 지도 모를 시인이었다. 그가 제대로 알려진 것은 1988년 월북문인 해금조치 이후부터다.

 

  그가 본격적으로 사회주의 민족운동에 뛰어든 것은  1925년 일본 야마가타 학원을 졸업하고 경도제대 독문과에 입학하면서다. 1930년 4월 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동맹 중앙집행위원회에 선임되면서 카프의 중심인물로 활동 하였고, 1936년경 카프 제2차 검거 때 체포돼 사상 전향 서약을 한다. 이후 폐결핵을 앓으면서 첫 시집 『자화상(自畵像』을 묶는 등 문학 활동을 하다가  1954년 6월 29일 마산시 합포구 완월동 101-14번지 자택에서 생을 마감한다.

 

  시비 뒷면엔 본명(경완)이란 이름과 함께 간단한 약력을 새겨놓았다. 1999년 11월 27일 시의 거리 추진위원회와 마산시가 건립하였다는 소사를 적어 놓았다.

  이 시는 1943년에 발표하였는데 자신의 고향 마산시 진전면 오서리(당시는 창원군)를 추억하며 지은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지금은 우거진 느티나무도 없고, ‘가이없는 목화밭’은 더더욱 없다. 다만 시로 인해 당시 이곳에 목화농사를 많이 했고 바다가 가까운 곳이란 짐작을 할 뿐이다. 마지막 연 ‘꿈을 깬 내 이마’를 보면 분명 현지에서 쓰여 진 시는 아님을 알 수 있다. 결국 타관에서 고향을 그리며 쓴 시라고 보여 진다.

 

  사향을 노래한 드물게 보는 서정시다. 하지만 이 시에도 권환 시의 특징은 여지없이 드러난다. 앞의 5연까지는 고향의 정경과 지극히 감상적일 정도로 “당사(唐絲)같은 옛 곡조”가흘러나왔다고 노래한 서정은 어디까지나 꿈속의 모습이다. 그가 직면한 현실은 엄연히 “구슬같이 땀이” 흐르는 지난한 역정의 연속이었던 것이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노라고 말하리라.


-천상병 <귀천(歸天)>전문 

   

  권환 시비 옆에 천상병의 <귀천>과 박재호의 <간이역>이 있다. <간이역>은 1990년 5월 1일 시의 거리 추진위원회와 마산시가 공동으로 세웠고 글씨는 윤판기가 썼다. <귀천>은 이 보다 한참 뒤인 1999년 11월 27일 역시 시의 거리 추진위원회와 마산시가 세웠고, 글씨는 누가 썼는지 밝히지 않고 있다.

 

  두 시인의 시비가 나란히 서 있는 것이 우연이 아니란 생각이 든다. 천상병과 박재호, 두 시인은 부산에서 한때 많은 시간을 보낸 적이 있다. <시인 김규태의 인간기행>을 참고해 보면 천상병이 서울 생활에 염증을 느낄 때면 문득 부산에 나타나곤 했다는 것이다.

 

  부산에서 동가식서가숙을 하는 것을 보다 못한 최계락 국제신문부장이 부산시장의 축사나 연설문 등을 작성하는 공보비서 자리를 알선한다. 일상적인 삶에 익숙지 않은 그였기에 통금시간을 넘겨 술에 취해 다니는 일이 많았고, 자연 시장비서란 직함을 여러 번 써먹게 되니 측근에선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얼마 안가 다시 실업자가 되어 창선동 골목 할매 빈대떡집에 수시로 드나들게 되었다. 이때 주로 만난 문사들로는 최계락, 김규태, 한창식, 박재호, 강상구, 서림환 등이었고,  화가로는 김종식, 이석우 등이 있었다.

 

  이렇게 이승에서 맺은 인연은 사후에도 나란히 빗돌을 곁에 두고 서 있다. 두 사람은 곤궁한 삶과 유랑자적 모습에서는 유사한 점이 많다. 내적인 것이든 외적인 것이든 상처가 자신의 인생을 결정짓는 운명도 닮았다.

 

  기인 천상병을 어처구니없는 반공이데올로기의 피해자로 둔갑시킨 것은 동백림 사건이었다. 아니, 거꾸로 천상병을 잡아가두고 고문함으로써 무시무시했던 간첩단사건은 역사적 코미디로 희화화 되고 말았다. 대학동기 친구가 간첩혐의로 구속되었는데 평소 그에게 천원 이천원의 용돈을 받은 것을 '간첩의 정을 알고 협박하고 갈취했다'는 죄목에다 불고지죄까지 얹어 구속해버린 것이다. 중앙정보부에서 전기고문을 당해 세 번이나 까무러치는 등 혹독한 고초를 겪었다.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으로 풀려났지만 몸은 만신창이가 되고 말았다. 1972년 친구의 누이동생 문옥순과 결혼하였고 그녀는 지금도 ‘귀천’이란 주점을 경영하고 있다. 이 시비를 세울 때 문옥순 여사가 직접 참석하였다.

 

  신산한 이승의 소풍을 끝내고 하늘로 돌아간 시인의 대표작 <귀천>은 가장 애송되는 시가 되었다. 변훈이 작곡하여 노래로도 많이 불려진다. 뿐만 아니라 전국 여러 곳에서 천상병 문학제가 열린다. 마산 진북초등학교는 그의 모교다. 하지만 지금은 폐교되었고 이 교사는 현재 삼진미술관으로 변모되어 있다. 2007년에는 ‘하늘로의 소풍’이란 이름을 내걸고 시적 영감을 회화로 표현하는 추모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간이역두(簡易驛頭)에 가을이 스쳐간다


잊히어진 시간 위로

긴 목청을 가끔 돋우는

기적소리에


눈물을 찔끔거려 본다

허망한 손짓도 해본다


바람 속에

햇살 속에 물구나무 서 있는

어느 왕조(王朝)의 풍경화(風景畵)가


자꾸만 

차창(車窓)에 매달리는

어느 한역(寒驛)의 가을날

-박재호 <간이역(簡易驛)>



  쓸쓸하다.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간이역, 그 추운 역을 스치는 바람, 가끔 목청을 돋우는 기적소리들은 긴 시간의 존재를 허락하지 않는 것들이다. 이 머물지 못하는 것들에 시인은 눈길을 주면서 스스로도 이방인이 된다. 그의 시야에 펼쳐진 왕조는 물구나무 서 있다. 얼핏 머물다 떠나는 가을은 한사코 차창에 매달린다.

 

  시인은 자신의 삶이 불안한 물구나무 선 모습이라 생각한다. 어차피 두고 갈 것도 남기고 갈 것도 없음을 알지만 손짓을 해 보는 이유는 무엇일까. 누구에겐들 생의 미련이 없으련만 박재호 시인의 회한은 빛깔이 짙다. 

 

  천상병의 상처가 굴곡진 한국현대사의 기형적 흔적이라면 박재호는 개인사적 삶의 여울이 빚어낸 상처라고 말할 수 있다. 지금도 박재호 시인을 생각하면 약간 벗어진 이마에 곡선을 그리며 넘어가는 머리칼, 훤칠한 외모에 단정한 옷매무새, 항상 옆구리에 끼고 다니던 검은 수첩과 뿔테 안경이 떠오른다.

 

  마산 지역에서 어쩌면 마지막 보는 보헤미안적 기질의 문인이 아니었던가 싶다. 해조출판사 경영, 경남신문 객원논설위원, 경남대학 미술 강사, KBS 방송국 객원 필진 등등 필자가 아는 박재호 시인의 직업을 열거해 보지만 어느 것 하나 제대로 급료가 나오는 것은 없었다.

 

  그는 기형의 손가락을 가졌다. 두 손 다 엄지를 제외한 네 손가락이 몽그라져 있었다. 평소 가깝게 지낸 오하룡 시인의 회고를 통해 보면 6.25 전쟁 때 배를 탔는데 그때 입은 동상으로 인해 그리 되었다고 들었다고 한다. 진물이 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손에 항상 반창고를 붙이고 다녔다. 이런 장애는 어엿한 직업을 갖는 데는 치명적인 결함이다. 하지만 이런 신체적 장애에도 불구하고 글씨는 달필이었다.

 

  가난했지만 당당했고 다정다감했다. 그의 풍모엔 비굴과 조잘함이 스며들 여지가 없었다. 으레 술값을 내지 않았지만 누구도 그의 신세짐을 탓하지 않았다. 술좌석에 있는 그를 많이 보았지만 흐트러진 모습을 본 적은 없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부산에서 함께 지낸 여러 문인과 화가들이 빈소를 찾아왔다. 바로 천상병 시인과 함께 빈대떡집을 누비던 동료들이었다. 화가 이석우, 김강백 등은 생전에 그와 시화전을 같이 하기도 했다.

 

   박재호 시인은 1927년 경남 밀양 출신으로 1955년 '문학예술'과 1957년 '사상계'로 등단하였고, 1985년 뇌일혈로 별세하기까지 단 한 권의 시집 <간이역>을 간행했다.



모래밭에 묻어 놓은

물새의 노래는

영영 몰라도 좋은 것이 있었다.


바람이 일면

바람같은 심사

사색을 쫓고


스르르 시익시익

그이의 모시치마 여미는 소리로

울어야 하였다.


지금은 열다섯 소녀 하나

울면서 항구로 간다고

사공의 넋두리에

열이 오르는데


낙동강은 돌아선 채

태고 그대로인 바다로 가는 것을

그는 잠자코 보고 있었다.


-정진업 <갈대>전문


  선생은 1916년 경남 김해시 진영읍에서 나서 1934년 마산공립상업학교를 졸업하고 1940년 평양숭실전문대학교를 수학하였다. 1939년 문장 5월치에 소설 ‘카츄사에게’가 뽑혀 등단하였으나 생전에 소설집은 펴내지 않았다. 『정진업전집. 2』(한정호 엮음)에 희곡, 수필, 평설등과 함께 소설 14편이 수록되어 있다. 다섯 권의 시집과 한 권의 역서를 내고 1983년 마산에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후학들에게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낙동강은 시인에게 운명이었다. 대부분의 시간을 부산과 마산에서 보냈으니 낙동강 물은 모세혈관에 까지 스미어 있으리라. 그 강의 오랜 주인인 갈대는 시인이 겪는 시대적 체험과 그로 인한 새로운 물음을 던지기에 알맞은 대상이었다.

 

  정진업의 시에는 시대를 향한 준엄한 비판과 남성적 기질의 강직함이 묻어나온다. 자칫 그런 시들은 육화되지 못하고 생경한 겉돌기에 머물 위험이 있는데 이 시인의 시에선 진정성이 뚝뚝 묻어나온다. 격동기를 거치면서 토해낸 노래들은 손으로 쓴 시라기 보다 몸으로 쓴 시에 가깝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배우이면서 희곡작가, 소설가, 언론인으로서의 소명을 짊어진 청년정신의 구현을 늘 소망했기 때문이리라.

 

  그런 시 세계에 비춰보면 시비에 담긴 이 시는 주의 주장과 관념을 배제한 서정시로 읽힌다. 건립위원회가 대중을 의식하여 이 시를 골라 뽑은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시 역시 묘사의 적확성을 위해 고심한 흔적은 역력하다. 이 시 속의 갈대는 흔히 단정하는 ‘흔들림’ ‘방황’ ‘여성성’등의 낡은 속성을 거부한다. 처음엔 바람에  울기도 하고 중간엔 사공의 넋두리에 열을 내기도 하지만 결국엔 태고의 모습으로 흐르는 강을 바라보면서 담담해진다.  

 

  박태일 경남대 교수가 엮어낸 『정진업 전집1.』을 들고 시비를 찾았을 때 내게 들어온 구절은  “낡은 시고를/ 증권처럼 소중히 접어 넣고/ 외투도 없이/ 휘청휘청 나서는 광복동 거리”(‘내일에의 사랑을’부분)였다. 천상 문인일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짐작케 한다. 완전히 탈고하지 못한 구겨진 원고를 증권처럼 안주머니에 소중이 접어 넣는 문사의 모습이 아련하다. 그러니 하기 좋은 말로 영혼이 부자라 한들 삶이 어찌 빈한하지 않을 것인가. 

  

  정진업 시비는 두 곳에 있다. 다른 하나는 1975년 5월 마산시 내서읍 삼풍대(三豊臺) 공원에 세운 ‘삼풍대소사(三豊臺小史)다. 이 공원은 아파트 단지 내에 있으며 아름드리고목들이 10여 그루가 있어 사람들이 발길이 많은 곳이다. 다음 기회에 이 시비도 살펴보고 싶다.



무언가 조용히

가슴속을 흐르는 게 있다


가느다란 여울이 되어

흐르는 것


이윽고 그것은 흐름을 멎고

모인다. 이내 호수가 된다


아담하고 정다웁고

부드러운 호수가 된다


푸르름의 그늘이 진다

잔 무늬가 물살에 아롱거린다


드디어 너, 아리따운

모습이 그 속에 비친다


오월이 오면

호수가 되는 가슴


그 속에 언제나 너는

한 송이 꽃이 되어 방긋 피어난다

-김용호 <오월이 오면>


  김용호는 1912년 5월 26일 마산에서 출생하여 1928년 마산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였고 1935년 『신인문학』에 작품 <첫여름밤 귀를 기울이다>로  발표하면서 등단한다. 1938년에는 장시〈낙동강〉(사해공론, 1938. 9)을 통해 낙동강 유역 주민들의 굴욕적인 민족사적 상황에 대한 분노를 그렸다. 1941년 메이지대학[明治大學] 전문부 법과를 졸업하고, 같은 해 도쿄에서 첫 시집 〈향연〉을 펴낸다. 이듬해 신문고등연구과를 수료한 후 귀국한 후 선만(鮮滿)경제통신사 기자로 있으면서 시집 〈부동항〉을 펴내려 했으나 일제에 의해 압수되고 만다. 8·15해방 후 한때 좌익문학단체에 관계했으나, 그후 한국자유문학가협회에 가담하여 활동한다.

 

  김용호의 시세계를 한 마디로 요약하기는 쉽지 않다. 초기에는 장시 <낙동강>에서 보듯 일제강점기 압박받는 민족현실을 암울한 어조로 노래하였다. 이후 차츰 서민들의 애환에 눈길을 돌려 이웃들의 구체적인 삶의 모습을 그리는 한편 지적으로 절제되고 사색적 세계로 변모해 나갔다.

 

  전체적 작품경향과는 상관없이 필자는 그를 5월의 시인으로 명명하고 싶다. 이 시 <오월이 오면>은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오월의 유혹>, 조두남과 김진균이 각각 작곡하여 발표한 시 <또 한 송이 나의 모란>과 함께 5월의 시인으로 명명하는데 손색이 없다. 세편은 각각 ‘호숫가에서 피어나는 오월의 싱그러움’, ‘신록으로 치달으며 함초롬히 피어나는 청춘의 향기’, ‘모란에 얽힌 밉고도 아름다운 추억’을 노래하였으니 가히 5월의 시인이라 부를 만하다.

 

  만약에 <또 한 송이 나의 모란>이란 노래비가 ‘조두남 음악관’(건립 과정에서 만신창이가 되어 ‘마산음악관’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같은 곳에 선다면 하루 몇 번 정도는 노래가 흘러나오지 않을까. 시비를 지나치면서 김진균이 작곡한 <또 한 송이 나의 모란>과  같은 시에 조두남이 곡을 붙인 노래를 되풀이 읊조려 본다. 


 “모란꽃  피는  오월이  오면/또  한  송이의  나의  모란/추억은  아름다워  밉도록  아름다워/해마다  해마다  유월을  안고  피는  꽃/또  한  송이의  나의  모란”



까치가 울어

톡 알밤이 지고


바위틈을 흐르는 물소리

들국화에 더욱 맑은 날


낙엽을 긁고

너는 쌀을 헤어


죄 없는 웃음 속에

하루 해가 저무노니


골을 감돌아 나간

산절의 은은한 저녁 종소리


동실! 동실! 동실!

여운이 파문 짓는 곳


돛단배 셋 넷

놀 속에 졸구나


합포만은 

오붓한 한 폭의 그림!


-김태홍 <관해정(觀海亭)에서> 전문


  김태홍의 시비는 이곳과 3.15국립묘지(아! 마산은) 두 곳에 있다. 마산의 9경에도 들지 못한 ‘관해정’을 노래한 시가 산호공원에 빗돌로나마 세워진 것은 다행이다. 관해정은 마산시 교방동에 있는 조선시대의 정자로서 1983년 7월 20일 경남문재자료 제 2호로 등록되었다. 조선 중기의 학자 정구(鄭逑:1543∼1620)를 기리기 위하여 그의 제자들이 회원서원을 세웠던 곳이다. 정자 앞에는 정구가 직접 심었다는 수령 400년이 훨씬 넘은 은행나무가 있다. 해마다 음력 3월과 9월에 정구와 그의 제자인 허목(許穆)의 향사를 지낸다.

 

  무학산을 타고 내려오는 서원계곡 아래쯤에 위치해 있는데, 아마 당시에는 계곡 중간쯤이 아니었을까 싶다. 시에서 보듯 60년대만 해도 관해정 앞을 흐르는 서원곡의 물은 많았고 산은 더욱 가까워 툭 알밤이 떨어지는 곳이었다. 시인은 이곳에 놀러와 밥을 지어먹으며 합포만을 떠가는 배들과 놀, 석양을 울리는 산사의 종소리를 들었던 모양이다. 지금 관해정에서 바다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건물이 늘고 도시가 커지는 대신에 바다는 멀어지고 관해정을 둘러싼 풍경도 사라졌다. 그 맑고 풍부했던 서원곡물은 다 어디로 갔는지 계곡은 초췌하다. 

 

  시인은 미래를 예언하는 예언자인 동시에 현재를 다음 세대에 전하는 전령사이기도 하다. 김태홍 시인은 오늘과 다른 당시의 관해정을 잘 그려내었기에 전령사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1950년데 펴낸 그의 첫 시집  『땀과 장미와 시』의 주요 소재는 자연이었다. 그가 그려낸 자연은 감각적이고 모던한 경향을 드러낸다. 바다를 ‘에메랄드 구린의 비단폭’(해변), 멀리 홀로 선 신호등을 ‘아직 고아처럼 외롭다’라고 표현한 것이 그것이다. 그 후의 경향은 시대적 조류를 저항의식 속에 녹여낸 작품들이 주를 이룬다.

 

  마지막 시집 『훗날에도 가을에는』에 오면 오래 삭인 장맛 같은 완숙에 이르게 된다. 이를테면 “있음마저도 잊은 피안에서 공을 마음삼아서/공을 마음삼아서/당신 곁에서 밝게 살게 하십시오”(당신 곁에서 살게 하십시오) 와 같은 구절을 보면 있는 듯 없는 듯 부재하는 것에서 존재를 보는 심안을 느끼게 된다. 자연에서 시대를 거쳐 다시 도교적 세계로 옮겨가는 과정이 의미심장하다. 

 

  이 시비는 1991년 5월 30일 시의 거리 추진위원회와 마산시가 건립하였으며 글씨는 서예가 오식환이 썼다. 화강석으로 기단을 받히고 검은 돌에 음각한 것이 나란히 선 다른 비들과 큰 차이가 없다.     



맑은 대낮에


촛불 하나 켜 보면

초만 닳고


빛 없는 노래


아네모네는 情다운 愛人

紫色이 짙은 것은 憂愁夫人


구름과 詩와 꿈

食慾이 없는 饗宴에서


언제부터 가진 버릇인지 모르는

나의 秘方의 酒癖이여


知識도 理性도 斷絶된 世界意識에서

戰爭을 노래모양 외운다

英雄이 너무 많다


絶海 가운데 외로운 섬에 살아

歷程을 되씹는 皇帝가 되랴


 -김수돈 <憂愁의 皇帝>


  화인 김수돈은 1917년 마산 오동동에서 출생하였고, 1939년 5월 정지용의 추천에 의해 문장지를 통해 등단하였다. 1947년 2월 5일 제1시집 「소연가(召燕歌)」, 1953년 2월 20일 제2시집 「憂愁의 皇帝」를 간행하였으며, 1966년 7월 4일 마산도립병원에서 별세하였다.

 

  김수돈(金洙敦) 시비는 산호공원 시의 거리 위쪽에 고즈넉이 앉아 있다. 철쭉들이 잘 갖춰진 길 옆 계단을 올라서면 반반한 잔디밭에 나지막한 돌에 세로 글로 새겨 놓았다. 앞 면 첫 머리에 “고(故) 김수돈(金洙敦) 선생(先生) 시비(詩碑)”라고 한자로 적어놓았고, 뒷면에 추모 7주기에 동료와 친지 후배와 제자들의 정성을 모아 비를 세운다는 글귀가 있다.

 

  시인은 외롭다. 그래서 우수의 황제다. 가진 것은 비록 빈한할지 몰라도 우수에서만큼은 거만한 황제이고 싶다. 그의 대낮은 결코 밝지 않다. 초는 어둠을 몰아내지 못하고 그저 자신을 태울 뿐이며 목 놓아 부르는 노래는 빛이 되지 못하고 암울하다. 그래서 봄날 문득 피고 문득 지는 꽃에 기댄다. 아네모네, 그리스 신화 속 미소년 아도니스가 죽을 때 흘린 피에서 피어났다는 그 슬픈 사랑의 꽃. 비너스는 아도니스의 주검을 안고 다시 봄을 기약하며 아름답게 피어날 것을 예언하면서 피로 젖은 땅 위에 방울방울 술을 떨어뜨렸다. 우수의 황제인 시인은 우수부인 아네모네를 사랑한 것이다.

 

  왜 시는 구름처럼, 못 이룰 꿈처럼 허망한가. 화려한 말의 성찬, 그 넘쳐나는 시들 속에도 진정 내 가슴을 움직일 싯귀는 없는 것인가. 그럴 때는 그냥 술에 도피하고 싶다. 그의 세계에선 지성도 이성도 없다. 아니 지성을 가장한 위선이 들앉을 틈이 없다. 위무할 그 무엇도 없는데 저마다 영웅을 뽐낸다. 시인이 쌓은 성, 그 절해고도에 앉아 우수의 불을 밝히고 우수의 잔을 드는 우수의 황제가 있다. 

 

  이광석 시인은 김수돈의 묘가 무학산 중턱에 쓸쓸히 있다고 한다. 얼마 전 아들 이종훈(경남신문 기자)씨와, 화인선생의 애제자 김영태(전 경남대 교수)씨와 함께 묘소를 다녀왔다고 했다. 선생은 유난히 막걸리를 좋아해 임종을 앞둔 병상에서도 “막걸리 한 사발이 그립다”던 모습이 눈에 선하단다. 그래서 비를 뚫고 화인의 묘를 찾아 산을 올랐다고 한다.

 

  시 속에 아네모네가 등장한 것은 시를 위한 장치만은 아니다. 선생은 생전에 꽃을 좋아해 꽃꽂이에도 일가견이 있었다고 한다. 그의 호가 화인(花人)인 것을 보면 우수의 색채와 기품을 동시에 지닌 탐미적 모더니스트의 전형에 가까워 보인다. 그러니 자연 젊은 문인들과 문학 지망생들이 그의 곁에 많았으리라. 시비 옆에 아네모네를 심고 싶다. 

 

  이외에도 이곳엔 이일래의 <산토끼> 노래비와 이광석의 <가자, 아름다운 통일의 나라로>가 있다. 이들은 다음 기회에 거론키로 하고 이만 산호공원을 내려오기로 했다. 오월답지 않은 한더위가 찾아온 까닭이기도 하고, 선 채로 한꺼번에 너무 많은 시비를 보는 것도 만만치 않아서다.

 

  앞에서 잠시 언급했듯 이제 시비들은 조형성을 살려 자연친화적으로 배치했으면 좋겠다. 더운 아스팔트 지열과 오가는 차들의 매연을 맡으며 시를 읽으면 정독은 쉽지 않다. 많은 산책로를 내고 중간 중간 의자에 앉아 볼 수 있도록 하자. 독자에게도 서비스가 필요하다.

 

  이 글을 쓰는 동안에 마산은 <시의 도시>로 선포되었다. 관이 주가 된 이번 행사는 자칫 한 순간의 퍼포먼스에 그칠 확률이 높다. 자치단체가 스스로 평소에 시와 문학, 문화예술에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가졌는가를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한다. 결과는 과정에서 온다. 과정이 부실하면 결과는 실패를 예비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앞으로가 문제다.

 

  이런 정보는 문인과 관이 함께 공유해야 한다. 자치단체의 행정은 특정인 한 두 사람의 의견에 치중되어서는 안 된다. 진정 시의 도시가 되기 위해서는 시민과 시를 가깝게 하는 여러 방안들이 강구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곳만이 아니라 인적이 많은 시내 곳곳에 시비들을 세우거나 동판에 시와 시인의 얼굴과 손바닥을 떠서 길바닥에 배치하는 등 여러 다양한 방안도 검토해 봐야 한다. 지나치게 작고문인 위주의 행정도 그렇다. 지금 이곳을 지키며 열심히 창작하는 이들에게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어쨌든 마산엔 <시의 거리>가 있다. 고향을 그리는 시인들의 영광과 상처가 함께 깃들어 있다. 어쩔 것인가. 이런 모든 것이 세상사인 걸. 우수의 이불을 덮고 우수의 잠을 자는 시인이여. 거부와 순응을 반복하면서 원고지 앞에서 밤을 밝힌다. 비단 김수돈이 아니더라도 시인은 다 우수의 황제다. 그렇다. 마산 <시의 거리>엔 우수의 황제가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