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균의 평론

박시교 시집 해설-바람집, 부재하는 존재들과의 교감

이달균 2011. 8. 17. 00:34

 

 

 

바람집, 부재하는 존재들과의 교감

 

                                                                                      이달균

 

 

1.생의 빈터에서 부르는 칼노래

 

 

 

친구여, 오늘 우리가 무엇을 노래하겠나

 

답답한 가슴으로 켜는 술잔의 무중력

 

그렇네, 산다는 것은 이름을 지우는 일.

 

애써 지워도 돋아나는 건 이미 별이라네

 

자네와 더불어 사는 어두운 땅 별이라네

 

꽃이면 어찌 이보다 더 아름답다 할 것인가

 

그러나 어깨에는 부릴 수 없는 무거운 한 짐

 

쉽게 부려서도 아니 될 우리들 형벌의 등짐

 

친구여, 오늘 우리가 무엇을 노래하겠나.

 

-<바람집 4>전문

 

 

박시교 시인의 시에선 바람 냄새가 난다. 산과 숲, 물의 뿌리에 까지 바람은 스민다. 바람의 뼈를 본 사람은 없지만 분명 그것에도 지조와 결이 있다. 부러지지 않으면서 올곧음이 있고 속으로 예각을 지녔지만 남에게 상처내지 않는다. 먼저 상처받고 갈등하면서 시는 더욱 웅숭깊어진다.

 

60편 가까운 시선집 원고들을 읽다가 이 시편들을 관통하는 핵심 시어가 무엇인지를 곰곰 생각했다. 그 결과 ‘바람집’이란 시어에 주목했다. 바람은 거처가 없다. 일고 자고 떠나는 현상들은 도처에서 일어나고 사라지기도 한다. 그러므로 바람에게 집은 존재하지 않는다. ‘바람집’은 모든 부재하는 것들이 충돌하고 융화하는 심상의 공간이다. 이 부재하는 존재들이 교감하는 것들은 시인의 삶과 긴밀한 연관성을 가진다. 마음이 육체에서 비롯되지만 제 육체에만 깃들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바람집’은 결국 떠도는 이미지들을 가두어 발아시키는 ‘마음집’에 다름 아니다. 불현듯 일어서는 심상들을 묶은 한 권의 시집은 그 자체로 한 채의 ‘바람집’인 셈이다.

 

위 시에서 시인은 ‘산다는 것은 이름을 지우는 일’이라 말한다. 하지만 지우는 일 또한 쉽지 않다. 욕망의 찌꺼기들을 버리고나면 텅 비어지겠지만, 쉽사리 버릴 수 없는 것들은 등짐처럼 무겁기만 하다. 가슴에 묻히어 지워지지 않는 이름들은 별이 된다. 불러내지 않아도 오고 떠나보내지 않아도 떠나가는 것이 어디 바람뿐이랴. 한 소절 노래도 불러주지 못했지만 오늘은 바람 들고 나는 누옥에 벗들을 초대한다. 이곳에서 만큼은 시인이 주인이다.

 

 

내 곁을 아주 떠난 친구여 자넬 위해

미처 한 소절 노래도 나는 장만치 못했구나

가슴을 그렁그렁케 하는 단지 그런 섭섭함뿐

 

 청진동 막소주집 자네 몫의 빈 잔에

 철철 넘치게 채워지는 한 잔 그리움의 바람

 아 바람, 미처 못다 부른 <청보리의 노래>여

 

-<바람집 2. -故 임홍재 시인에게> 전문

 

 

 

곧 보게 될 것이다

인사동이나 동숭동에서

 

이마에 깊은 강, 퍼런 시름의 강, 떨리는 손이 잡은 칼끝으로 어둠의 강 새겨넣고, 한무리 바지저고리들 신나게 춤추며 어울렸구나. 하나는 북채를 잡고 또 하나는 꽹과리, 네는 날나리를 불어라, 너는 어지럽도록 상모를 돌려라, 그깟 시름의 강이야 깊으라지, 가슴의 원(怨)이야 더더욱 깊으라지

 

 너 없는 수유리 숲에 음각(陰刻)으로 내리는 비

 

 -<바람집 5. 故 오윤 판화집 <칼노래>와 관련하여> 전문

 

 

 

시인은 자신이 지은 집에 홀로 앉아 고인이 된 임홍재 시인이며 판화가 오윤도 불러낸다. 그들에게 한 소절 만가도 불러주지 못했지만 그리움의 한잔 술을 건넨다. 살아서 함께 가난했지만 그들이 그려낸 사람들은 얼마나 순수했던가. 짧지만 질곡의 시대를 온몸으로 살다간 이들은 끝내 지워지지 않는 별이다. 그들을 가슴에서 지우는 일은 더 큰 형벌이다. 아니, 지우고 싶지 않은 다짐으로 철철 넘치는 술잔을 건넨다. 임홍재 시인에게는 따뜻이 술 한잔을 채워주고, 판화가 오윤에게는 신명난 풍물 한판으로 부활을 노래한다.

 

<바람집 5>의 중장 사설은 시인이 펼친 바람굿의 절정이다. 천천히 상모를 돌리다가 차츰 괭과리의 급박함을 따라 날라리 가락은 이어진다. 시름의 강이 깊든 말든 가슴의 원이 깊어지건 어쨌건 오늘은 맘껏 ‘칼노래’를 부르고 싶은 것이다. 하긴 그의 집에 초대하고 싶은 이들이 어디 이들 뿐이겠는가. 그리운 이들과 마주앉기 위해서는 술잔이 제격인 듯 ‘바람집’ 연작 7수 중 직접적으로 술과 관련된 시편들이 3수나 된다. 물론 다른 시들도 간접적 연관을 가진다. 위 시에서처럼 칼노래 한 마당에선들 어찌 술 한잔이 없을까.

 

 

박시교 시인의 ‘바람집’풍경은 신산하다. 집은 늘 비어 있다. 그 비어있음은 무위자연을 즐기는 은자(隱者)의 그것이 아니라 척박한 삶의 빈터를 걸어가는 쓸쓸한 뒷모습에 가깝다. 허물어진 터엔 청산도 뻐꾸기도 그 흔한 풀꽃도 비켜 울고(바람집 3), 망연히 그냥 선 채로 헛말만 헛뿌릴 뿐(바람집 1), 노래를 잊고 현(絃)가닥도 다 끊은(바람집 6) 채로 서있다. 하지만 이 연작을 마무리 지으며 쓴 작품 <바람집-別章>에선 “....사랑마저도 주체 못할 힘겨운 짐이었던 어리석고 여린 아, 나의 비망(備忘)// 어쩌랴, 사랑할밖에 보듬어 안을밖에”라고 노래한다. 등에 진 힘겨운 짐들은 그가 기꺼이 선택한 것들이다. 형벌이든 누더기이든 부려놓지 않고 떠안고 가려한다. 허물어진 담장일 망정 소중한 나날의 집적, 그것이 바로 부재하는 것들과의 교감 ‘바람집’인 것이다. 이 글에서는 ‘바람집’을 구성하는 시인의 우여곡절들을 세월을 거슬러 찾아가 보려한다.

 

 

 

2. 겨울강에서 울다

 

 

 

 

좀은 서럽고 억울턴 눈물 한 짜투리

이른 봄 보리 밟듯 꼭꼭 밟아둔 채

오늘은 종로 인경을 몸째로 부딪쳐라

 

아아, 얼마만인가 인경이여 네가 울면

이미 깊이 잠든 자 새벽눈을 다시 뜨고

그리도 오래 역류턴 피가 이제 다시 흘러라

 

진실은 숨어서도 전혀 부끄럽지 않고

속살을 달아오르는 숯불 같은 이 뜨거움

동해여, 네 일출 앞에서 차라리 눈을 감으리

 

-<무미(無味) 5>전문

 

 

 

이 시는 시집의 한 축인 시인이 바라본 현실에 대한 관심을 압축하여 보여준다. 세상은 답답하다. 보리는 밟을수록 일어선다. 그 보리의 강인함을 동해 일출을 보면서 배운다. 종로 인경을 부딪쳐 깨우고 마침내 역류하던 역사를 곧게 펴야한다. 그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 시인은 속살을 뜨겁게 달군다. 그동안 우리는 이 시인의 목소리에 대해 귀를 기울여 왔다. 물론 이 시가 매우 새롭거나 기념비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박시교 시인의 이런 외침은 적어도 한국시조단에서는 하나의 이정표가 될 수 있었다.

 

700년의 역사를 가진 시조가 현대에 와서 왜 그 많은 독자를 잃어버렸는가. 조운, 이은상, 김상옥, 이호우, 이영도, 정완영을 거치면서 시조는 민족시가의 맥을 이으면서 당당히 맨 윗줄에 자리하고 있었다. 물론 서구적 관점에서 시를 바라보려 했던 시각 등 여러 요인이 있었겠지만 시조단 내부로 거울을 들이대면 스스로 반성해야 할 점이 더 많아 보인다. 바로 시조의 요체인 리얼리티의 획득에 실패한 탓이다. 시절가조라는 원 뜻을 곱씹어볼 때 시조가 시대의 얘기를 담아내지 못하면 이미 제 기능을 상실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70년대와 80년대를 거슬러 오면서 일부의 시조인들을 제외하곤 현실문제에 대한 접근은 별반 없었다. 참여적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좋은 시의 창작 태도라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시란 제어하는 세상의 모든 것으로 부터의 해방을 노래하는 것이 아닌가. 감옥 속에 가둬둔 언어들을 자유롭게 세상에 날려 보내지 못하고 현실의 벽에 안주한 시조인들의 안일함이 불러온 결과였다.

 

 

 

오늘 이 아픔들을 말로 다 못할 것이라면

무심히 그냥 그렇게 겨울강을 가 보아라

은밀히 숨죽여 우는 겨울강을 가 보아라

 

짙푸르던 강줄기는 얼붙어 멈추었고

산도 굴릴 것 같던 그 몸부림도 멎었어라

누군가 이 뜻 알겠노라면 죽어서 묵도(黙禱)하라

 

귀 기울이면 선한 소리, 내심(內心)의 너 겨울강아

근심의 잔뿌리랑 잔기침의 매듭까지

이대로 잠보다 긴 꿈, 꿈에 갇힌 겨울강아

 

이제 우리네는 밤중에도 눈을 뜨고

가슴 속은 임의로 문신한 햇덩이가 탄다지만

가진 것 다 뿌려 준 후에 가득차는 이 절망아

 

한숨의 이 씨날에 날줄은 무얼 넣나

없는 것은 다 좋고 하나쯤 있었으면 싶은

뜨거움 숨의 뜨거움을 빙판 눕힌 겨울강아

 

보겠는가, 눈뜨고 눈감고 보겠는가

무심히 그냥 그렇게 겨울강을 보겠는가

상류로, 상류로부터 걱정만 쌓은 겨울강아

 

-<겨울강> 전문

 

 

인용시 <겨울강>은 바로 그 사실에 대한 아픈 질문인 동시에 대답이다. 박시교 시인의 시의 원천은 70년대다. 한국 현대시사에서 70년대적 정서는 소중하다. 80년대의 문학운동이 질풍노도의 성격을 띠었다면 70년대는 지사적이되 소박한 낭만이 어우러진 시대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시대를 지나오면서 체득한 시인 특유의 하류 지향 정서는 공감의 폭을 넓히기에 충분하다. 동시대를 살아왔다고 해서 누구나 이런 정서를 갖지는 않는다. 키를 낮춰 함께 아파하고 아우를 줄 아는 심성을 타고나야 한다. 이 시인이 가진 70년대적 현장성과 관심은 특히 현대시조에선 매우 소중한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문단활동을 시작한 다른 시인들에 비해 그는 한 발 더 현실 깊숙이 다가서 있었고, 그 체험은 현대시조의 한 축을 살찌우는 튼튼한 밑거름이 되었다.

 

 

오늘 이 얘기들은 죄다 산으로 가라

 

가서 훗날에나 피어날 철쭉꽃빛 그 핏빛

 

 멀찍이 봄도 비켜서갔다는

 

내 가슴 속 동토(凍土)여

 

 이른 아침 갓 채굴한 무력한 나의 어휘

 

 생수로 씻어내도 공복처럼 아릴뿐이구나

 

 하늘도 낮게 내려앉은 -<무미(無味) 6>전문

 

 

겨울강이 절망의 얼음을 뚫고 봄을 기약하듯이 이 시에서도 생명의 끈을 놓지 않으려 한다. 박시교 시의 장점은 현실을 말하되 서정성을 잃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의 이런 어휘들은 쉽게 결론에 닿기도, 장벽 속에 갇혀 있기도 거부한다. 그리고는 죄다 산으로 들로 풀어놓아버린다. 동토에서 비켜 간 봄이며 피지 못한 철쭉들은 산으로 가서 훗날 다시 생명으로 소생할 것이다. 이런 발상은 그가 즐겨 차용해오는 자연의 것들과 조화를 이뤄 박시교식 시법을 만든다. 분명한 것은 자연에 기대되 결코 섣부른 자연예찬을 늘어놓지 않는다.

 

 

일부러 돌아오는 길섶의 수풀 한 잎

눈물인 듯 눈물인 듯 맺힌 이슬과 만난 잠시

갈증은 놀처럼 타고 멀리 누운 산등성

 

한때의 이 실명(失明)은 연밥처럼 익을 테지만

그 무엇도 채우지 못한 저문 하루의 끝으로

그림자 장승처럼 끌고 아주 천천히 돌아온다

 

친구여, 만남 후에 오는 이 허망을 어쩔거나

산이 쩡쩡 울고 난 뒤 고느적한 절터만 남듯

그 터에 이승만한 번뇌로 정(釘)을 들어 쪼는가

 

-<무미(無味) 3.-권달웅 시인에게> 전문

 

 

나름대로 치열하게 살아왔지만 시인은 가끔씩 산에 기대어 물어본다. 나의 행위에 대해 나의 외침에 대해 함께 먼길을 걸어온 벗에게 물어본다. 우리 장차 맞닥뜨릴 인연의 빈터, 그 허무를 어쩔 것이냐고. 시인 권달웅은 무미(無味)의 맛을 지닌 벗이다. 달고 짠맛보다는 여름날 길섶에 솟는 찬 샘물 맛을 지닌 친구로 읽힌다. ‘한 때의 실명(失明)이 연밥처럼 익’거나, ‘산이 쩡쩡 울고 난 뒤 고즈넉한 절터만 남’은 시간의 여백을 걷다보면 그때 비로소 절창임을 느끼게 된다. 너무 아름다우면 차라리 눈을 감고 싶다. 길섶 수풀 한 잎이 되어 지름길 제쳐두고 일부러 먼 길을 돌아온다. 잎잎마다 이슬이 맺히고 갈증은 놀처럼 먼 산등성을 타고 온다. 하루가 접혔다 펴질 때마다 늪 속의 연밥은 한 뼘 한 뼘 여물 것이다.

 

그렇게 겨울강은 속으로 운다. 시인이 걷어내고자 했던 얼음장은 아직도 여전하다. 어쩌면 극복되어지지 않을 그 무엇인지도 모른다. 한 땐 그 대상이 시인을 둘러싼 시대와 사회였지만 이젠 자신임을 깨닫는다. 무미(無味)는 시인의 새로운 지향이다. 강물은 어떤 맛도 없지만 들을 적시고 생명을 길러온 위대한 맛을 지녔다. 이 시편들은 무미(無味)의 모성에 기대고 싶은 시인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3. 균형과 균제의 문제

 

 

그대 잘도 오는구나, 가슴 속 허벌판으로

 

와서 무더기로 피어나야 할 저 풀빛 낭자한 자유와, 또한

취하여 제멋에 어깨춤 절로 나게 하는 자욱한 저 민주와,

이미 분노한 가슴 이제야 활짝 열어젖힐 아아, 자지러질

통일

 

그렇다, 너 올 것이라면 그들과 함께

오라.

 

-<가슴으로 오는 새벽>전문

 

 

그는 자연과 인간과의 조화 못지않게 형식과 서정과의 조화에도 부단히 노력한 시인으로 기억된다. 이 시는 현실을 노래하지만 구호에 함몰되지 않는다. 왜일까? 바로 사설의 가락과 장단이 있기 때문이다. 박시교 시인의 사설시조는 왜 사설인가 하는 물음에 대한 모범답안이다. 자칫 사설시조는 산문시처럼 읽힐 위험이 있다. 그래서 시조의 정체성을 지켜내고자 하는 시조인들은 사설을 경원시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시는 전혀 정체성을 상실하지 않고 신명을 돋운다. 자유는 산과 들 어디에서든 무더기로 피어나야 하고, 민주는 더덩실 춤판의 먼지처럼 피어나야 하고, 통일은 가슴 빠개고 자지러지듯 와야 한다. 그렇게 어울리는 사람과 사람끼리의 어깨춤은 사설 고유의 맛이다. 제대로 된 형식만이 내용을 담보한다.

 

 

 

사람 사는 일이

연극 같다고 너는 말했다.

 

사시사철 여기 수유리 산번지에 내리는 저 자욱한 안개비와

밤을 도와 우는 뻐꾸기의 피끓는 울음. 그렇지, 아무래도 그

것들은 우리 사랑과 무관하지만은 않을 터. 이제 너만이라도

다시 관객으로 돌아가야 한다.

 

오늘 이 무대에 펼쳐질

나의 모노드라마

 

-<모노드라마>전문

 

 

앞의 시가 넌출거리는 가락에 기대고 있다면 이 시는 차분히 감정을 다독여 놓고 있다. 좀 더 시인의 존재와 소명에 다가간다. 그래서 스스로 객체가 되려한다. 너는 나의 역설이다. 내 삶을 보아줄 관객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다. 삶은 때로 연극처럼 꾸며진, 누군가 써 놓은 극본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하는 착각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연극보다 더 교묘하게 짜여진 일상 속에서 삐에로가 되기도 하고 주인공이 되기도 한다. 누구나 혼자라고 하지만 홀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안개비와 뻐꾸기 울음도 우리네 생과 무관치는 않으리라. 모노드라마의 무대 위에 세워졌지만 그 역시 조명과 객석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자신의 노래에 대한 냉정한 평가는 장인을 위한 다짐이다.

 

 

 

가서 오지 않는 것

세월뿐이 아닙디다

 

때로 자지러지고 녹아들고 솟구치고 하던 그런 삶의 숱한

거품들이 어찌 흘러가는 저 물과 같다 하겠습디까. 어제

흘러간 물은 이미 오늘의 강물이 아니듯 우리의 마음도 그

렇게 마냥 흘러가게 마련입디다.

 

네 안의 강 같은 평화

내게도 넘칩디다

 

-<너의 강 1>전문

 

 

버리고 얻은 평화는 박시교의 시집 도처에 있다. 평화마저도 넘친다는 표현에 주목해 보면 이 시에서 버림은 자의적 비움이 아니라 버려져 가는 것들에 대한 순응과 체념 같은 것들로 읽힌다. 갖고 싶고 이루고 싶은 욕망들은 의지만으로는 안 된다. 그래서 차라리 흐르는 물에 자신을 그냥 띄워놓는 것이다. 여기서는 존재의 가벼움을 인식하는 단계 즉, 적극적 버림이 아니라 수동적 버림의 자세를 견지하는 것이다.

 

 

 

웃음을 말리고 섰는 이날 나의 바지랑대

 

그대 고이고 선 쭉정 빈 하늘을

 

묵정밭 억새잎처럼 우우대는 쉰 목청

-<목(木)다리>전문

 

 

누가 이승을 앓다 떨구고 간 병(病)인가

 

천지간에 온통 풀꽃 낭자하게 흐트러지고

 

하늘엔 해쓱한 낮달 버려지듯 걸려 있다

 

-<낮달 2> 전문

 

 

 

그럴수록 시선은 더욱 자신을 향한다. 자신을 객관화 시켜 보면 언어는 절제된다. 관심 또한 주변의 것보다는 자신의 삶에 치중된다. 사설로 시대를 건너뛰다가 문득 단수에서 머물기도 한다. 언어와 언어의 간격이 촘촘하여 틈이 없는 시도 좋지만 넉넉한 행간을 가진 시도 좋다. 바지랑대는 불안해 보이지만 절묘한 균형을 가진다. 그가 널어 말리는 것은 쭉정이의 하늘이거나 벼려진 해쓱한 낮달이다. 일별해보면 그에게 풍요로운 것은 ‘묵정밭 억새’, ‘이승을 앓다 떨구고 간 병(病), ‘강물과의 현란한 작별’(어떤 이별), ‘천만 자 눈물의 샘’(낮달 1) 등등 비애의 찌꺼기들뿐이다. 비록 그의 시들이 넌출거리는 사설의 장단과 가락을 가졌지만 노래들은 한결같이 비애의 정조를 배면에 깔고 있다. <첫눈>마저도 ‘백지로 쏟아지는 먼 기억의 파편’이지 결코 순결과 환희의 대상은 아니다.

 

시인은 늘 상심의 덫에 갇혀 있고, 독자들은 감염된 듯 비애의 옷을 걸치고 있었다. 이는 그가 강요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의 집에 초대된 독자들은 ‘바람집’ 속에 흐르는 기류에 자연스럽게 반응한다. 평시조와 사설시조, 치열한 현실인식과 서정성 등 균제와 균형을 갖기를 원했던 몸짓에 비해 감정의 빛깔은 한 쪽으로 치우친 감이 있다. 그 민감한 감염은 전적으로 독자들의 몫이지만 그 점은 분명 아쉬워 보인다.

 

 

4. 여백을 위하여

 

 

세상일 가만히 들여다 볼라치면

 

어디 눈물 아닌 것 하나 있을까만

 

어쩌다 목련꽃 벙그는 화사함도 보게 마련

 

울멍울멍 솟구치던 가슴속 그리움도

 

목울대 꺼이꺼이 복받치던 울음까지

 

이제는 하나로 잦아들어 노래가 되던 것을

 

그 노래에 애증 얹어 강물처럼 흐르던 것을

 

구비마다 숨죽이던 아픔은 들풀로 돋고

 

이윽고 그 잎에 맺힌 사랑도 보게 되리

 

- <사랑을 위하여>전문

 

 

앞에서 본 박시교 시인의 빛깔은 비애였다. 그런데 이 시집 5부를 구성하는 11수의 시조들에서도 직접적으로 눈물을 거론한 시조가 4수나 된다. 그렇다면 그에게 비애는 극복될 수 없는 그 무엇인가? 아니다. 눈물이 시인의 궁극이 아니었음을, 기항지를 찾아가기 위한 통과제의였음을 위 시를 통해 알 수 있다.

 

그가 마침내 다다르고자 한 곳은 바로 ‘사랑’이다. 세상일이야 ‘어디 눈물 아닌 것 하나 있을까만/ 어쩌다 목련꽃 벙그는 화사함도 보게 마련’ 아닌가. 목련꽃의 화사함은 눈물의 시련을 견딘 후에 온다. 이 평범한 진리에 닿기 위해 시인은 애써 먼길을 돌아온 것이다. 울멍울멍 솟구치는 그리움도, 목울대 꺼이꺼이 복받치던 울음도 이제는 노래로 잦아든다. 그리하여 마침내 잎에 맺힌 사랑도 보게 되지 않는가.

 

 

순정한 꽃 한 송이 피워야 할 봄날이다

 

부치지 못한 편지 묵혀도 좋을 봄날이다

 

 이대로 늙으면 또 어떠냐,

 

 

낙화유수(落花流水) 봄이다 -<봄날은 간다>전문

 

 

공초(空超) 묘 옆에서 아내와 쑥을 캔다

 

햇살이 미풍에 흔들리는 사월 한낮

 

 산벚꽃 하르르 하르르 지는 소리 들으며

 

 저렇듯 옆에서는 한 세월이 무너지는데

 

 둘만의 향기로운 저녁 식탁을 위해서

 우리는 아무 말 없이 봄을 캐 담는다 -<쑥을 캐며>전문

 

 

이렇듯 사랑은 담담하다. 부치지 못한 편지를 묵히면 어떠하며 이대로 늙어간들 또 어떠랴. 꽃이 다 피지 못해도 열매 다 맺지 못해도 세월은 낙화유수처럼 흘러간다. 그러다가 어느 봄날, 한 시인의 무덤 옆에서 한잔 술, 곡 한마디 대신에 햇쑥을 캔다. 산벗꽃이야 하르르 지고, 세월 무너지거나 말건 아내와 다정히 쑥을 캐면 그만. 이럴 땐 살만큼 살아본 아내도 말이 없다. 먼저 간 시인 역시 이 광경을 미소로 지켜본다. 이곳엔 산 자도 죽은 자도 없다. 봉분 곁에 난 쑥이나 산비둘기 울음은 그저 나고 지는 자연의 현상에 불과하다. 이제 사랑은 뜨겁지도 아프지도 않다.

 

 

내가 봄산에 가서 꽃이 되고 숲 되자는 것은

 

수없이 무너졌던 너에 대한 그리움이

 

아직도 마음의 나무처럼 자라고 있기 때문

 

이만치 떨어져서 바라보기만 하자고

 

한때는 짐짓 거리를 두기도 하였지만

 

간절한 바람 그마저 허물 수는 없었기 때문

 

이제 이러면 되겠느냐, 내가 다시 꽃으로

 

잎으로 싱그러운 푸름으로 펼쳐 서면은,

 

그래서 내 몸이 봄산과 하나 되면 되겠느냐

 

-<봄산에 가서>전문

 

 

그렇게 합일(合一)의 순간이 온다. 숱하게 무너진 곳이 비애의 바닥이었다. 어떤 날은 적정한 거리를 유지한 적도 있었지만 극복은 쉽지 않았다. 꽃이 지면 스스로 꽃이 되고, 낙엽지면 스스로 푸른 수목이 되고자 한다. 그 꽃잎 절반만 피고 조선 소나무 좀 삐뚤어진들 어떠랴. ‘모자라면 모자라는 대로 넘치면 넘치는 대로’(바보 산수) 그림을 그리지 못할 이유는 없다. 그것이 운보(雲甫)만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시인은 아직 그 그림에 낙관을 찍지 않았다. 그러므로 박시교의 ‘바보 산수’는 운보(雲甫)의 것도 시인의 것도 아니다. 봄과의 일치를 꿈꾸지만 그는 섣불리 합일에 이르지 않는다. 그래서 낙관을 찍을 자리를 비워 둔 것이다.

 

5.‘바람집’을 걸어 나오며

 

 

그리운 이름 하나 가슴에 묻고 산다

지워도 돋는 풀꽃 아련한 향기 같은

 

그 이름

 

눈물을 훔치면서 되뇌인다

 

어 머 니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름>전문

 

 

그의 가슴 속에는 끝내 지우지 못할 이름 하나만 남겨 두었다. 이 시집은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름인 어머니에게 바치는 헌사다. 그 이름 하나를 간직하기 위해 많은 것들을 비워냈는지도 모른다. 앞에서 바라본 박시교 시인의 ‘바람집’풍경은 신산했다. 비어있었지만 무위자연에 가까기 보다는 무엇엔가 몰입되어 있었고 못내 쓸쓸했다. 그러나 이 시집 한 권을 다 읽고 난 후의 느낌은 전혀 다르다. 어떤 주의나 주장에 매이지 않고, 새털처럼 가벼워진 시인을 본다. 등 굽은 산녘에 기대인 이빨 빠진 옹기처럼 편안하다. 허나 그 속엔 어머니의 이름처럼 햇살에 잘 발효되어가는 된장이 들어있다.

 

섣불리 그에게 거장이란 말을 붙이고 싶지 않다. 아직은 ‘더불어 사는 일이 힘’겹고(사랑의 짐) 아내와 듣는 ‘목포의 눈물이 너무 애절’(아내의 십팔번)하기 때문이다. 또한 남은 생에 대한 노래를 마저 불러야 한다. 그가 평생을 바쳐 지은 ‘바람집’은 박시교의 냄새로 가득하다. 나는 그의 체취를 따라 이곳까지 걸어왔고, 온갖 부재하는 것들과 교감하였다. 그래서 약간은 슬프게 또 약간은 허허롭게 나를 돌아보기도 한다. 이제 그 ‘바람집’에서 걸어 나와야 한다. 나는 슬며시 그 집의 문패를 떼어놓는다. 그리고 어지럽힌 내 발자국들을 짚풀로 쓸어놓고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