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균의 문학 여행

진주성(晉州城) 돌아가는 남가람엔 불멸의 노래가 흐른다.

이달균 2011. 8. 19. 10:09


진주성(晉州城) 돌아가는 남가람엔 불멸의 노래가 흐른다.


의암(義巖)을 지키는

수주 변영로의 시비 -<論介>

파성 설창수의 시비 -<義郞 論介의 비문>

동기 이경순의 시비 -<저 언덕>

돌아보고


이 달 균


  진주 간다. 어디서 무엇부터 적을 것인가. 일각이 여삼추하고 오매불망하던 애인을 만났을 때처럼 심란하고 난감하다. 사연이 너무 많으면 외려 할 말이 없어지지 않던가.

 

 역사보다 먼저 흘러온 강이 있고, 대숲을 흔드는 바람소리보다 더 맵짠 함성이 숨 쉬는 도시. 남강은 안으로 붉고 푸른 기운을 간직하였지만 좀체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사람들은 지킬 것을 지킬 때는 목숨을 걸지만 평소엔 묵묵한 강물처럼 결을 고를 줄 안다. 외부인들은 오래 다독인 결의 겉만 보고 ‘보수적’이라 한다. 하지만 고도 진주를 알면 알수록 그 무궁무진함에 숙연해진다. 그렇다. 의암을 적시는 무심한 물결과 촉석루(矗石樓)를 한 번 보고 돌아가면 그만 성에 갇히고 만다. 숲정이를 흔드는 구름과 바람이라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오랜 역사의 흔적인 청동빛 녹내음의 풍운을 보고 난 후라야 조금 진주를 안다고 할 것이다.  

 

  남강이 그저 촉석루의 그림자를 담고 지나는 강이 아니라 그 진원을 따라가면 민족의 영산 두류산에 닿음을 이곳 사람들은 안다. 겨울 눈 덮인 천왕봉 계곡엔 봄을 기다리는 맑고 찬 샘이 있다. 이 샘이 바로 천왕샘인데 남강의 발원지 중 하나다. 여기서 비롯된 물은 광덕사지골과 순두류를 거쳐 덕천강을 따라 흘러들다가 남덕유의 참샘을 발원으로 하는 경호강과 진양호에서 하나 된다. 이 물은 다시 진주 지나 남동으로 흐르다가 함안 지경에서 급기야 정북으로 올라가 낙동강과 합류한다.

 

 진주성은 임란 3대첩인 진주대첩의 본거지다. 이 성을 거점으로 김시민의 군사와 백성들은  거의 10배에 가까운 왜적을 물리친 전공을 세웠다. 1593년 제 2차 왜의 칩입 때는 7만 민․관․군이 삼위일체가 되어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다가 산화해 갔다. 논개가 의암에서 왜장을 안고 남강에 투신하여 불멸의 충혼으로 거듭난 것이 바로 이 전쟁 때다.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情熱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아리땁던그 娥眉

높게 흔들리우며

그 石榴 속 같은 입술

죽음을 입 맞추었네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흐르는 江물은

길이길이 푸르리니

그대의 꽃다운 혼

어이 아니 붉으랴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변영로 <論介>전문


  촉석루 앞에서 강희근, 박노정 두 분 시인을 기다렸다. 오늘따라 바람이 차다. 강물은 얼핏 흰 옷깃을 보여준다. 수주(樹州) 변영로(卞榮魯)의 시비는 진주성 정문 매표소 앞에 있다. 장정 세 사람 정도가 팔 벌려 안아야 될 만한 큰 빗돌에 안정감 있게 글을 새겼다.

 

  기다리는 동안 시비를 둘러보았다. 시는 발표 당시의 원문이 아니라 오늘날의 맞춤법에 맞게 새겨 놓았다. 뒷면엔 “살아서는 官妓여도 죽어서는 義烈 女人이 된 論介의 갸륵한 행동을 진주시민들은 배워서....”라고 비를 세운 의미를 적어 놓았다. 1991년 3월 14일 진주문화원이 세우고 비문은 이명길 짓고 글자는 천갑녕 썼다고 적혀 있다.

 

 사실 이 시는 너무나 유명하므로 새삼 읽어 또 다른 감회를 느끼기엔 다소 무리가 있다. 중고 시절 국어시간에 우리는 이 시를 민족혼을 말할 때, 혹은 직유와 은유, 상징 등의 비유를 배우면서 읽었다. 지금 보아도 메타포를 설명할 때 이보다 더 적절한 시를 찾기가 쉽지 않다. 이런 선입관은 입시를 위한 글 읽기가 감동을 빼앗아 가버린 탓이다. 

 

  독자의 입장이 아니라 시인의 입장에서 산고의 과정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 보았다.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는 순간의 결행, 그래서 그 분노의 거룩함이야 순교와 다를 바 없으니 “종교보다 깊”다는 표현은 시적 과장에 머물지 않는다. 하지만 이 꽃다운 처녀가 왜장을 껴안고 풍덩 빠져버린, 그 슬픔과 세월을 삼키고도 푸른 그 물결의 요요함을 어떻게 형상화시킬 것인가. 감히 시인이라 이름 하는 그 수식에 상응하는 적확한 표현이란 과제 앞에서는 막막해지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이런 상상에 이르니 시가 다시 읽혀진다.

 

  여기서 두 이미지가 교차한다. 목숨을 버리는 여인의 결의에 찬 심정과 그것마저 품고 둥근 물너울만 남겨야 하는 넓은 강의 빛깔이 그것이다. 이 부분에서 결국 시인은 뭐라 단정 짓지 않고 비유를 차용해왔다. 그날의 물결은 “강낭콩보다도 더 푸른” 물결이며 논개의 마음은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마음으로 대비시켜 표현하였다.

 

  이런 이미지의 교직은 이후 시인들에게 많이 사용되었다. 정규화 시인은 시 <지리산>에서 섬진강을 일러 “대잎보다 푸르고 솔잎보다 연한”이라고 노래했는데, 원류를 거슬러 올라 가보면 바로 이 시의 기법이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짐작되기도 한다.

 

  진주성 안으로 들어가면서 강희근 시인께서 “원래 이 성터엔 한 마을이 살았다.”고 말씀하신다. “물길을 둘러싼 성 안에 여러 개의 우물을 가진 마을을 그대로 두고 성을 복원하였으면 훨씬 자연스럽고 역사적 가치가 있는 성이 되었을 텐데... 그저 획일적으로 이주를 시키고 빈 성을 만든 것이 못내 아쉽다.”고 안타까워하신다. 동행한 박우담 시인도 “옛날 초등학교 다닐 때 이곳(안성마을)에서 학교 오던 아이들이 생각난다.”고도 했다.

 

  진주성은 사적 제118호로 지정돼 있고 본성동과 남성동에 걸쳐 있다. 의기사(義妓祠), 쌍충사적비(雙忠事蹟碑), 김시민장군전공비(金時敏將軍戰功碑)와 촉석정충단비(矗石旌忠壇碑)가 나란히 서 있고, 정충단(旌忠壇), 북장대(北將臺), 서장대(西將臺), 영남포정사문루(嶺南布政司門樓), 창렬사(彰烈祠), 호국사(護國寺) 등의 유적들이 있다.

 

  남강을 굽어보며 서 있는 촉석루는 남원 광한루, 밀양 영남루와 함께 우리나라 3대 누각으로 꼽힌다. 촉석루에서 바라보는 남강의 경치도 좋지만 진주성 맞은편에서 보는 촉석루의 모습은 고색창연한 도시의 위용을 드러낸다. 밤이면 남강교와 진주성벽에 조명을 밝혀 아름다운 야경을 연출한다.

 

  그뿐이던가. 설창수 선생이 창안한 개천예술제는 한국 일만 이천 개 축제의 효시가 되었고 지금도 최고의 권위와 전통을 자랑하는 예술제로 인정받고 있다.

  정문을 들어가 조금 걸어가면 바로 의기사(義妓祠)가 있다. 한창 보수중이다. 인부들이 바쁜 걸음으로 오가기에 사진 한 장 찍기도 미안하다. 파성(巴城) 설창수(薛昌洙) 선생이 쓴 <義郞 論介의 비문>이 오른쪽 화단에 서 있다. -가신 6갑 해, 祠堂 앞에 서운-이란 글이 부제로 새겨져 있다. 전문을 옮겨본다.


  하나인 것이 동시에 둘일 수 없는 것이면서 민족의 가슴팍에 살아 있는 논개의 이름은 백도 천도 만도 넘는다.

  마지막 그 시간까지 원수와 더불어 노래하며 춤췄고 그를 껴안고 죽어 간 입술이 앵도보다 붉고 서리맺힌 눈썹이 반달보다 고왔던 것은 한갓 기생으로서가 아니라 민족의 가슴에 영원토록 남을 처녀의 자태였으며 만 사람의 노래와 춤으로 보답 받을 위대한 여왕으로서다.

  민족 역사의 산과 들에 높고 낮은 권세의 왕들 무덤이 오늘날 우리와 상관이 없으면서 한 줄기 푸른 물과 한덩이 하얀 바위가 삼백예순 해를 지날수록 민족의 가슴 깊이 한결 푸르고 고운 까닭이란 그를 사랑하고 숭모하는 뜻이라.

  썩은 벼슬아치들이 외람되이 높은 자리를 차지하여 민족을 고달피고 나라를 망친 허물과 표독한 오랑캐의 무리가 어진 민족을 노략하므로 식어진 어미의 젖꼭지에 매달려 애들을 울린 저주를 넘어 죽어서 오히려 사는 이치와 하나를 바쳐 모두를 얻는 도리를 증명한 그를 보면 그만이다.

  피란 매양 물보다 진한 것이 아니어 무고히 흘린 그 옛날 민족의 피는 어즈버 진주성 터에 풀 거름이 되고 말아도 불로한 처녀 논개의 머리카락을 빗겨 남가람이 천추로 푸르러 굽이치며 흐름을 보라.

 애오라지 민족의 처녀에게 드리고픈 민족의 사랑만은 강물 따라 흐르는 것이 아니기에 아아 어느날 조국의 다사로운 금잔디밭으로 물옷 벗어 들고 거닐어 오실 당신을 위하여 여기에 돌 하나 세운다. 


-설창수 <義郞 論介의 비문> 전문

-가신 6갑 해, 祠堂 앞에 서운-


  옆면에 새긴 ‘의랑 논개의 비’ 비문엔 “이 비를 세울 뜻은 안해인 게사년 논개의랑 순국하신 육갑을 기념하여 비롯된 것이다. 단기 4287년 갑오 10월 19일 의기 창렬회 삼가 세움. 글 지은이 설창수. 글 쓴 이 오제봉. 일의 주장 김진숙, 임한산, 박봉래. 돌 일한 이 박지문”이라 되어 있다. 대체로 지은이와 글자를 쓴 이를 밝히는 것은 흔한 일이나 관계자와 돌 일한 사람까지 새긴 것은 매우 이채로운 것이다. 과문한 탓인지 ‘안해인’이란 말이 잘 해득되지 않았고(후에 진주출신 어느 어른께서 그 전 해를 일컫는 말이라고 했다.) 게사년은 계사년의 오기인 듯싶다.

 

  ‘의기 창렬회’라는 모임은 진주가 아니면 보기 힘든 계다. 비록 기생이긴 하지만 당당히 의기임을 내세운다. 천한 기생이지만 나라 위하는 마음은 논개와 다를 바 없으니 의기의  이름으로 비를 세운다는 의의가 아름답다. 하긴 진주엔 ‘걸인 독립단’이란 모임도 있었다고 하니 과연 진주답다. 

 

  이 비문은 산문이라면 명문장이요, 시라면 또한 훌륭한 산문시다. 평소 선생께서 종종 후학들과 노는 자리에서 “그대들이 노래하면 나도 노래하겠다.” 하시며 이 글을 낭송하셨고,  詩文學社에서 엮은『薛昌洙 全集 Ⅲ-詩集』에 수록되어 있으니 시로 읽는 것이 더 마땅해 보인다. 

 

  단 하나의 이름이면서 민족의 가슴에 새겨진 이름은 백도 천도 만도 넘는다는 첫 구절이 자못 비장하다. 그 죽음은 한갓 기생의 신분으로 비롯되었지만 나중엔 창대한 여왕으로 받들어지고 있다고 노래한다. 선생께서 “여왕”이라 표현한 것은 애국심을 가진 백성인 동시에 희롱의 대상인 기생을 극복한 진정한 여성으로서의 재탄생을 의미한다. 관기로서 살았지만 죽어서는 “만 사람의 노래와 춤으로 보답 받을” 영혼이 된 것이다. 나아가 남강은 처녀 논개의 머리를 빗겨주기에 천추로 푸르게 흐르고 있고, 후대의 한 시인은 다사로운 조국의 금잔디밭으로 물옷 벗어들고 거닐어 오시길 간곡히 소망한다. 만약 이 시가 말미의 서정성을 획득하지 못했다면 감동이 퍽 줄어들지나 않았을지.

 

  결국 미천한 관기 논개는 죽어서 사당을 갖게 된다. 그렇지만 이 사당이 세워진 데는 수많은 우역곡절을 겪은 뒤다. 진주 유림(儒林)들의 줄기찬 노력이 없었다면 결코 이뤄지지 않았을 것이 자명하다.

  논개의 순국사실을 기록한 최초의 책은 유몽인(柳夢寅)의 어우야담(於于野談)이다. 유몽인은 이 책에서 창기편도 설정해 놓았지만 논개의 일은 卷首의 효열편에 수록하였고 다음과 같이 자세하게 기록해 놓았다.

 

 "논개는 진주의 관기였다. 계사년 창의사 김천일이 진주성에 들어가 왜적과 싸우다가 마침내 성이 함락되자 군사는 폐하고 백성을 모두 죽었다. 논개는 몸단장을 곱게 하고 촉석루 아래 가파른 바위 위에 서 있었는데, 바위 밑은 깊은 강물이었다. 왜병들은 이를 바라보고 침을 삼켰지만 감히 접근하지 못했는데, 오직 왜장 하나가 당당하게 앞으로 내달았다. 논개는 미소를 띠고 이를 맞이 하니 왜장이 그녀를 꾀려고 했는데, 논개는 드디어 왜장을 끌어안고 강물에 뛰어들어 함께 죽었다.”

 

  어우야담의 이 기록을 학계에서는 정설로 보고 있다. 진주성 함락 직후 유몽인은 무군사(撫軍司)의 관원으로 세자를 따라 삼남으로 내려갔다. 12월 전주에서 진주 금산 싸움에서 죽은 사람들의 명부를 작성하고 면역첩과 식량을 지급하였다. 이듬해 그는 다시 삼도순안어사(三道巡按御使)가 되어 진주성에 들러 순국사실을 채록한 것이라 여겨진다. 비록 채록이라 하지만 논개의 죽은 시점과 가까웠으므로 신빙성이 있다고 학계에서는 보고 있다.

 

  이런 객관적인 사실에도 불구하고 남존여비 봉건사회에서는 어떤 은전도 베풀지 않았다.  임란 직후 민심 안정과 피폐해진 도의의 복원을 위해 충․효․열의 행적을 다루어 편찬한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에도 기록되지 못했다. 그러자 논개 포상에 대한 진주 사람들의 염원은 더욱 간절하였다.  

 

  당시 진주 사람들의 염원을 처음(1721년) 비변사에 장문을 올린 이는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최진한(崔鎭漢)이었다. 이 글에서 그는 충민사와 창열사에 모신 순국사대부들의 직위를 높여달라는 사연을 앞세우고, 후반부엔 논개의 충절을 밝히고 포상을 간곡히 건의하였다. 이에 경종임금은 예조에 명을 내려 시행하라 하였으나, 이듬해(1722년) 예조에서는 풍문이 아닌 근거할 만한 기록을 올린 다음에 시행하라고 내려 보냈다.

 

  이에 우병영의 공금과 진주 유지들의 헌금을 보태어 의암 맞은편 언덕에 <의암사적비(義巖事蹟碑)>를 세워 보고하였다. 조정에서는 이 근거 문헌을 토대로 1722년 5월 경종임금이 교지를 내리게 되는데 “자손을 찾아 부역을 면제해 주고, 나라의 특별한 은전을 보이도록 하라.”고 하명하였다.

 

  그러나 진주 사람들은 마땅히 순국의 예를 받든다면 사당을 세워 제사를 올릴 수 있는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임금이 바뀌자 다시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최진한은 영조임금에게 전처럼 상소를 올리며 후반부에 논개의 충절을 세세히 밝혀 사당 건립을 주청하였다. 이 상소가 그때는 눈길을 끌지 못하였는데, 이후 다시 경상우수사 남덕하(南德夏)가 영조16년(1740년)에 장계를 올리자 의기 사당을 세우도록 하라는 임금의 허락이 내려졌다고 한다.

 

이 사실은 경상우수사 안숙(安橚)이 정조 22년 1798년에 쓴 <충민창열양사조향절목(忠愍彰烈兩祠助享節目>에서 밝히고 있다. 영조의 이 어명은 매우 큰 사건이었다. 기녀에게 사당을 지어 제사를 올리게 한 것은 조선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이었기 때문이다.

 

  전쟁은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켰다. 왜적에게 능욕당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관기들도 많았다. 하지만 누구 하나 하찮은 기생의 죽음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런데 유독 진주 사람들은 논개의 죽음을 거룩히 여겨 구전하였고, 이 얘기가 결국 세자를 모시고 조사 나왔던 유몽인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된 것이다.

 

  결국 논개는 순국한지 147년 만에, <의암사적비>를 세운 지 열 여덟 해 만에 온전히 살아난 것이다. 그동안 줄기차게 그 죽음을 귀히 여겨 신분의 차별을 극복하고 사당을 세우게 한 진주인들의 노력은 눈물겹다. 목숨을 바친 선열의 피는 말할 것 없이 비록 미천하였지만 고결히 죽은 넋을 두고두고 기리고자는 진정이 바로 “진주정신”이었다.


문득 만해 한용운의 시 <논개의 애인이 되어 그의 묘에>가 떠올랐다. 


날과 밤으로 흐르고 흐르는 남강(南江)은 가지 않습니다

바람과 비에 우두커니 섰는 촉석루(矗石樓)는 살 같은 광음(光陰)을 따라서 달음질칩니다

논개여 나에게 울음과 웃음을 동시(同時)에 주는 사랑하는 논개여

그대는 조선의 무덤  가운데 피었던 좋은 꽃의  하나이다 그래서 그 향기는 썩지 않는다

나는 시인으로 그대의 애인이 되었노라

그대는 어디 있느뇨 죽지 않은 그대가 이 세상에는 없구나


나는 황금의 칼에 베혀진  꽃과 같이 향기롭고 애처로운 그대의 당년(當年)을 회상한다

술 향기에 목마친 고요한 노래는 옥(獄)에 묻힌 썩은 칼을 울렸다

춤추는 소매를 안고 도는 무서운 찬 바람은  귀신(鬼神)나라의 꽃수풀을 거쳐서 떨어지는 해를 얼렸다

가냘픈 그대의 마음은 비록 침착하였지만 떨리는 것보다도 더욱 무서웠다

아름답고 무독(無毒)한  그대의 눈은 비록  웃었지만 우는 것보다도 더욱 슬펐다

붉은 듯하다가 푸르고 푸른 듯하다가 희어지며 가늘게 떨리는 그대의 입술은 웃음의 조운(朝雲)이냐, 울음의 모우(暮雨)이냐, 새벽달의 비밀이냐, 이슬꽃의 상징이냐

빠비 같은 그대의  손에 꺾이지 못한 낙화대(落花臺)의  남은 꽃은 부끄럼에 취하여 얼굴이 붉었다

옥 같은 그대의 발꿈치에  밟히운 강언덕의 묵은 이끼는 교긍(驕矜)에 넘쳐서 푸른 사롱(紗籠)으로 자기의 제명(題名)을 가리었다


아아, 나는 그대도 없는 빈  무덤 같은 집을 그대의 집이라고 부릅니다

만일 이름뿐만이나마 그대의 집도 없으면 그대의 이름을 불러 볼 기회가 없는 까닭입니다

나는 꽃을  사랑합니다마는 그대의 집에  피어 있는 꽃을 꺾을 수는 없습니다

그대의 집에 피어 있는 꽃을 꺾으려면 나의 창자가 먼저 꺾여지는 까닭입니다

나는 꽃을 사랑합니다마는 그대의 집에 꽃을 심을 수는 없습니다

그대의 집에 꽃을 심으려면 나의 가슴에 가시가 먼저 심어지는 까닭입니다


용서하셔요 논개여 금석(金石)같은 굳은 언약을 저버린 것은 그대가 아니요 나입니다

용서하셔요 논개여 쓸쓸하고 호젓한 잠자리에 외로이 누워서 끼친 한(恨)에 울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니오 그대입니다

나의 가슴에 '사랑'의 글자를 황금으로 새겨서 그대의 사당(祠堂)에 기념비를 세운들 그대에게 무슨 위로가 되오리까

나의 노래에 '눈물'의 곡조를 낙인으로 찍어서 그대의 사당에 제종(祭鐘)을 울린대도 나에게 무슨 속죄가 되오리까

나는 다만 그대의 유언대로 그대에게 다하지 못한 사랑을 영원히 다른 여자에게 주지 아니할 뿐입니다 그것은 그대의 얼굴과 같이 잊을 수가 없는 맹세입니다

용서하여요 논개여 그대가 용서하면 나의 죄는 신에게 참회를 아니한대도 사라지겠습니다


천추(千秋)에 죽지 않는 논개여

하루도 살 수 없는 논개여

그대를 사랑하는 나의 마음이 얼마나 즐거우며 얼마나 슬프겠는가

나는 웃음이 겨워서 눈물이 되고 눈물이 겨워서 웃음이 됩니다

용서하여요 사랑하는 오오 논개여

-한용운 <논개(論介)의 애인(愛人)이 되어 그의 묘(廟)에> 전문


  만해의 위 시를 읽으면서 “만해와 진주”라는 풀리지 않는 등식 하나가 자꾸 걸렸다. 그 해답은 진주 인근의 사천 ‘다솔사’에서 풀렸다. 다솔사는 독립결사체 ‘만당(卍黨)’의 경남지역 본부였다. 만당은 만해 한용운 선생을 당수로 1930년 5월 조직되어 1933년 4월 해산되기까지 약 3년 간 항일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불교 단체다.

 

  1973년 간행된 ‘한용운 전집(신구문화사·총6권)’에 실렸던 사진 한 장이 언론에 알려진 적이 있다. 이 사진이 다솔사에서 촬영한 것이고 보면 만당과 다솔사와는 매우 밀접한 관계임을 확인시켜준다. 만당의 핵심들인 최범술, 김법린, 허영호, 김상호, 강유문이 함께 했다. 만당은 ‘목숨 걸고 비밀을 지키고(密限死嚴守), 당의 뜻에 절대 복종한다(黨議絶對服從)’는 서약을 받아 결성된 조직이므로 기록은 물론 선언이나 강령도 ‘암송(暗誦)’으로 전수했던 결사 단체였다. 그래서 조직의 기구나 명단, 구체적 활동 등도 거의 알려진 바 없다.

 

  이 사진은 만해와 진주와의 관계를 연결시켜주는 귀중한 자료다. 만해가 그토록 간절히 불렀던 ‘그대’ 논개의 시는 다솔사에 왔다가 이곳 진주에 머물며 쓰여 졌던 것이다. 굳이 시 창작이 어떤 장소와 연관을 맺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이 시는 유독 빈집을 찾은 시인의 심사를 전해주므로 의기사와의 연관은 당연해 보인다. 

 

  이 시에서 논개 묘는 사실적인 표현이 아니라 상징으로 차용된 것이다. 의기사 사당 앞에서 “나는 그대도 없는 빈 무덤 같은 집을 그대의 집이라고” 노래한다. 이름만으로 임을 부르기엔 부족하고 집도 없으면 부를 기회조차 없기에 이 사당을 나는 논개의 묘라고 부르겠다는 것이다.

 

  원래 논개의 묘는 없다. 그저 함양에 가묘가 있을 뿐이다. 장수군의 ‘의암사적보존회’에서 십 수 년 동안 문헌과 구전, 탐문 조사하여 묘를 찾아낸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학계의 다른 한편에선 크게 신빙성은 없다고 말한다.

 

  1996년 1월 ‘경성대학교 향토문화연구회’에서 펴낸 『論介 事蹟의 歷史的 意味』에 강대민 교수가 쓴 <논개의 생애와 의미>편에 논개 무덤에 대한 연구가 실려 있다. 그는 일단 논개의 성이 주씨라 가정하고 함양의 성씨를 찾아들어 간다. 주씨는 조선후기 함양지역의 유력한 문중이었고, 논개의 외가가 함양군 서하면에 있었으므로 논개의 묘를 함양에 마련한 이유 중 하나라고 적고 있다.

 

  하지만 이것 역시 수긍하긴 쉽지 않다. 이 부분에서 강대민 교수도 명확한 견해를 밝히지 못한다. <진주시사>를 비롯한 여러 곳에 나타나는 신안 주씨 양반가문이란 기록에 대해 회의적 견해를 보이다가 당시 족보의 부정확성을 얘기하면서 굳이 부정할 필요는 없다고 다소 애매하게 적고 있다.  

 

  전북 장수군은 논개의 복원사업을 위해 저만큼 성큼 걸어가고 있다. 큰 예산을 들여 논개 유적지를 조성하여 관광객을 끌어들이고 있다. 본래 생가가 있었다고 주장하는 주촌 마을이 저수지로 바뀌면서 좀 더 상류로 옮겨 유적지를 조성하였다. 이곳엔 생가를 비롯해 논개 동상과 사적불망비각, 논개 유허비, 논개 부친 묘소 등을 조성해 놓았다.

 

  박노정 시인은 이 부분에서 목소리를 높인다. 정확한 고증 후에 사업을 벌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장수군의 이런 근거는 어디에서 왔으며 다른 한편의 문제제기의 원인은 무엇일까.

 

  ‘지식산업사’에서 펴낸 경상대학교 김수업 교수의 저서 『논개』를 보면 아주 상세히 이 부분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약간 요약해 보자. 처음 조정에서 논개의 자손을 찾으라고 했지만 자손이 없다고 보고를 올렸다. 많은 세월이 흐른 후인 1750년 사당을 세우라는 어명이 있었고, 다시 10년 후에 최경희 장군의 천첩이란 기록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의정부 좌참찬이던 권적이 임금께 시장을 쓰면서 최경희 장군의 천첩인 논개의 죽음과 의암에 대해 기술하였고 임금은 최경희에게 충의(忠毅)라는 시호를 내려 보낸다. 권적은 최경희와 중형, 아들, 조카가 모두 의병으로 싸운 것은 물론 천첩인 논개의 죽음까지도 함께 적었다. 최경희의 손자 급(汲)이 집안에 갈무리 해 오던 행장을 갖다 주었는데, 거기에 천첩으로 표기되어 있었으므로 적었다고 되어있다.

 

  이후 호남의 선비들이 엮은 <호남절의록>(정조 23년.1700년)에 논개와 최경희의 관계를 <충의공최일휴당사실(忠毅公崔日休堂事實)이란 제목으로 적었는데, 뒷부분에 “기녀 논개는 장수사람인데 공이 좋아했으므로 공을 따라 진주에 들어갔다. 진주성이 떨어지자 몸단장을 곱게 하고 적장 둘을 유인해 남강의 바위 위에서 두 왜적을 껴안고 강에 떨어져 죽었다. 뒤에 사람들이 그 바위에 ‘의암’이란 글자를 새기고 비석을 세웠다.” 라고 쓰여 있다. 김수업 교수는 이를 토대로 역사를 거슬러 가보면 연대적으로 두 사람 인연의 끈이 닿기 힘들다고 기술하고 있다.

 

  즉, 최경희가 장수 현감 시절에 논개와 연을 맺었다면 논개의 나이 서른 중반 즈음으로 당시로서는 퇴기에 가까운 나이고, 계사년에 순국했다면 네댓 살짜리 코흘리개일 수밖에 없다. 이런 정황을 종합해 보면 장수현감 때 성년의 논개와 연을 맺기엔 불가능하다. 전혀 연대가 다른 위 글을 따라 고향 장수 운운 하는 것은 신빙성이 없다고 단언한다.

 

  논개와 최경희가 연을 맺었다면 진주성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논개의 고향이 어디든 간에 진주 관기로 있을 때 경상우병사로 진주에 온 최경희와 연을 맺었고, 최경희가 순국하면서 관복을 거두어 고향에 간 종복이 논개의 순국을 전했을 수 있다. 그렇게 해서 집안에 내려오던 자료를 현손 급(汲)이 시장을 쓰려는 권적에게 보여 주었고, ‘호남절의록’에는 권적이 쓴 시장을 바탕으로 최경희와 논개의 장수에서의 연을 적은 것이 아닌가 보고 있다.

 

  김수업 교수의 이런 견해와는 달리 경성대의 강대민 교수는 논개의 자손이 나타나지 않은 것은 출생지와 사망지가 달랐고, 장수는 경상우병마사의 관할지가 아니었던 탓으로 보고 있다. 또한 최경희와 논개와의 인연도 견해를 달리 한다. 최경희가 장수 현감 시절 논개 가문의 송사를 해결해 준적이 있었는데, 훗날 논개 가문의 쇠락으로 기생이 되어 진주에 가 있었고, 거기서 다시 만났을 것으로 맺음말 부분에 적고 있다.

 

  옛일이야 전해들은 이가 있을 뿐, 직접 본 사람은 없다. 그러므로 장수군 사람들은 옛 문헌의 기록에 따를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말한다. 비록 완전치 못한 구전을 거쳐 채록된 것일지라도 기록된 사실에 의거하여 열심히 충절의 혼 논개를 기리는 사업을 계속하겠다는 것이다. 

 

    1990년대 들어와 의기사 논개 영정 폐출운동이 시작되었다. 그 시작의 본말은 의외의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1983년 음력 6월 29일 ‘제 11회 한일군관민합동진혼제’라는 이름으로 치러진 행사에서 제주노릇을 한 일본인 우에쓰카 히쿠유는 이상한 제문을 읽는다. 내용인즉, 진주성 싸움에 선봉장으로 분투한 케야무라 로쿠스께(毛谷村六助)가 논개에 의해 남강에 빠졌는데 그 무상함이 바로 인과정토이니 가슴을 친다. 원한을 원한으로 갚지 말고 불교의 대승적 가르침에 따라 승화시키자고 하였다.

 

  게야무라를 흠모한다는 그는 해괴망측한 일을 벌였는데, 게야무라와 논개의 영혼결혼식을 올리자는 것이 그것이다. 히코산 기슭의 자기 땅에 ‘보수원’이란 사당을 짓고 거기에 논개와 게야무라를 함께 모시기로 계획을 세운다. 이에 감복한 진주의 몇몇 인사들이 논개영혼의 환송식을 열어주었고, 의기사에 걸려 있는 영정과 똑 같은 모습을 그린 그림을 가져가게 된다.

 

  계사년 의암에서 죽은 왜장이 누구였는지에 대한 당시의 기록은 없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가 게야무라 로쿠스케란 이름으로 기억하고 있을까. 그것은 바로 월탄 박종화가 소설 <논개와 계월향>에서 모곡촌육조(毛谷村六助)라 이름 하였고, 이에 따라 여러 문인들은 물론 진단학회의 <한국사>,이홍직의 <국사대사전>, 진주시가 편찬한 <진주시사> 등에 까지 실리게 된 때문이다.

 

  겉으론 양국 간의 화해를 말하면서 속으론 의기 논개를 능멸하는 처사에 부하뇌동 한 몇 몇 진주 시민이 있어 이참에 친일화가 김은호의 그림을 폐출하자는 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여기서 박노정 시인은 숨을 고른다.

 

   “의기사는 사당이다. 문학관이나 음악관 같은 기념관이 아니다. 선열 논개에게 제사 지내고 참배하는 곳이다. 그러므로 이곳에 친일화가가 그린, 그것도 전혀 고증하지 않고 자신의 기법대로 그린 미인도를 영정이라 할 수 없다. 현재 다시 그린 그림이 표준영정으로 결정되어 만시지탄의 감이 있다.”   

 

  우리는 진주성에서 내려와 한때 진주의 명물이었던 장어구이집에 앉았다. 예전부터 이곳에 오면 진주비빔밥이냐 생김치백반이냐 에나 장어구이냐를 놓고 티격태격하곤 했다. 언제부터 남강변에 장어집이 들어서기 시작했는지는 몰라도 내 기억엔 민물장어를 처음 시작하였고 밖에 화덕을 들어내고 연탄 구이를 한 것 같다. 양념 바른 장어 익는 냄새가 진동하곤 했다. 이후 바다장어가 보편화되면서 지금은 바다장어를 더 많이 팔고 있다. 창밖을 본다. 강물은 늘 한결같다.     


晋陽城外 水東流를

왜 南江으로 이름했을까

아무도 모른다.


언제 어드메서 처음되었는지

너 江줄기의 족보를 아무도 모른다.


멍든 선지피로 흘렸던 짓밟힌 淸江의 젖가슴에

말없이 남아 있는 돌 하나-

그 黙語를 아무도 모른다.


둥근 달과 뭇 별을 눈망울에 담고도

차라리 여울마다 목메이는 서러움을

아무도 모른다.


天地 報君 三裝士로 읊조렸던

왕이란 것 따로 없는 만백성의 나라-

歷史란 얼굴을 비춰주는 푸른 거울임을 아무도 모른다.


-설창수 <남강가에서> 전문


  파성은 우국충정을 노래한 시들이 많다. 서정과 서경을 노래하다가도 대부분 애국적 정조로 귀결된다. 그러나 이 시는 일정부분 그런 빛깔을 띠고 있지만 역사의 보편성에 무게를 실으며 결말을 짓는다. 남강이라고 이름붙인 이유야 옛 문헌을 찾아보면 모를 리 없지만 굳이 강의 족보를 찾아볼 이유도 없다. 남강가에서 피고 진 수 많은 애사와 그 역사 속에서 묻혀간 민초들의 이름이야 달과 별이 불러 줄 것이므로 강물은 그저 부지런히 흐르기만 하면 된다.

 

 목숨이란 어버이와 천지간의 것이거늘 어찌 한갓 수직의 상부인 왕만의 것이던가. 백성 없는 나라가 없으므로 따지고 보면 백성이 바로 왕이다. 죽음으로 지켜내고자 한 것은 이 땅에 나고 살았다는 숙명과 원죄 때문이었다. 역사는 바로 거울이다. 형극의 생을 남의 탓으로 미루지 말고 그 거울을 비춰서 자신을 돌아보라고 말한다. 남강에 비치는 구름과 빗방울들, 세월의 그림자는 모두 나의 스승임을 가르쳐 준다.

 

  진주성 건너편에 파성 선생의 흉상이 있다. 남강변을 정비하면서 가꿔놓은 잔디 언덕 위다. 2001년 10월 3일 문화예술인들의 뜻을 담아 재단법인 진주문화예술재단에서 세웠다. 글씨는 정도준 씨가 쓰고 조각은 박찬걸 씨가 했다. 생전의 휘어진 장발의 곱슬머리와 부리부리한 눈매가 잘 살아나 있다. 금시라도 굵은 목에서 우렁우렁 터져 나오던 다변의 목소리가 들려올 듯하다.


내가 쏜 화살은

어디만치 가는고


구름 날고 바람 부는

저 언덕 고개 너머


오늘도 

겨냥판 거리가 멀다.


-이경순 <저 언덕> 전문



  남강다리를 내려와 촉석루 쪽으로 조금만 가면 동기(東騎) 이경순(李敬純)의 시비가 있다.  비문에는 “1905년에 나서 1985년에 가다. 돈키호테를 닮고자 아호를 東騎라 하다. 고고한 학처럼 행맑은 모습으로 저항하며 살아온 청빈한 삶. 이명길 짓고 김형한 글 쓰다.”라고 비를 세운 의미가 새겨져 있다.

  위시는 원래 1967년 3월 25일자 <경남일보)에 실은 3행시를 1970년 『마산문학』에 발표하면서 내용과 제목을 개작한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경남일보에 발표한 작품을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내가 쏜 화살은

어디만치 가는고

겨냥판이 거리를 넘었다.


-<射程> 전문


  지향 없는 삶의 허무가 드러난다. 힘껏 활을 당겨보지만 과녁은 늘 더 먼 곳에 있다. 나를 떠난 화살은 허공을 헤맨다. “저 언덕”은 한 번도 닿지 못한 시인의 이상이다.

  비문에 새긴 바대로 동기(東騎)란 호는 돈키호테를 닮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자신이 지었다고 한다. 돈키호테의 제 멋대로의 행동을 닮으려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의지를 실천하겠다는 것이다.

 

  강희근 시인께서는 한국 아나키즘사를 거론할 때 반드시 거명되어야 할 중요 인물이라고 했다. 위로부터의 권력이나 지배를 부정하고 절대적 자유를 누리며 생을 살겠다는 아니키스트 적인 열망이 동기란 호를 갖게 하였다면 그의 생은 성공한 것이다.

 

  『동기 이경순 전집』에 이월수 시인이 쓴 <향토 文壇에 바친 孤高한 詩心>한 페이지를 참고해 본다. 동기 선생은 1905년 진양군 오석면 외율리에서 나서 동경 正則 영어학교에서 1년 수학하고 主計상업학교에 진학하였으나 포기하고 만다. 일제 저항운동으로 무정부주의 운동단체인 흑우회에 가담하여 활동하다가 귀국하여 정태성(흑우연맹 회원), 시인 홍두표(동경농업대학 재학)와 진양군 문산 청곡사에 체류하며 독립운동과 아나키즘 연구에 정진했다. 이에 진주경찰서에 검거되어 5개월간 수감, 대구로 이감되었다가 풀려난다. 다시 동경경북 치과대학 전문학교에 2년간 수학하였다가 진주로 돌아와 진주농림학교 교사생활을 하다 1948년 경향신문에 <盞 >을 발표하여 문단에 데뷔하였다.

 

  그의 족적을 대략 일별해 보면 시대가 그렇듯 파란만장하고, 교유한 인물들의 폭도 넓었다. 경남의 인사들은 물론 구상, 조연현, 정비석, 김동리, 이헌구, 모윤숙, 이봉구, 이병주, 이탄, 김정한, 박화성, 박기원, 이주홍, 문덕수, 이원수, 윤재근, 박종화, 김요섭 등등 그 면면을 다 헤일 수 없다. 선생의 기행과 행적 또한 너무 많지만 시 한 편을 읽으며 다음을 기약한다. 


개미는 흙덩이 속에다, 햇빛을 실어나르고

人間 種類는 땅 아래 층계에서 공중을 폭발시킨다.


萬里長城에 서서, 세계는 성을 헐어야 한다더니

책상을 앞에 놓고 갈라진 地圖를 흥정함은,


東이 돌아가고 西가 무너지고

南이 흔들리고 北이 외치고


세월도 가다고 멈추는 변두리에 앉아

감기로 이마를 흐르는 땀방울이

어릴 적 냇물에 멱감던 追憶을 적신다.


열풍이 분다.

無常의 깃발이 번득인다.


-이경순<熱風>전문


  <熱風>은 내가 읽은 동기 선생의 작품 중에서 가장 아나키스트적 면모가 잘 드러나는 시다. 첫 연에선 개미와 인간을 대비시킨다. “人間 種類”는 굳이 흑․백․황을 가리기 전에 인간 속성, 즉 태생적으로 무한한 욕망의 덩어리로 태어났음을 암시한다. 개미는 삶을 위해 햇빛과 일용할 양식을 실어 나르지만 인간은 만물과 세상을 폭파시킬 궁리를 한다. ‘땅 아래 층계’는 보이지 않는 곳, 혹은 은밀한 음모 등으로 해석할 수 있다. 겉으론 이데올로기의 혁파를 위해 국가 간 장벽, 사람 사이의 벽마저도 헐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영토를 빼앗기 위해 지도를 흥정한다. 이를 치유할 묘약은 “어릴 적 냇물에 멱감던 追憶”, 바로 순진무구한 동심뿐이라고 노래한다. “無常의 깃발” 같은 표현은 다른 시인이 쓰면 너무나 생경한 언어가 된다. 하지만 이 시인이 쓰면 그다지 낯설지 않다. 허무(虛無)와 무상(無常)은 이 시인이 늘 걸치고 다니던 옷처럼 친근하기 때문이다.

 

  진주성 앞에 세워둔 차로 돌아오면서 다시 변영로의 시에 눈길을 준다. 늘 예사로 보았던 후렴구가 눈에 들어온다. 그래서일까. 이 시는 노래로도 불려진다. 남궁옥분이 불렀던 노래는 크게 히트하지는 못했지만 포크송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제법 불리어 진다.

 

  내겐 늘 “논개!” 하면 흥얼거려지는 노래 하나가 있다. 나의 중학시절 유명한 음악운동가이며 작곡가였던 전석환씨가 이끄는 “고운노래부르기운동” 모임이 전국에 걸쳐 있었다. 이 모임은 비애 일변도의 정조를 탈피하고 좀 더 밝고 진취적인 노래를 부르자는 운동성을 띠고 있었다. 나도 간혹 이 모임에 참석하곤 했는데, 마산 지역의 지도교사가 제일여자고등학교에 재임하셨던 이종은 선생님이었다. 학예회 때 논개를 연극으로 올렸는데, 그 주제음악을 작곡하였으므로 들려준다고 했다. 그때 ‘논개’라는 시를 처음 접했다. 나는 이 노래를 지금껏 흥얼거리고 있는데 아무도 그 노래를 아는 사람이 없다. 작곡자는 미국에 계신다고 하니 연락이 닿지 않아 그때 주요 참석자였던 지역 작곡가 김화석님께 부탁하여 채보한 악보를 함께 싣는다.  

 

  국토의 어딘들 시적 성소 아닌 곳이 있으랴만 이런 사연 간직한 진주성과 촉석루, 논개의 푸른 절의야 말로 단언컨대 진정한 시인들의 성소라 할만하다. '남진주 북평양'이라는 말은 곧 이곳이 남부 정경 문화의 중심이었음을 말해준다. 진주교방청이 중심이 된 '교방(敎坊) 문화'는 소문이 짜아했다. 진주검무, 한량무 등이 지금껏 전수되고 있고, 각종 연회에 동원된 교방청의 음식들이 민간에도 파급되었다. 자연히 전국의 이름 있는 선비나 시인묵객들은 빈번히 이곳을 내왕 하였고, 그들로 인해 남강과 논개의 충절은 시대를 초월하여 많은 글을 낳게 한 배경이 된다.

 

  대표적인 한시들로는 정식(鄭栻)의 (義巖), 이지연(李止淵)의 의기사(義妓祠), 황현(黃玹)의 의기논개비(義妓論介碑), 김택영(金澤榮)의 의기가(義妓歌), 박치복(朴致馥)의 논개암(論介巖), 안종창(安鍾彰)의 의기암(論介巖), 김창숙(金昌淑)의 의기암(義妓巖), 산홍(山紅)의 의기사감음(義妓祠感吟) 등이 있다. 이중 절명시(絶命詩)로 유명한 매천(梅泉) 황현도 논개를 장수 풍천 사람으로 생각하고 시를 지었으니 문헌에 남긴 한 줄 글의 영향이 이리 클 줄이야. 아울러 잡문이라고 이리저리 써대는 나의 글도 두렵기만 하다. 진주 기생 산홍은 나라를 팔아먹은 역적이 수청을 요구하자, 큰 소리로 꾸짖고는 밖에 나가 자결하였으니 세월을 한참 거슬러 의기 논개의 길을 따라간 것이다.

 

  세월처럼 강물도 과거에서 미래로 간다. 오늘도 진주성 돌아가는 남강엔 불멸의 노래가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