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산 합포성지(合浦城址)를 아시나요?
합포성지(合浦城址)(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53호)
이 달 균
마산 토박이 몇 명에게 물었다. “합성동에 있는 옛 성터를 아느냐?”고. 대부분 “모른다.”였다. 하긴 주택가 한 복판에 있고, 규모도 크지 않으니 당연한지도 모른다. 바로 찾아가 보자. 이름은 합포성지(合浦城址)다.
이곳을 찾으려면 먼저 제2금강산 가는 길을 물어야 한다. 합성동 주택가에서 그 길을 들다가 주위를 살펴보면 한 100년은 됨직한 은행나무 한 그루가 보인다면 그곳이 바로 합포성지가 있는 곳이다.
다가가보면 책책이 둘러쳐져 있고, ‘성터주차장’이란 표지판이 보이고 그 앞에 돌로 쌓은 80미터 정도의 성이 보인다. 물론 그 주차장은 성지를 찾아오는 이들을 위한 배려가 아니라, 개인이 운영하는 주차장이다.
이 성지는 고려 우왕4년(1378) 9월 부터 11월 까지 3개월에 걸쳐 부원수 배극렴이 군사를 동원해 돌로 쌓은 것이다. 배극렴은 이성계 휘하에서 조선건국에 주동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위화도회군에 참여하여 구세력 제거에 참여한 뒤, 이듬해 판개성부사를 거쳐 문하찬성사에 올랐고, 조선 건국 후 개국공신 일등으로 성산백(星山伯)에 봉해졌으며, 문하좌시중에 올랐다. 이런 유명한 역사 속 인물이 이 성을 쌓았다니, 당시 왜구 소탕을 위한 준비가 얼마나 철저했는지 알 수 있다.
표지판을 더 읽어보면 세종 8년(1426)에 좌우도병영이 합쳐지면서 경상도 병영성이 되었다가 세종 2년(1430)에 고쳐지었고, 세종 19년(1437)에 다시 분리된 후 선조 16년(1583)에 진주로 우도병영을 옮긴 후로는 합포진으로 사용된 것 같다고 기록되어 있다.
성의 규모는 둘레가 4,291척, 높이 15척, 폭 10척 7촌 이었고 동에 원인문, 남에 회례문, 서에 회 의문, 북에 용지문이 있었으며 성안에는 의만창, 회영고 등의 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성밖에는 호 를 파고 조교를 설치하였다.
현재는 북문지 주변에 80m 정도의 성벽과 1개의 치지 흔적이 남아있다. 이 성의 성벽에 외벽 하단 의 기초석을 밖으로 내어 쌓은 점과 내벽을 계단 모양으로 위로 좁혀 쌓은 점은 조선 전기 축성법의 특징이란다.
당시 성의 높이는 15척, 폭 6척 7촌, 둘레가 4천 291척이나 되었으며 성곽에는 2척 간격으로 치비가 있고 창검과 기치를 세우고 파수병이 주야로 감시하여 그 위용을 과시했다고 한다.
뒤편 주차장에서 바라보면 계단이 보이는데, 당시 정교하게 쌓은 성의 모습이 잘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