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균의 평론

서우승 시인과의 산상대담(山上對談) - 시조월드 15호(2007.하반기)

이달균 2011. 8. 17. 17:55

벌써 서우승 시인께서 타계하신지 3년이 지났다.

그 낮술의 두주불사가 그립지만 사람들에겐 벌써 잊혀져 간다.

이 글은 선생의 생존당시 반연간 시조월드 15호(2007.하반기) 에

커버스토리로 다룬 내용이다.

통영 달아공원에서 대담하였다. 

 

 

문득 외로운 날이면 서우승 시인과 마주 앉아라

-서우승 시인과의 산상대담(山上對談)

대담집필: 이달균(시인)


  서우승 시인과 산정의 그늘에 앉았다. 통영의 자랑인 달아공원에서다. 지리산 천왕봉쯤이라면 모를까 산상대담(山上對談)이란 이름을 붙이긴 뭣하지만, 그래도 낮은 야산도 산이므로 이렇게 이름 붙여 보았다.

  필자와는 벌써 한 25년 정도의 인연이 있고, 여러 차례 술자리를 함께 한 적도 있다. 소탈하고 정 많고 왠지 제도적 헤게모니와는 거리가 있어 보여 무척 친근했던 첫인상은 세월이 한참 흐른 지금까지도 변함없다.

  1982년, 나는 하릴없이 동인활동에 골몰하고 있었고, 심심한 날엔 갤러리에 나가 그림구경을 하곤 했다. 당시 ‘간이역’의 시인 박재호 선생께서 경영하던 해조문화사는 마산 남성동의 동서화랑 건물 2층에 있었다. 3층 화랑에서 나오다 박재호 선생께 인사나 하려고 출판사에 들렀는데 중년 신사 한 분이 앉아 있었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그분이 바로 서우승 선생이었다. 「카메라 탐방」 시집을 내기 위해 원고 뭉치를 들고 온 것이었다. 그 전부터 ‘카메라 탐방’ 연작에 대해서는 무척 많은 관심을 갖고 있던 터였지만 생면 부지한 관계로 그때 인사를 드리지 못하고 헤어진 것이 첫 만남이었다.

  통영은 내가 평소 놀러가기 좋아하는 도시고 벗도 여럿 있으므로 간혹 선생을 뵙고 오곤 한다. 해산물을 전문으로 하는 선술집이며 직장 근방의 밥집에서도 더러 만나기도 했다. 시조에 대해, 근래 한국문단의 흐름에 대해, 혹은 마땅찮은 시류에 대해 그리고 늘 실천한다는 건강법에 대해서도 말씀을 쏟아내기도 한다.

  그러나 아직도 필자는 모르는 게 많다. 그가 추구하는 필생의 문학과 인생에 대해. 마침 『시조월드』가 이런 자리를 마련해 주어서 마음먹고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이달균:  일 년 만에 달아공원에 왔습니다. 장마가 그친 바다는 해무로 가득합니다. 조금 궁금했던 것부터 하나 질문하겠습니다. 선생님은 진정한 통영 토박이입니다. 한국의 나폴리로 불리는 아름다운 도시지만 솔직히 남도의 작은 도시입니다. 답답하거나 떠나고 싶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는지 궁금합니다.


-서우승:  군복무 3년, 마산에서의 직장생활 1년, 해외취업 실패로 인해 타관을 전전한 2년 정도를 제외하면 통영에서 거의 전 삶을 살았고, 앞으로도 살 것이므로 나의 생애와 통영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곳이고, 다시 태어나도 선택하고 싶은 고향 또한 통영입니다. 아마 바다가 없는 곳에 산다면 향수에 너무 시달릴 것 같습니다. 비록 변방이지만 이곳은 192개의 섬들을 안고 있는 한려해상국립공원의 심장부입니다. 또한 어릴 적부터 먹어온 해산물을 못 먹는다고 생각하면 아찔해 집니다. 문화 예술 도시라는 자긍심도 단단히 한 몫을 합니다. 알다시피 최고의 예인들이  가장 많이 배출된 곳이고, 다양한 전통문화의 기능과 예능을 대물림해 오고 있는 전통문화의 본고장이 아닙니까. 또한 이순신 장군의 얼이 깃들어 있으며 3백년 통제영 문화를 꽃피웠던 군항이었음을 떠올려 보면 변방이 아니라 문화의 중심 도시에 산다는 긍지가 있습니다.



이달균:  통영 사랑이 대단한 줄은 진작 알고 있었습니다만 실은 선생님의 그 사랑에 비해 정작 통영에 관한 작품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그중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은 어떤 것이 있는지요? 


-서우승:  그 보다 먼저 다른 분들의 통영예찬 글을 말해 보겠습니다. 우선 통영출신 유병근의 시조 ‘통영회포’에 나오는 “물빛만 얼른 보아도 여기 통영 아닌가” 하는 구절을 좋아합니다. 통영의 이미지를 함축하고 있다고 봅니다. 외해는 거친 파도가 있지만 내해는 호수 같은 바다입니다. 이 바다를 안고 있는 통영은 벅수를 만들어 땅에 꽂아도 금세 미학적 감성이 피돌림 할 듯 도처에 신명이 넘쳐납니다. 통영을 소재로 한 소설로 통영출신 박경리의 「김약국의 딸들」과 황순원의 「잃어버린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몇 번이고 읽어본 것들입니다.

  저의 작품 중 직접적으로 통영을 노래한 것은 몇 편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거의 모든 시에는 통영의 냄새와 무관한 것은 없습니다. 너무 소중하면 함부로 이름도 부를 수 없는 그 무엇과 같은 이치라고나 할까요?


이달균: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통영은 한국현대사입니다. 윤이상이 루이제 린저와 대담하면서 자신의 태몽을 말하면서 ‘상처받은 용’이 되리라고 예언하였습니다. 그것은 비단 윤이상의 경우만은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 글에서 통영을 가리켜 ‘상처받은 용들의 도시’라고 명명하기도 하였습니다. 시인 유치환, 김상옥, 김춘수, 소설가 박경리, 김용익, 연극인 유치진, 화가 김형근, 전혁림, 이한우 등등 기라성들의 예술적 고향입니다. 나중에 ‘통영문화인협회’의 탄생으로 이어져 인접 장르에 많은 영향들을 주고받아 성취를 이뤘다고 여겨집니다. 그렇다면 통영의 어떤 점이 이런 인물들을 동시대에 배출한 것일까요?


-서우승:   그 부분은 전문적인 연구가 필요한 부분입니다. 역사적 배경도 있고, 일본과 가까운 지리적 배경도 있을 겁니다. 또한 청정해역의 온갖 진귀한 해산물의 보고이므로 경제력과도 무관치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매우 중요한 것은 통영이 현대 시조와 밀접한 도시라는 것입니다. 일제 강점기 신문학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던 1926년 우리나라 시조동인지의 효시인 「참새」가 탄생된 곳입니다. 이어 그 이듬해 시동인지 「토성」과 1930년에 「소제부」, 1937년에 「생리」가 계속 발간되어 문학동인 시대를 엶으로서 문향의 싹을 틔워 나갔습니다. 이런 문학적 기반이 있는 도시임을 이 대담을 통해 강조하고 싶습니다.

  그 후 예향의 기반을 본격적으로 다져나간 시점은 해방직후 ‘통영문화협회’가 탄생되면서 부터가 아닐까 합니다. 각 장르에 걸쳐 구성된 회원들의 활약이 전개되는 가운데 풍광과 인물에 반해 비중 있는 경향의 문화예술인들이 대거 들렀고, 자연스레 중앙문화가 지방문화에 접목되면서 새로운 기층문화가 자리 잡게 된 것이지요. 구상, 정지용, 김수돈, 이경순 등이 통영을 거쳐 갔고, 이를 입증하는 글과 기행일화들이 남아 있습니다.

6.25때는 문인으로 황순원, 이은상, 연극인으로는 향토출신 유치진, 허석(남실), 화가로는 이중섭, 남관, 박고석, 장욱진, 이석우, 조각가로는 김경승, 공예예술가로는 유강렬 등이 피난 와 머물면서 통영 문화 전반에 걸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물론 이영도 선생이 통영에 잠시 사신 적도 있지요.

오늘날 윤이상, 김용익과 같은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이를 비롯하여 한국예술계를 주름잡는 걸출한 기라성들이 배출된 이면에는 개인의 치열한 장인정신과 노력이 있었지만 통영의 풍광, 지리, 역사, 기후, 물산 등 제반 환경이 예술혼의 자양분으로 작용했기에 가능했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하고 있습니다.


이달균:   『통영시지(市誌)』를 집필 하는 등 이곳 역사에 대해 해박한 줄은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만 오늘 자세한 내용을 들으니 통영 예술의 발전 과정이 잘 드러나 보입니다. 그러면 시조 동인 「참새」에 대해 좀 더 구체적인 언급이 필요하겠습니다. <참새>동인이었던 고두동, 탁상수 등과 초정 김상옥, 서우승으로 이어지는 연결고리는 이해가 가지만 현재 후학들이 그다지 많이 배출되지 않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통영 시조의 역사와 내일에 대해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서우승:   시조동인지 「참새」는 1926년 음력 8월에 등사판으로 창간호를 낸데 이어 9월에 제 2호, 10월에 제 3호, 그리고 신년증대호로 제 4호를 내고 중단되었습니다. 비록 단명 동인지이지만 그 의의는 크다고 하겠습니다. 창간호에는 114수 78편의 시조가 실렸는데, 단수가 52편, 연시조가 62수에 26편입니다. 제 2호는 고시조 2수와 동인 11명의 작품 88수 62편을 실었으며, 제 3호는 동인 12명의 작품 85수 55편을 실었습니다. 종간호인 제 4호는 고시조 2수를 필두로 시조 67편과 시조평론 1편, 그리고 가사 1편, 자유시 7편, 희곡 1편, 한시 9편 등 종합문예지 성격을 띠었습니다.

「참새」의 동인으로는 후일 한국시조단에 잘 알려진 탁상수, 고두동이 있고, 종합문예지로 변모한 제 4호에 얼굴을 내민 극작가 유치진, 시인 유치환 형제도 참여하였습니다.

  이런 역사에 비해 현재 통영의 시조는 맥이 끊길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물론 이 부분은 저의 덕이 부족하고 타고난 게으름으로 인한 소치가 아닌가 합니다.  몇 분의 시조인이 있지만 아직 선대의 성취를 잇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입니다. 타고난 문창성은 물론이지만 치열한 창작열과 삶의 경험을 조화시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경향의 우수한 시인들과 활발한 교류를 통해 동기부여를 하고, 선후배간 허심탄회한 토론을 갖다보면 새로운 시조인의 태동을 기대해 볼 수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이달균:   이제 선생님 개인의 문제로 화제를 돌려 보겠습니다. 아무래도 선생님의 이름 앞에 카메라 탐방」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70~80년대 격동기를 거치면서 한국문학은 일면 저항적 면모를 띄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시대의 요구이기도 했고 시인의 사명이기도 한 측면이 있었습니다. 이때 시조는 시대적 리얼리티를 담보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한국시단에서 보이지 않는 폄하를 당하게 됩니다. 너무 단선적인 시각이 빚은 문단의 오류가 아닌가 합니다. 연작시카메라 탐방」은 이런 오류를 불식시키는데 매우 중요한 시집입니다. 풍자와 해학을 통한 시대비판의 장을 연 촌철살인의 단수들이었는데, 이 작품들을 발표할 때 그와 연관된 사연들은 없었는지 궁금합니다.


-서우승:  1970년대 초·중반 군사정권 말기는 지식인의 수난시대였습니다. <카메라 탐방> 은 시조로서는 드물게 서정을 배제하고 현실을 비판하는 내용이 주조를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홍경래나 만적을 등장시켰으되 어디까지나 풍자와 해학을 주무기로 사용했기에 전문가의 시각이 아니면 그 메타포가 뜻하는 의도를 완전히 간파하진 못합니다. 다만 현미경을 들이대고 이현령 비현령식 해석을 한다면 다분히 위험부담이 많은 작품들이었습니다. 다행히 지방에 묻혀 살다보니 조명을 거의 받지 못한 데다 될대로 되라는 식의 자학적, 전투적 사고를 지니다 보니 겁 없이 덤비게 된 것입니다.

당시 야당국회의원의 보좌관이 낙향만 하면 술자리를 함께 했는데, 그가 상경하고 나면 좁은 지역에서 술자리마다 내 시조가 회자되었는데, “서우승이 시조는 현 정부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내용이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확산되기도 했습니다. 정작 시조가 무엇인지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습니다. 아마 지금 생각해보면 그걸 정치적으로 이용할 속셈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 보좌관이 다음에 왔을 때 입조심해 줄 것을 신신당부했는데, 그로부터 1년여 세월이 흘렀을까? 진주의 어느 문학행사장에 참가했는데, 선배문인이 나를 은밀히 불러내서는 “서형 조심해야겠습디다. 내 친구가 중앙정보부에 있는데 서형이 B급 리스트에 올라 있답니다.” 고 하였습니다. 순간 모골이 송연해져 오더군요. 그 곳 지하실에 끌려가면 어찌 된다는 건 익히 들어 알고 있는 터였기 때문입니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그날 들었던 말은 내 문학인생에 있어 매우 중요한 전환점을 가져다주었죠. 그 무렵 현실참여의 시에 조금씩 염증을 느끼고 있었으므로 시조의 본연, 즉 서정을 바탕으로 하는 삶의 노래를 쓰기로 단단히 결심을 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달균:   그렇다면 지금까지 쓴 선생님 작품의 경향은 어떻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서우승:   시인에게 이런 물음은 참 어렵고 곤란한 질문일 것입니다. 사람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저의 경우, 삶의 본질에 충실하면서 내 방식대로 당대적 고뇌에 동참하고자 줄기차게 노력해 왔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나아가 인류 공동의 화두인 생명과 환경문제, 그리고 우리 민족의 지상과제인 분단과 통일문제에 기여하고자 나름대로 애써 왔다고 생각하지만, 역부족임을 절감합니다.


이달균:   불교적 색채가 강하게 풍기는 작품이 많습니다.


 -서우승:  독실한 불교신자는 아니지만, 대대로 불교를 신봉해온 집안이라 어릴 때부터 불교의식이 지배하고 있었다고 봅니다. 인과응보다 윤회이법이다 하는 심오한 불교사상을 접하고는 내 인생을 성찰하게 됩니다. 그저 절이 좋아 어느 한 암자를 정해두고 20여 년 전부터 혼자서 정기적으로 다니고 있습니다. 이 일이 내 안의 절도 가꾸는 일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불교적 안목에서 쓴 대표적인 작품으로 <빚갚기>, <연기설>, <심부름>, <귀뚜라미의 노래> 등 10여 편이 넘어 보입니다. 앞으로 시간을 내어 교리공부를 더 해 본격적인 불교작품을 써 볼 계획도 갖고 있습니다.


이달균:  비슷한 시기에 등단한 시인들은 나름대로의 경향을 갖고 있고, 괄목할 만한 성취를 이루었습니다. 선생님과 함께 이우걸, 유재영, 박시교, 김현, 김상묵, 임종찬 시인 등이 쉽게 떠오르는데, 아쉽게도 무대 뒤로 사라진 두 분이 있습니다. 정시운, 요절한 정운엽 시인이 생각나는데 이분들에 대한 추억이 있다면 말씀해 주시죠.

 

-서우승:  정시운 시인은 완전히 무대 뒤로 사라졌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언제 다시 한 묶음의 작품을 들고 무대 전면으로 등장할지는 알 수 없기 때문이죠. 대가의 자질을 가진 시인이므로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얘기이기 때문입니다. 꾸준히 문단활동을 하였다면 아마 개성적인 시세계를 갖지 않았을까 싶은데 아쉬움이 큽니다.

  또 한 분 정운엽 시인은 교통사고로 요절하였는데, 사고 전에 중앙일보에 보낸 작품(제목은 기억이 나지 않음)은 흡사 죽음을 예감하는 듯한 냄새를 가진 작품이었습니다. 유고작으로 지면에 발표되었는데 생전의 다른 작품보다도 뛰어난 것이어서 그때의 비감한 마음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달균:   사람들은 선생님을 가리켜 주석을 휘어잡는 매력이 있다고 합니다. 호방한 기질과 주량이 한 몫을 하지만 음률을 살리며 외우는 시편들이 많아서이기도 합니다. 언제부터 시를 외우기 시작했는지 궁금합니다.


-서우승:  조금 쑥스럽네요. 나의 시 외우기는 제법 입소문이 나 있습니다. 괜히 입바른 소리를 하여 주석을 긴장시키는 등 타고난 저항적 기질을 좀 더 문학적으로 승화시키기 위한 한 방안이기도 했습니다.

  거슬러 가보면 애초의 시 외우기는 어릴 적 시조카드놀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처음엔 고시조를 많이 외웠습니다. 이후로도 좋은 시나 시조를 외웠지만, 리듬을 살려 맛나게 외우기는 박재두 선생님을 뵙고 부터였습니다. 선생님의 작품은 죄다 암송하기를 즐겼는데, 낭송하는 자세 또한 선생님에게서 배웠죠. 절창 대목에 이르면 흡사 시조신(時調神)이 들린 분처럼 신명이 솟구쳐 올라 목구비가 심하게 끄떡여지고 음정은 높고 속도는 빨라지고 눈이 감기면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외우기에 흥이 나는 작품은 따로 있는 법입니다. 박재두 선생님의 작품 중에 ‘밤내 도란거리는 여울소리 흘러들어’로 시작되는 <물소리>는 낭송시로 제격이어서 지금도 뜻 맞는 문우들과 어울린 주석에선 시낭송의 단골메뉴가 되기도 합니다.


이달균:   객관적인 입장에서 시인 서우승의 초상화를 그려본다면 어떤 모습으로 그려질까요?


-서우승:   글쎄요. 우선 글 농사짓는 입장에서 보면 소출을 많이 못낸 농부지요. 등단 34년이 됐는데도 시집이 4권뿐이니 말입니다. 변명 같지만 변방에서 가난과 외로움을 벗하며 문필활동을 하자니 코밑이 급한데 글 쓸 여유가 어디 있었겠습니까.이력서를 내놓기가 부끄러울 정도로 학력이 없으니 내가 원하는 직장을 얻을 수도 없었지요. 농사도 짓고, 막노동도 하고.... 양심을 파는 일 외에는 닥치는 대로 해야만 호구를 이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 생활이 나를 글 쓰게 가만 두지 않았던 것이죠. 자연히 중앙 문인들과의 교류도 원만하지 못하고  문학적 자극도, 고급 정보도 얻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외적 요인보다는 목숨 걸고 작품 쓰지 못한 제 탓이 더 크겠죠. 이점 깊이 반성하고 있습니다. 요즘은 창작에 더 새록새록 욕심이 납니다. 어젠 밤을 새우며 3편을 얻기도 했는데 전혀 피곤하지가 않네요.


이달균:   마음이야 늘 청춘이지만 문단에선 이제 어느덧 중진에서 원로로 가는 칠부 능선을 넘고 있습니다. 우리 시조의 오늘과 내일에 대해 평소 느낌을 말해 주십시오.


-서우승:  그 부분에 대해서는 좀 말이 길어질 것 같습니다. 다소 격앙되더라도 제 목소리대로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시조가 우리 민족의 생리에 가장 알맞는 정형시로서, 오랜 역사와 더불어 아끼고 다듬어져 온 민족시라는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많지 않으리라 봅니다. 동양문화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한자문화가 중국에서 한국, 일본을 거치면서 나름대로 꽃을 피운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또한 이들 삼국이 각자 독특한 전통시가를 갖고 있음도 중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를테면 중국은 오언시와 칠언시를, 일본은 와카와 하이꾸를, 우리 민족도 시조라는 민족시가 있어 이를 통해 민족정신을 가다듬어 왔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와카는 국시로 대접받고 있는데 비해 우리의 시조는 홀대받고 있습니다. 이는 시조를 쓰는 한 사람으로서 못내 아쉽지만, 책임 또한 통감하면서 우리의 시조가 사랑받지 못하는 이유를 몇 가지 지적하고 싶습니다.

첫째, 많은 실험과 시행착오를 거쳐 고시조에서 탈바꿈한 현대시조의 실체는 정작 파악하려 들지 않고 전통이라는 이름의 옷을 걸치고 전해오는 모든 문화를 덮어놓고 유물시하는 일부 문단과 독자층의 고착된 시각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둘째, 이른바 다수의 시조인들이 아직도 옛 가락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이가 많다는 점입니다. 자수율은 물론이거니와 주제, 이미지, 시어에 이르기까지 시대성에 역행하는 케케묵은 고답적 냄새를 풍기고 있습니다. 옛날 선비가 전통적으로 즐겨 다루던 ‘매난국죽’이나 피세적인 요소만을 골라 소재로 삼기 때문에 가까스로 참신성을 획득하여 자리를 굳힌 현대시조마저 함께 매도되어 독자들은 시조라면 덮어놓고 식상해 하는 실정이 그것입니다.

셋째, 시조라는 그릇이 어느 소재라도 능히 소화해 낼 수 있는 기능을 지녔음에도 그 정형율의 답답함에 회의를 느낀 나머지 그만 자유시가 되게 한다는 점이다. 끊임없는 실험이란 시조의 장래를 위해 지극히 당연하고 또 그것이 자수상, 내용상의 혁신을 꾀함이라면 쌍수로 환영해야 할 일이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시조가 아닌 걸 시조라고 우길 수는 없습니다. 절장시조라는 이름아래 종장 하나만을 뎅그렇게 뽑아놓고 성공한 실험인 양 착각하는가 하면, 두 장만 내세워 양장시조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합니다. 자수만 해도 그렇습니다. 자수란 무턱대고 늘리고 줄이고 하는 게 아니라 언어의 리듬에 따라 호흡이 결정된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합니다.

앞으로 현대시조가 나아가는 데 있어 우선적인 과제는 자수변화의 시도도 중요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시조라는 민족시의 그릇에다 어떤 것을 담아야 새로운 시대에 응전할 수 있는가에 초점을 두어야 하리라 봅니다.


대담하는 사이에 어느덧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서서히 해무가 걷히고 있었다. 달아공원에서 바라보는 낙조는 아름답기 그지없다. 하지만 오늘은 놀을 보기가 쉽지 않겠다. 장마로 인한 습기 탓도 있고, 오랜만에 갠 서녘 하늘엔 구름도 없다. 아직 여름의 중심에 서지도 않았는데 바람은 가을의 냄새를 풍긴다. 아이스 바를 먹으며 공원을 걷기도 하고 정자에 앉기도 하면서 벌써 몇 시간을 보냈다. 

“이 시인, 이왕 통영에 왔으니 싱싱한 자연산 회 맛이라도 봐야 될 것 아이가. 이제 고만 자리를 옮기뿌자.”

 선생의 제안으로 용화사에서 멀지 않은 한 횟집에 앉았다. 단골인 듯 주인과는 스스럼없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회를 시키신다.

“펄떡펄떡 뛰는 놈으로 한 접시 주소. 그라고 소주하고 시원한 맥주부터 갖고 오소. 이 시인, 이집은 자연산 횟집인데 요새 어데 이만한 회 묵을 데가 있더노? 양식장 고기는 매운탕을 끓여보면 알지. 담백하지가 않으께네.”하시며 소주에 맥주를 타 한 잔 시원하게 비워내신다.


이달균:   통영 출신의 김상옥, 박재두 두 분 선생님은 이미 추모의 글을 통해 문학적 관계를 밝힌 바 있습니다. 이분들 외에도 가르침을 받았거나 영향을 받은 문인이 있다면 어떤 분들이 있는지요?


-서우승:   초정 선생님은 신춘문예에서 나를 뽑아주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숙명적 은인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여러 글에서 밝힌 바 있으므로 굳이 더 말하지 않겠습니다.

박재두 선생님은 나를 직접 가르친 유일한 스승입니다. 너무 일찍 생애를 완성하신 것이 못내 아쉽고 안타까울 뿐입니다. 청출어람을 도모함이 유일한 보은의 길이 아닐까 감히 생각해보곤 합니다.

이밖에도 책을 통해 마음의 스승으로 모신 분들도 많습니다. 거창하게 동서양 시인이나 옛 시인을 거론할 필요도 없이 시조시인 외에 미당 선생님을 비롯한 명망 높은 시인에서부터 갓 등단한 신출내기 시인에 이르기까지 작품만 좋다면 모두 마음속으로 스승으로 삼는다는 뜻입니다.

미당 선생님은 수년전 통영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두어 시간 주석을 함께 한 적이 있는데, 내 작품에 대해 극찬을 주신 기억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달균:   문학적 스승에 대한 말씀 잘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선생님의 문하에 둔 제자는 몇 명이나 되는지 궁금합니다.


-서우승:   교직생활을 한 분들은 가르친 학생 중 문인들이 배출되면 개인지도와는 상관없이 문인을 몇 명 길러냈다고 합니다. 그렇지 못한 문인들은 찾아오는 문청들에게 시간을 쪼개어 개인지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연로하지 않은 문인들은 전업문인이 드물기로 직장생활에서 틈을 내기란 여간 힘들지 않죠.  문청이 극성스럽게 보채면 밤 시간도 마다않고 내어 주어야 할 때가 있는데, 귀찮음은커녕 무슨 사명감 같은 것이 겹쳐져 오히려 즐겁기 까지 합니다.

이런 마음가짐으로 하나 둘 문청을 받아들인 것이 지금까지 6, 7명 쯤 되지만 여러 사연으로 소식이 끊겼고 내왕하는 이들은 둘 정도뿐입니다. 내 부덕의 소치이겠죠. 진작부터 시보다 인간됨됨이가 우선이라는 걸 가르치지 못한 게 후회스럽습니다. 그러나 더더욱 가관인 것은 어쩌다 지면에서 만나는 작품들이 아직 치졸의 수준에 머물고 있는데도 대가연하고 다닌다니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사고나 내지 않을까 불안하기까지 합니다.


 이달균:  소맥을 즐기시고...여전히 주량이 만만치 않아 보입니다. 두주를 불사하면서도 건강관리는 철저하다는데 비결은 무엇인지요?


-서우승:   새벽 산행과 목욕을 거르지 않고 합니다. 요즘 우리 예술인들도 유전적 결함이 없는 한 고령시대를 누릴 권리는 있습니다. 굴곡 많은 삶을 영위해 오면서도 건강만은 지키려 발버둥 쳐 왔습니다. 따지고 보면 인생이란 열차는 왕복이 없잖습니까. 이제 가슴으로가 아닌 머리로 쓰는, 즉 감성보다는 이성으로 창작에 임해 볼까 고민 중입니다. 이것도 건강관리의 일환이니까요. 술도 이제는 건강과 잘 어울릴 수 있는 ‘건강 맞춤 술’로 바꿔야겠다고 생각은 하지만, 글쎄....허허! 가능할지.


이달균:   중진에서 원로로 가는 길목에 서 계시지만 아직 왕성한 창작의 노정에 있습니다. 앞으로의 계획이나 바람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겠는지요?


서우승:   그 보다 내 창작 노하우 하나를 먼저 공개합니다. 동기가 없이는 발전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목표를 정하죠. 나보다 한 수 위의 시조시인을 은밀히 선의의 라이벌로 정해두고 상대가 모르게, 따라 잡기 위해 혼신을 다합니다. 따라잡았다 싶으면 또 한 수 위의 라이벌을 정하고.... (그동안 정한 라이벌들에 대해서는 재차 물었지만 그저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가장 우선한 바람은 1982년에 펴낸 첫 시조집 「카메라 탐방」은 내 방황의 세월에 종지부를 찍은 시점이긴 하지만, 생활이 가장 곤궁했던 시기에 펴낸 터라 후회가 많습니다. 세로로 편집된 점이나, 장정 등에 대한 불만도 불만이지만 무엇보다 작품에 대한 퇴고를 거쳐야 하는데, 급한 대로 신문·잡지에 게재된 원작 그대로를 싣고 말았습니다. 수년 뒤에 초정 선생님께서 한 말씀 주셨는데

“젊은 사람이 다양한 어휘를 알고 있다는 것은 놀랍고도 칭찬해 줄 일이지만, 곁에 있었다면 귀때기를 끌고 와 수정하고 싶은 구절도 없지 않았네.” 하고는 웃으셨지요. 해서 늦기 전에 연작 시조집 「카메라 탐방」수정판부터 내고 싶습니다.


이달균:  그렇군요. 아직 건강도 좋고 기억력도 여전합니다. 직장 일에서도 예전처럼 짬을 내기가 그다지 어렵지만은 않다고 하시니 이제 늦둥이를 낳는 심정으로 좋은 작품을 보여주셨으면 합니다. 장시간 동안 수고로움을 끼쳐드려서 죄송하고 허심탄회한 말씀 들려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산상대담에서 시작하여 횟집에서의 대화에 이르기까지 평소 나누지 못한 얘기들을 쏟아내었다. 제한된 지면 관계로 다 싣지 못한 사연들이 너무 많다. 데뷔시절부터 사귀었던 문우들과의 우여곡절, 먼저 간 벗들에 대한 회억도 빠지지 않았다. 시조로는 다 담을 수 없는 글맛 때문에 자유시도 쓴다는 고백 또한 신선한 것이었다.

 예술의 도시 통영에 서우승 시인이 산다. 풍류를 알고, 얄팍한 기교에 사로잡히지 않고, 할 말에 거침이 없는 우리 시대의 시인 서우승 선생과의 대담은 많은 것을 생각게 해 주었다. 남망산에 오르면 어진 미륵산도 보인다. 미륵산 능선이 가다 말고 비운 곳에 바다가 들어와 숨 쉬고 밀물이 차오르다 멎은 곳에 남망산 발목이 닿는다. 그래, 물처럼 차면 비워야 한다. 미륵산 아래 엎드린 예향 통영을 두고 오면서 선생의 시조 한 수를 외워보았다.

<가을은 청상(靑孀)을 위해 귀뚜라밀 불러놓고/또 누군 귀뚜라밀 위해 가을을 비우나 보아/내생엔 짝 될 사람아 너는 무얼 비우며 사나.(카메라 탐방. -필름 79) >

 

시조월드 15호(2007.하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