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시조의 현단계
경남시조의 현 단계
이 달 균
들어가면서
<경남시조 40년사>의 발간을 위한 원고청탁을 받았다. 필자도 회원의 한 사람이므로 피해갈 수 없었다. 더구나 앞 세대의 작품을 김연동 시인이 집필을 맡았으므로 후배로서 후세대 시인들에 대한 집필은 당연한 것이다.
여러 방법이 있을 수 있겠다. 비슷한 경향을 가진 시인끼리 묶어 쓸 수도 있고, 연조가 비슷한 이들끼리 묶을 수도 있을 것이다. 여러 궁리 끝에 너무 많은 시인들의 작품을 다루므로 가급적 그날 그날 눈에 들어오는 대로 쓰기로 했다. 그 정도의 융통성은 발휘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되었다.
물론 작품의 우열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비평하기 보다는 어떤 점에 주안점을 두고 썼는지를 먼저 보려 했다. 고통스런 작업이 되겠지만 회원들의 작품과 경향을 다시 읽고 생각해 보는 기회로 삼기로 했다. 나의 작품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돌아보는 시간이 되기를 기대한 면도 있다.
언젠가,
언젠가는 고향으로 돌아가리
그렇게 다짐하며 지느러미 세우고
도시의 유영을 끝낸
탈출기를 쓰고 싶다
싸구려 떨이로 팔릴 밤 늦은 좌판 위에
부레를 뒤집으며 노릿노릿 엮은 꿈들
절망도
희망과 함께 한 오두막 세긴다
검정말 방아깨비 짚신벌레 옛 친구야
잊히지 않기 위해 흘러간 노래 부르며
서문엔 이렇게 쓰리
푸른 강에 가고 싶다
-최영효 <붕어빵. 경남시조 20호>
최영효는 우리 시대 시조가 어떻게 어떤 모습으로 발전해 나가야 할 것인가를 처음부터 고민하고 쓰는 드물게 보는 시인이다. 그래서 자아도취 하듯 음풍농월하고 어설픈 감상에 젖은 시조단을 극복하기 위해 나름의 노력해 왔다. 또한 패배주의를 벗어나 좀 더 진취적이고 스케일이 큰 시조를 쓰기 위해 남성적 서정을 구현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붕어빵을 위한 사유라지만 기실은 행간에 숨은 자신의 시세계를 은연중 드러낸다. 이 시는 기존에 강조해 왔던 시들과는 조금 다른 모습을 취하고 있다. 비록 지금은 부레를 뒤집으며 노릇노릇 먹기 좋게 익고 있지만 도시의 유영을 끝내고 탈출하고 싶다. 이 갇힘은 절망이지만 바다를 염원하는 마음만은 버리지 않으려 한다.
그리고는 세상의 미물들에게 말한다. 검정말, 방아깨비, 짚신벌레 등 주목받지 못하는 미물들에게도, 잊혀져 버린 옛 이름들을 부르며 희망의 노래를 부르고 싶어 한다. 그리곤 뜨겁고 단단한 빵틀을 깨고 “푸른 강에 가고 싶다”고 외친다.
기존에 발표한 시들과는 빛깔이 조금 달라 보이지만 강을 염원하는 마음을 읽다보면 그가 지향해 왔던 근본적인 휴머니즘과도 맥이 닿는다.
어시장 새벽 불빛 아래서 나는 핀다
젖은 길의 지느러미 왼종일 다듬으면
물수레 푸른 바퀴를 끌고 파문처럼 별이 돋을까
비린내가 소리의 문을 꼭꼭 닫아버린다
아무데도 없는 내가
절벽이다
물구덩이다
누군가 혀를 빼간다
쉼표처럼
잎이 진다.
-문희숙 <물풀. 경남시조 17호>
문희숙의 시는 상투적이지 않아서 좋다. 딱히 시조라고 냄새를 피우지도 않고 그저 시에 접근해 보라 그리고 운율에 자연스레 몸을 맡겨 보라며 자신을 내보인다. 처음엔 자유시인 줄 알고 읽었는데 읽다보니 시조인 줄 알았다 하면 분명 좋은 시조가 분명할 것이다.
이 시도 그렇다. 어시장 앞 바다도 제 딴엔 바다라고 출렁이며 제법 분주하다. 새벽은 더 그렇다. 경매하는 손길이나 멀리서 온 배들이 항구에 비린내들을 내려놓는다. 깊은 바다의 풀들이야 새벽에 필 이유가 없다. 습기 찬 콘크리트 위에 혹은 분주히 오가는 수레바퀴에 죽은 듯 살아있다. 샛별이 떴지만 물풀에겐 빛이 올 리 만무하다. 그래서 절벽이다. 자신의 존재를 잃어 버렸다. 절규하지 못하게 아니 단말마의 비명도 지르지 못하게 아예 누군가 혀를 빼가 버렸다. 만약 시인에게 표현하지 말라고 한다면, 키보드나 펜을 빼앗아 버린다면? 왜 굳이 절망에 빠진 물풀에 비유하였는가? 아무도 모른다. 해답은 독자에게 맡기고 다만 상황만 말해줄 뿐이다.
절벽과 물구덩, 혀를 빼가는 설정은 바쁘게 진행된다. 구절도 연결시키지 않고 끊어 배치한다. 그러나 맨 마지막 “쉼표처럼/ 잎이 진다”는 행간에 여운을 남기며 되도록 천천히 읽게 한다. 군데군데 장치를 해놓았지만 우린 그냥 시키는 대로 읽고 느끼면 그뿐이다.
억겁의 세월에 굳은 의지 쇠로 굳다
타의로 변신한 모습은 장검이 되어
세풍에 몇 겹의 옷 벗어 가루로 날린다.
눈물의 비에 젖어 수많은 가루들이
재생의 기약 없이 지중 깊이 묻히는데
인고의 중압에 눌려 땅 윤기 속 다시
압축된 제 성정으로 태양 아래 이는 광채
장인의 점지 따라 변해 가는 성정들
화평의 쓰임새 되게 간절히 빌어 본다.
-김호영 <쇠. 경남시조 20호집>
쇠는 여성의 아름다움을 위한 치장의 재료이며, 의식주 해결을 위한 연장, 한 목숨 부지하기 위한 무기이기도 했다. 그래서 쇠를 의지에 비유하고 태양 아래 이는 광채임을 말한다. 장인의 쓰임새에 따라 쇠는 변한다. 즉 본질은 변하지 않지만 장인의 의도에 따라 다른 모양을 변하므로 가급적 평화를 위한 도구로 쓰이기를 바라는 것이다. 비단 쇠뿐이겠는가. 건설재료로 쓰기위해 만든 다이너마이트가 살상무기로 변한다. 모든 것은 원래의 본성을 존중해야 한다. 비록 ‘장인의 점지 따라 변해 가는 성정들’이지만 가급적 원래 의도된 것에 준하면 큰 무리가 없다고 시인은 말한다.
더운 여름 냇가로 한 사내가 걸어왔다
흙먼지 투성이의 먼 길을 걸어서 온,
사내는 나뭇가지 위에 웃옷을 벗었다
백일홍 꽃잎 하나가 물위로 떨어졌다
사내가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는 동안
칼끝이 팔뚝깊이 박힌 문신을 훔쳐보았다
넘어지면 밟고 가는 이승의 길모퉁이
등 돌린 세상을 향한 분노의 칼은 아닐까
그 마음 도려내고 푼 삭도削刀는 아닐까
발등을 간지르는 이 소리없는 냇물도
저 계곡 어디쯤에선 큰 소리로 울었으리,
물아래 어느 돌이건 상처 아닌 것이 없었다
-김윤철 <단도-무주에서. 경남시조 21호>
김윤철의 시는 자신의 빛깔에 철저하다. 결코 의도되진 않았지만 이름을 가리고 읽어도 그만의 체취를 느낄 수 있다. 걸어온 길이 마음에 새긴 문신처럼 아프고 고달팠기 때문일까?
요즘 빛깔 없는 시들이 많아졌다. 무미건조하고 갈등 없는 시들. 정체성 모호한 시인들이 많아진 탓이다. 그런 시를 난 체질적으로 싫어한다. 사람도 속내를 내보이고, 약간의 회한과 상처를 지닌 이들이 살갑게 여겨진다.
시인은 사내와 진한 동질감을 느낀다. 비슷한 사연과 곡절을 지닌 듯하다. 그러나 닮진 않았다. 시인은 노래로 드러내고, 사내는 다소 거친 몸짓을 보여준다. 적극적이지 못한 시인은 그에게서 어떤 카타르시스를 얻기도 한다. 폭발해버리고 싶은 속내를 삭이고 있기 때문이다.
문신을 한 사내의 주변은 철저히 시인의 것들이다. ‘떨어지는 백일홍 꽃잎’, ‘이승의 길모퉁이’, ‘물 아래 돌들’ 등등은 사내와는 무관한 사물들이다. 그런데 왜 이 흔한 사물들은 한결같이 비극적인가. 낯선 사내와의 조우를 통해 시인은 애써 자신의 비극성에 다가가려 한다. 이런 특징은 이 시인의 종자이며 덫이다. 시인이여! 이제 스스로 쌓은 그 공고한 비극의 틀을 깨고 나오라.
키보드 오리 타법 밥상이 식어간다
방제도 은유하고 문턱 없는 대화방에
불혹에 사이버 얘기 불륜도 꽃이라고
대명을 클릭하여 반라로 귀속 대화
끼 흐른 인터넷에 불청객은 저리 가라
다락의 밀실작업에 다시 찾은 전율 느낌
-최호근 <채팅중독. 경남시조 20호>
최호근의 위 시는 현대 사회의 한 풍속도를 보여준다. 불혹의 한 여인이 밥상을 차리다 말고 아이디 하나로 은밀하고 음란한 작업을 한다. 익명성이 생명인 컴퓨터를 이용하여 낯선 사내와 주고받는 꺼리길 것 없는 대화는 현대인의 외로움을 보여준다.
시조와 컴퓨터는 잘 조화가 되지 않는 것으로 오해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시조는 형식을 중시하는 장르다. 그러므로 누구나 일탈을 꿈꾼다. 그 일탈, 즉 원심력에서 다시 구심력으로 돌아올 때 시조는 완성된다. 다시 말해서 상상력은 극대화 되지만 결국 작품으로 돌아올 때는 3장 6구 속에서 완성시켜야 한다. 그러므로 새로운 문명의 이기들을 시조 안에서 잘 녹여내면 이채로운 작품이 탄생한다. 사실성은 언제나 강조되어도 부족하지 않다. 그러기 위해서는 감칠맛 나는 솜씨로 버무리는 요리사의 기능이 중요하다.
백 밀리나 추적추적
빗소리에 묻어온 소식
뜨거운
용천의 폭발
4월에도
눈도 내려
앉아서
비명에 지는
매발톱
꽃잎
꽃잎
-공영해<꽃 지다. 경남시조 21호>
시조는 가장 논리적인 시가 형식이다. 각 장 마다 특징이 있고 던지고 풀고 맺는 과정을 거친다. 이 시인은 간간이 시조평을 겸하는 시인이다. 그러므로 그의 시조는 잘 설계된 건축 같다는 생각이 든다.
봄비에 봄꽃 지는 광경이 눈에 선하다. 4월에 웬 100밀리가 넘는 비이며 눈인가. 섣부른 개화도 아닌 매발톱 꽃잎은 억울하다. 필 때 피었지만 이미 4월 강수량을 넘어버린 비에 꽃잎들 비명에 진다. 어디 매발톱 뿐이겠는가. 우린 이 시에서 굳이 다른 의미를 찾으려 말자. 은유의 진원에 매이다 보면 종장의 감각적인 시행을 놓치기 쉽다. 종장의 뚝뚝 지는 꽃잎의 느낌을 강조하기 위해 배행한 것은 성공적인 장치이다. 4월에 피는 꽃은 많다. 그런데 굳이 매발톱꽃을 들고 온 이유는 무엇인가. 비명에 지는 꽃잎으로 벚꽃을 선택했다면 이 시는 생명을 잃었을 것이다. 다소 투박하면서도 예리한 맛을 가지는 매발톱 꽃잎의 지는 자태가 왜 음미할 만한 시인지를 알려준다.
아버지는
숱 많은 검은 머리가 미안했다
도심공원의
햇살을 줍고 있는 노인네처럼
나이를 얹을 수도 없어 꿀 먹은 벙어리다
오랜만에 감투밥에 전, 적, 포, 삼색나물....
제주(祭酒)에는 육포가 최고라며 잇대고 싶은데
내 알지
저승에서도 못 잊는 아픔이 있더라
주변머리 올라가는 맏사위 머리 보며
액자 속에 무연히 앉아 있기 민망한지
황급히 술잔만 적시고는 돌아갈 시간이란다.
-옥영숙 <제삿날. 경남시조 21호>
옥영숙 시인의 시는 한 편 한 편 신뢰가 간다. 언제 읽어도 형식과 내용의 조화가 단단하다. 그만큼 충실한 습작 시간을 보냈다는 증거다. 시조가 음풍농월해서는 안 되지만 또 한편으로 삶은 없고 적당히 언어를 주물고 비틀어 현대시인 양 하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이 시는 이야기도 있고 서술방식도 억지스럽지 않아 좋다.
제삿날 제관과 제삿밥을 받는 아버지와의 말 없는 대화를 엿듣는다. 제관이야 절을 하고 축을 읽는 등 주변을 살필 겨를이 없지만, 딸과 며느리는 제사에서 만큼은 국외자인 채 시적 화자가 될 수 있다. 맏사위는 머리가 벗어지고 있지만, 사진 속의 아버지는 숱이 많다. 그래서 조금은 민망하고 미안해서 한상 정성껏 잘 차린 제사상의 음식에는 손도 대지 못한다. 제관들이 부어 올리는 술잔에만 겨우 입술을 대고는 다시 돌아가신단다.
우리들 지난한 생이 있다면 시 역시 띠어야 할 빛깔이 있을 것이다. 이처럼 내 삶에 렌즈를 갖다 대면 일부러 소재를 구할 필요도 없다.
하던 일 잠시 접고
동해, 동해로 가자
종일 푸른 목소리로
메일을 보내오는
비릿한
수평선과 나는
잠시 하나가 된다.
출항을 서두는 작은 배
가쁜 숨을 몰아대고
내일의 꿈을 깁는
젊은 아낙의 바쁜 손길
돌아올
만선의 배가
희미하게 출렁인다.
-백순금 <동해일주. 경남시조 20호 >
<경남시조>2006년호에 실은 ‘모닝커피․1’이 내겐 와 닿은 작품이었다. ‘동그랗게 말린 하루가 천천히 걸어나와’같은 표현은 신선했다. 갓 배달된 신문을 읽으며 음미하는 아침의 헤즐럿 향이 은은하다.
일상 탈출을 위한 이유는 많다. 그러므로 굳이 다른 말 할 필요도 없이 동해로 가자고 하면 그만이다. 시인은 곧바로 동해로 달려가서 수평선에 안긴다. 그만큼 절실하기 때문이다. 하나 그 또한 바로 그리 된 것은 아니다. “종일 푸른 목소리로 메일을 전해오는”이 한 구절, 바로 바다와 시인은 매일 교통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한 구절을 얻었기에 이미 이 시는 성공한 것이다.
두 번째 수는 좀 욕심이지만 이해하고 넘어가자. 흑백 사진 위에 칼라를 입혀 보고 싶은 것이었으니까. 그녀가 소망한 것들이 바로 만선의 배로 표현된 것이니. 그래 일상에서 고팠던 것들을 동해에서 채우려 하지 않는가. 자신의 만선의 배.
맑은 날 궂은 날에도
습관처럼
익숙해진,
그러다 놓치는 사이
길어지는 날에는
서둘러 네게로 향해
달려가는 내 마음
-제민숙 <안부. 경남시조 22호>
경남시조에 입회한 이후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작품을 발표해왔다. 행사 때도 고성 문인들과 함께 성실히 참석하는 시인이다. 성실함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미덕이다. 이 시인의 시들은 대부분이 긍정적이다. ‘상처’에서도 벼랑의 뿌리는 봄날을 약속하고, ‘안개꽃’에 눈길을 주면서 혹시 젖을까 맘 졸인다.
이 시조 역시 그런 배려의 마음이 잘 드러난다. 궂은 날은 물론이고 맑은 날에도 ‘습관처럼’ 안부를 묻는다. 그래도 어쩌다 안부를 묻지 못한 날에는 몸보다 먼저 마음이 달려간다.
안부를 묻는 마음이 길거나 너절할 필요는 없다. 군더더기 잘라내고 단수로 줄인 것이 미덥다. 거추장스런 옷가지, 긴 머리 다 자르고 단정한 매무새로 서둘러 가는 마음이 보인다.
후미진 시골길
음산한 그늘 아래
하염없이 입 벌린
동태 눈알 바라보다
등푸른 고등어 생살, 은빛 갈치 찔러본다
살을 에는 칼바람
뒤집어쓴 목도리
불어터진 손등엔
고드름 달려 앉고
앞치마 두른 허리춤 구겨 앉은 배추 잎들.
가지런히 좌판 위에
속성으로 태어난
푸성귀 토해내는
알레르기 비염 소리
흙으로 돌아가려는 몸부림 주눅든 채.
깊게 패인 주름 끝에
별과 달 그려놓고
외쳐대는 고함 소리
비닐 속에 팔려가듯
고단한 생 솟구쳐라! 슴배이는 애환가
-김순금 <시장통 사람들. 경남시조 20호>
시장통의 다양한 모습들을 담으려 했다. ‘하염없이 입 벌린 동태 눈알’, ‘허리춤에 구겨져 들앉은 배추 잎’을 통해 좁은 난장임을 쉽게 알 수 있게 한다. 어물전과 야채전이 따로 있지 않고 서로 섞여 앉아 손님을 맞는다.
뿐만 아니다. ‘속성으로 태어난/푸성귀 토해내는/알레르기 비염 소리’는 비록 시골이지만 제 때 난 채소가 아니라 속성재배된 것들도 버젖이 한 자리 차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당연히 다음구절인 ‘흙으로 돌아가려는 몸부림’이 따라온다. 이들 속성채소들과 자존심 상해가며 나앉은 추위를 힘겹게 견딘 겨울 배추이파리는 대조를 이룬다. 그러나 어쨌든 이곳은 시장이다. 작퉁과 진짜가 함께 진열되고 상흔과 상도의가 충돌한다.
어쩌면 희망과 절망이 뒤섞인 저자거리에서 건강한 삶은 예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시인은 초반에 먼저 우울과 고통의 상황을 설정해 놓고 나중엔 “고단한 생 솟구쳐라! 슴배이는 애환가”라고 희망적 마무리를 짓고 있다. 관찰자이고 싶은 시인의 입장. 시장통에서 인간시장을 보고 있다.
검은 살갗 냉소에
가위 눌려 헐떡였다
완숙된 것도 아닌
또 하나로 설 수 없는
열없는
실핏줄 끝에
말라버린 그림자.
먼지 낀 막장 속을
돌고 있는 유형(流刑)의 땅
이 한몸 지탱에 볼
준엄한 논리 앞에
두 머리
짜맞추어도
설 수 없는 사지(死地)였다.
말없는 갠지스강
침묵의 탁류(濁流) 너울
갈쿠리 빈손 끝에
눈을 감은 수도승(修道僧)
무념주(無念珠)
백팔 염주도
잿빛으로 타는 환영(幻影).
-김덕현<쪽밤--샴쌈둥이의 고통을 안타까워하면서. 경남시조 17호>
샴쌍둥이는 분리되지 않고 붙은 채 출생하는 비정상적인 쌍둥이를 말한다. 둘이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둘인 샴쌍둥이는 누가 봐도 안타깝다. 시인라면 그런 안타까움을 말하고 싶으리라. 하지만 소재만 가졌다고 시가 되지는 않는다. 소재는 요리를 위한 재료에 불과하다. 콩으로 간장 된장을 만들 수도 있고 콩자반을 만들 수도 있다. 물론 싱겁고 짜고 달게도 할 수 있다.
샴쌍둥이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볼 것인가. 이 정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현대문명의 한계를 말하든지 아니면 아무리 문명의 발전이 있다하더라도 신의 영역을 침범을 할 수는 신성불가침 같은 준엄한 꾸짖음으로 본다든지 하는 주제를 드러내었어야 했다. 하지만 시인은 애써 그것들을 표현하지 않고 감춰두었다.“말없는 갠지스강/침묵의 탁류(濁流) 너울//갈쿠리 빈손 끝에/눈을 감은 수도승(修道僧)”같은 구절을 통해 “난 샴쌍둥이를 말할 테니 당신들은 그 이상의 것을 읽어내시오.” 하고 말을 멈춘 것으로 이해하고 싶다. 아스팔트길로 독자를 인도하기보다 비포장도로를 걷고 오라는 마음 씀씀이로 읽을 수도 있겠다. 다 말하는 편리함보다 불편하지만 이 정도에서 끝내려하니 나머지는 그대들이 행간에 숨은 것을 찾아보라고.
1)
큰 비가 내린 산문 녹음 빛이 더 푸른
조용한 아우성이 메아리로 파고들다
피 서린 백제의 눈물 동백으로 붉힌다.
2)
참선의 깊은 정오 흰구름 흘러가는
이천 오백 년 목탁만 청솔잎에 출렁이다
천 근의 무게를 앉은 문득 서는 불심 하나.
3)
대웅전 염화 미소 중생을 구원코자
번뇌 불꽃 삭여 줄 말씀이 일렁이다
노승의 메마른 얼굴 돋아난 하얀 수염.
4)
지장 보살, 지장 보살, 외워 본 보살 좌상
세 치 끝 혓바닥이 목구멍에 헐떡이다
앙가슴 찌들린 바람 범열이 잠재운다.
-김만수 <선운사. 경남시조 20호>
4수의 각각 독립된 연시조다. 각 수마다 제목이 붙어 있진 않지만 단수 4수로 읽어도 됨직하다. 첫 수엔 비 내린 산문의 녹음과 옷을 갈아입는 분주한 자연의 고요, 그리고 나그네를 맞아주는 동백을 이야기 한다. 둘째 수에선 수행자들의 목탁소리로 깊어가는 산사의 모습을 읊고, 셋째 수는 먼 발치에서 이제 막 염불을 끝낸 마른 얼굴의 노승과의 만남을 말하고. 넷째 수는 스스로 지장보살을 외워보면서 중생을 벗어나지 못한 자신을 돌아본다.
선운사는 전북 고창에 있는 고찰이지만 우리 마음에 늘 있는 절 하나와 다르지 않다. 시조를 짓는 일도 절을 짓는 것과 같다. 더 다듬고 군더더기를 없애고 줄이고 줄여서 언어를 벼랑 끝에 세워보는 일과 무에 다르랴.
땡볕에 일벌 한 마리
들꽃 찾아 나설 때쯤
허리 늘어진 신작로 변
코스모스 몇 송이 피다
놀라서 눈망울 빤한
그들 위를 덮치고 앉다
방금 벗어 던진 건
네 속옷이 분명하냐
아직 풋내 가시잖은
여린 몸의 작은 너를
빈 바람 제철 모르고
알몸으로 세웠구나
-서대승 <여름 코스모스. 경남시조 23호>
첫 수는 이제 막 피어나는 코스모스와 일용할 양식을 얻기 위해 일을 나선 일벌이 만나는 순간을 그렸다. 벌은 벌대로 꽃은 꽃대로 당연히 놀란 표정이다. 물론 꽃과 벌이 서로 놀랄 일은 아니다. 꿀을 얻으며 꽃씨를 운반하는 공생관계지만 시인의 눈에는 그런 상관보다는 첫 대면의 순간을 포착하고 싶은 것이리라.
둘째 수는 꽃과 바람의 관계다. 피어난 꽃잎의 여린 속살이야 푸른 물관의 속옷이 아닌가. 코스모스는 다 커도 여리다. 이 여린 존재를 바람은 제 키만큼 세워두고 간다. 풍찬노숙을 견디는 힘도 네 스스로 키워보라고 바람은 채근한다. 가을인 줄 알고 피운 꽃은 곧 가을을 예감한다. 내일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결국 알몸으로 서는 일뿐이다. 사람의 일도 마찬가지임을 넌지시 일러준다.
마른 꽃 팔랑팔랑
거리를 누비는
가을 끄트머리
우두커니 바라보는
조락한 메타세콰이아 같은
내 쓸쓸한
삶의 무게
-김차순<고독. 경남시조 20호>
김차순의 여러 편의 시조들 중에 이 단수를 골라보았다. 가을과 조락한 메타세콰이아, 그리고 자신의 쓸쓸한 무게. ‘팔랑팔랑’이란 의태어는 맨 마지막 ‘내 쓸쓸한/삶의 무게’와 연관되어 읽힌다. 이 시의 중심 시어는 인용한 부분이지만 전체를 이끄는 것은 비유로 차용한 ‘조락한 메타세콰이아’이다.
이 나무는 은행나무와 더불어 중생대부터 살고 있는 가장 오래된 살아있는 화석으로 불린다. 그러므로 태어나면서부터 보호수종이 된다. 화석의 빛깔을 갖기엔 아직 시인은 젊다. 그 쓸쓸함은 나무의 오랜 내력을 말해준다. 시인시여 쓸쓸함에 함몰되지 말고 차라리 쓸쓸함을 사랑하라.
제망매가 읽던 밤 문득 다시 떠오르는
영취산 단풍에 기댄 그의 잠을 생각한다
바람이 꿈꾸던 이슬 털며 일어나 떠나고 있다
그가, 가고 나는 가슴에 뻐꾹새를 길렀다
때가 되면 한 소절 슬픔을 읽어주는
그 새를 나는 아직도 벽 속에 가둬 놓았다.
-이정숙<남은 노래. 경남시조 24호>
제망매가는 누이를 먼저 저승 보내고 지은 월명사의 시다. 시인에게도 혹시 혈육의 누군가가 먼저 저승이라도 간 것인가. 아니면 혈육처럼 느껴지는 사람과의 이별이라도 있은 것인가. 누군지 모르지만 시 속의 주인공은 영취산 자락에 잠들어 있다.
만해 한용운은 님의 침묵에서 “님은 갔지만은 나는 님을 보내지 않았다.”고 스스로 상처를 보듬는다. 이 시인도 역시 보내지 않았음을 증거하기 위해 뻐꾹새 한 마리를 기르고 있다. 뻐꾹새는 슬픈 울음을 울기도 하고, 옛 얘기를 들려주기도 한다. 그 새를 아직도 벽 속에 가둬 두다니. 이 2수의 맨 마지막 종장이 없었더라면 이 시조는 그만 맥이 빠져 버릴 수도 있었으리라. 뻐꾹새는 이별과 연관하여 너무 많이 쓰여진 소재이고 ‘바람이 꿈꾸던 이슬 털며’같은 표현은 좀 진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종장으로 인해 한 편의 시는 생명을 얻고 있다. 의도되지 않은 듯 의도된 시적 장치가 고맙다.
가슴 깊이 묻어둔
갯내음 향내는
바람 부는 양철 지붕의 빗소리에 섞여 내린다.
무너진 만선의 꿈이
뒤척이는 밤에도
썰물진 바닷가
홀로 남은 폐선같이
하나 둘 가고 없는
초등학교 교실 흑판에
삼년 전 누가 그려둔
사분음표만 남아 있다
-정영도 <어촌. 경남시조 20호>
폐허가 된 어촌의 풍경을 묘사해 내고 있다. 갯내음은 양철지붕에 내리는 빗소리와 바람 속에 섞여 있다. 폐선만 홀로 남은 해변은 썰렁하다. 폐교가 된 학교엔 이 학교의 졸업생인 듯 흑판에 사분음표 하나를 그려 놓았다. 그것도 3년 전의 흔적이다.
서정이 풍경과 잘 조화를 이룬 시조다. 농촌만 힘든 게 아니라 어촌의 현실도 고달파 보인다. ‘삼년 전’이란 시어를 차용하면서 특히 시간과 공간의 텅 빈 거리를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이런 시는 가급적 시인의 생각을 줄이는 게 좋다. ‘가슴 깊이 묻어둔 갯내음 향내’, ‘무너진 만선의 꿈’ 등이 어렴풋이 보이지만 최대한 자신에게 도취되는 영탄어는 자제하고 있다. 양철지붕에 내리는 비는 처연하다. 여기서 양철지붕은 그냥 지붕의 한 종류라기보다 아련한 옛 정서를 되살리는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어촌을 지나며 누구나 느끼는 보편적인 심정을 잘 노래하였다. 시인은 대변인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가진 자 채운 만큼
없는 자 비워야 해
지을 농사 가마니엔
걱정 반 설레임 반
본북이
가난을 불러
토담처럼 넘던 고개.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보돗이 넘겼다 싶더니
나라 팔던 후예들이
배달의 넋도 팔아먹어
기어코
단죄를 받아
몇 갑절로 돌아오네.
-하문규 <별종 보릿고개. 경남시조 24호>
이 시조는 웬만큼 나이가 들지 않고서는 잘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겠다. 우선 보릿고개라는 소재가 그렇고 나라를 판 이들을 불러온 상황도 그렇다.
우선 ‘본북’, ‘보돗이’ 같은 시어들은 잘 쓰이지 않는 말들이다. 본북은 자신이 받은 복을 말하고 보돗이는 ‘겨우’, ‘힘들게 무엇을 이뤄가는 과정’을 설명하기 위한 말이다. 이런 방언들을 시에 살려보는 노력이 좋다.
고시조적 한계와 현대성의 경계를 정확히 그을 수는 없다. 이 작품에서 보릿고개는 비단 배고픔만을 한정하지는 않는 듯하다. 나라 팔아 치부한 이들의 배부름에 반비례하여 민초들은 굶주렸다. 그 힘든 시절을 겨우 넘기니 어느 새 약삭빠른 이들이 새로운 권력과 결탁하여 혼도 넋도 팔아 배를 채운다. 언제나 민중들은 가난했다. 가난은 가난을 낳는다. 그 단죄는 언제쯤 이뤄질까. 요원하다.
뒷산의 대나무는 속마다 비워놓고
세상사 욕심 없이 댓잎만 날리는데
절개는
꺾이지 않아
만물의 표상이네
비우는 마음만큼 채울 수 있다는데
뭇사람 가득찬 마음 넘치는데 채울려네
사람아
빈마음 놓고
허전탄 말 말아라
마음이 건강하면 행복도 곁에 있고
항상 비우다 보면 채워지는 그릇인데
인생은
마음을 비우며
살아가는 것 아닌가?
-김용진<마음 비우기. 경남시조 20호>
동양문화의 최고 경지는‘비움’에 있다 해도 과언 아니다. 그래서 비움을 도(道)에 비유한다. 대나무가 사군자의 하나로 치는 것도 속은 비어있지만 고절한 절개를 가졌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시도 마찬가지다. 할 말을 다 하고 독자를 감동시키기보다 줄이고 줄여서 감동시키는 시가 훨씬 우수한 시다. 물론 이루기 위한 집념을 갖기도 전에 비워서는 안 된다. 그 집념은 반드시 고통을 동반한다. 그런데 여기서 집념의 한 일환으로 얄팍한 '기술' 을 써서는 안 된다. '비움(空)' 은 ‘집념’과 대척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원과 끝과 끝으로 맞닿아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자칫 잘 못하면 '집념'은 '욕심'으로, '비움'은 '느슨함'으로 변질되기도 한다. 욕심은 무리수를 불러오고, 전체의 국면을 냉철하게 살피지 못하게 가로막는 장벽구실을 한다. 또한 '느슨함'은 '치열함'이 부족한 상태를 말할 수도 있다. 댓잎은 비웠지만 절개는 굳다. 비운 듯, 차 있는 시 한 편은 그만큼 어렵다.
잊고 산 뒤안길의
발길 머문 언저리에
바람이
심고 간
풀꽃들은 무성한데
언제쯤
그 누가 이름지어
분(盆)에 올려 둘까나
김봉근 <분(盆)에 올린 야생화. 경남시조 17호>
야생화에게 눈길을 준다. 더 적극적으로 파다가 화분에 올려 본다. 그리고 이름을 지어보고 싶어 한다. 이름이 있겠지만 모든 야생꽃의 이름을 알 수는 없는 노릇이다. 분에 올리고 이름을 짓는 것이 기생 머리 올려 새로 태어나게 하는 것과 유사하다.
잊고 산 것들이지만 앞으로는 제발 잊혀지지 말았으면 하는 소망이 드러난다. 꼭 꽃만을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기억 속에서 잊지 말하야 할 것을 잊고 산 것에 대한 미안함을 말하는 것은 아닌지. 혹시 그 야생화가 잊혀지고 싶지 않는 시인 자신을 말하는 것은 아닌지. 이름도 예쁘고 분에 올려져 어느 단상을 장식하는 꽃. 그래서 의미를 가진 꽃이 되고자 하는.
기운 빠진 햇볕이
졸고 있는 오후의 운동장
간단한 뜀박질로
저학년이 몸을 풀고
교실엔
졸업고사가
팽팽한 음을 낸다.
가물거리는 의식으로
버텨앉은 이 책상
고갯마루 힘에 부친
자동차가 숨이 차듯
이따금
한숨 소리가
기적처럼 울려온다.
으레 지나야 할
과정상의 의식치레
이 시간을 넘기면
얼마만큼 자라날까
시험지
넘기는 소리
또 한고개를 넘는다.
강재오 <졸업고사. 경남시조 24호>
교사인 시인이 쓴 시다. 손에 잡히는 이야기가 좋다. 체험만한, 내 일상만큼 감각적인 소재가 있을까. 음풍농월을 벗어나려면 이런 일상성을 어떻게 잘 버무려 상을 차려 놓는가가 관건이다. 가령 의사라면 인체라는 우주를 소재로 얼마든지 시를 쓸 수 있을 것이고, 좌판을 벌인 장사치라면 시장에 온 제각각의 모습에 대해 시를 쓸 수 있어야 한다. 의사가 병원을 떠나 갯벌에 관한 시를 쓰는 것보다 몸의 상처와 가학적 현실에 대한 상관관계에 대해 고민하면 훨씬 더 좋은 글이 나오리라 여겨진다.
이 시는 졸업고사를 치르는 학교의 분위기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교사로서 힘든 청소년기를 지나가는 학생들을 따뜻한 시각으로 보려고 한 점이 눈에 보인다. ‘가물거리는 의식’, ‘버텨 앉은 책상’, ‘시험지 넘기는 소리’ 등은 ‘으레 지나야 할/과정상의 의식’을 치르는 모습이긴 하지만 제자를 사랑하는 모습이 묻어난다.
자분자분 봄비가 걸어서 오는 날
동풍 불어 언 땅 녹자 보습에 뒤집힌다.
채찍에 봄볕 감길 때
아버지 기쁨 일고
봄내음 묻혀 무친 냉이 달래 씀바귀며
짜박짜박 덖어 놓은 된장 끓여 개미있고
손으로
설렁설렁 비빈
봄나물밥이 새참
-이동배 <봄날에 2. 경남시조 20호>
‘자분자분’에서‘짜박짜박’까지 시어의 운용이 재미있다. 봄비는 대지를 촉촉이 적시며 온다. 이를 시인은 자분자분 걸어온다고 말한다. 그렇다. 봄비가 무슨 군인처럼 씩씩하게 오거나 태풍처럼 달려오지는 않는다. 그렇게 걸어 와야 언 땅도 녹게 하고 잔설도 데려갈 수 있다.
냉이 달래 씀바귀 넣고 짜박짜박 덖어 넣고 된장 끓이면 제대로 된 맛이 나온다. ‘개미 있는 맛’이란 제대로 된 제 맛을 뜻하는 경상도 방언이다. 개미 없는 음식이야 먹고 나면 뒤끝이 개운치 않다. 어디 음식뿐이랴. 사람도 개미 없는 이는 사겨봐야 헛것이다. 물에 물탄 듯, 니편도 내편도 되지 못하는 친구는 간맞지 않는 된장국처럼 먹을 것 없을 때만 숟가락이 간다.
그렇다면 시에서 개미 있는 시는 어떤 시일까. 시인의 체취가 배어 있고 독특한 맛을 가진 시가 아닌가 한다. 음식이 그렇듯 이 시가 저 시 같고 저 시가 이 시 같으면 독자는 금방 책장을 덮고 말 것이다. ‘손으로/설렁설렁 비빈/봄나물밥’이지만 집집마다 그 맛이 다른 것은 그 집 장맛이 다르거나 손맛이 다르기 때문이 아닐까.
보이나요, 이제는
보랏빛 물든 가슴
언제나 그리움은
검질긴 기다림
겨우내 참았던 설움
피멍으로 맺히고
바람은 그렇게도
길길이 흔들더니
언덕배기 숨긴 정은
알면서 모르는 듯
해묵은 그림자같이
나지막이 섰습니다.
-우영옥 <제비꽃. 경남시조 24호>
여리고 어린 작은 제비꽃을 보면서 시인은 슬픔을 안으로 삭인다. 사연을 숨긴 듯, 말하지 못한 그 무엇인가가 있는 듯. 그러나 끝내 말할 수 없는. 제비꽃의 종류가 많지만 가장 흔히 보는 것이 보랏빛이다, 보기에 따라 피멍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이런 시일수록 감정은 배제해야 한다. 직접적인 감정의 토로는 자칫 시를 가벼운 감상에 흐르게 할 위험이 있다. 제비꽃은 너무 흔한 꽃이다. 주목받지 못한다. 그래서일까. 오랑캐꽃이라고 불리는 꽃은 ‘해묵은 그림자같이/나지막이’ 선다. 앉아도 서도 키는 그냥 그 모양이다. 그 소박함으로 승부하면 좋다. 기왕 속내를 들추지 않을 바엔 담담히 전혀 다른 시어를 들고 와서 아픔을 얘기하는 것도 좋았으리라. 이런 시일수록 이미지와 메타포를 활용하라고 권하고 싶다. 정갈한 서정에 기대는 시인의 심성이 잘 드러난다. 그런데 독자들은 가끔 거꾸로 읽고 싶어 한다. 파격을 읽다가는 가지런함을 원하고 서정이 너무 드러나면 괴팍한 콘크리트적 상상력으로 승부하길 원한다. 그런 성급함을 탓할 수도 없다. 사조란 그렇게 탄생되는 것이니까.
잔정 많던 영감은
아직도 잠만 자고
전쟁에 엮어온
한이라도 삭이려나
살포시
고개 숙인 채
언덕 위에 울고 있다
봄이면 할미들이
그렇게도 많더니만
딸 걱정 전설로
남겨둔 채 또 어딜 갔는가
혼자서
바람을 잡고
질긴 인연 묻는구나
-신대생 <할미꽃. 경남시조 20호>
할미꽃과 시골을 지키는 할머니를 비유하며 노래한 시다. 지금은 그 할머니도 보이지 않는다. 물론 그 흔하던 할미꽃도 잘 볼 수 없다. 할미꽃은 왜 태어날 때부터 고개를 숙이고 태어나는가. 무슨 한이라도 가졌던 것인가. 꼭 우리네 역사 같다. 일제를 건너면 6.25전쟁이 기다리고 천신만고 끝에 그 질곡을 건너면 곁에 있던 영감은 또 다른 세상으로 가고 없다. 천형처럼 고개 숙인 할미꽃 곁에서 시인은 많은 것들을 떠올리곤 한다. 만남과 이별에 대해 슬프고도 질긴 인연들에 대해. 아무도 대답해 주지 않는다. 왜? 생은 어차피 혼자이므로. 꽃도 사람도 그 무엇도.
세월은 후루룩 삼켜진 국수발 같다
바가지 속 술지게미처럼 달큰한 밤이 오고
구멍 난 신문을 덮고 있는
저 사내의 배고픈 야식
어머니도
푸른 초원도
손을 뻗지 않았는데
기억의 어두운 숨소리를 들으며
바닥에 엎드려 있는
얼음 박힌 잠이 온다
-손영희 <명동에서 2. 경남시조 23호>
명동이 어디인가. 젊음과 사랑, 유행과 미래가 혼재하는 서울 하고도 중심이 아닌가. 이 시는 대비의 묘미를 극대화하려 한다. 그 상징성과 노숙. 물론 야식을 먹는 이는 노숙자는 아니리라. 포장마차 주인이나 노점상 주인 쯤 됨직도 하지만 노숙자처럼 읽히기도 한다. ‘ 후루룩 삼켜진 국수발’같은 세월이라니. 그렇다. 뭐 칼날에 베이듯 날카로운 삶인가 하면 비련에 몸부림치는 주인공 인 양 굴다가도 얼마 지나면 그냥 후줄그레한 빨래처럼 빛바래져 버리지 않는가. 그래도 잠은 달다. 달디단 꿈의 현실은 ‘구멍 난 신문’을 이불로 삼은 도로변이다. 차디찬 바닥에 엎드려 꾸는 꿈속에선 초원에 서 있는 어머니도 보인다. 가깝지만 아무리 손을 저어도 잡히지 않는다. 그의 잠은 얼음처럼 차갑다.
손영희 시인의 결벽증은 시인에겐 더 없는 장점이다. 진부함을 체질적으로 거부한다. 이 시에서도 야식을 앞에 놓고 잠에 빠진 노점상의 지나온 세월을 ‘후루룩 삼켜진 국수발’로 그려놓는다. 그 단잠 또한 ‘술지게미처럼 달큰한 밤’을 데려와서 읽을 만한 시로 바꿔놓는 솜씨가 좋다. 기왕 결벽증을 보이려 했으면 초․중장에 두 번 연달아 사용한 직유를 좀 더 신중히 했다면. 백남준은 예술을 고급 사기라고 극단적으로 말했다. 그냥 늘려 있는 것을 예술적 영감으로 치환시킬 때 생명을 가진 것으로 탄생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남의 것을 답습하면 재미가 반감된다. 이 시인의 시들은 재미있다.
허공을
딛고 있는
버선발
등나무 아래
파리한
넌출을 감고
흔들리는 조등 하나
꽃들은
어디 숨었을까
-서성자 <등나무가 있는 집. 경남시조 20호>
아직 등꽃은 피지 않았다. 이 집의 누군가가 이승을 떠났나 보다. 그래서 등나무는 허공을 딛고 서 있다. 누군가의 죽음이 없었다면 ‘허공을/ 딛고 있는’ 이란 구절은 허무한 수식이 될 뻔했다. 하지만 뒤에 따라 오는 ‘파리한/넌출을 감고/흔들리는 조등 하나’로 인해 탄탄한 연줄을 맺는다. 시조에서 장은 그냥 성립되지 않는다. 필요 충분한 얘기를 생산하거나 맺고 난 후에 다음 장으로 이동한다. 종장의 숨은 꽃은 침묵을 아주 그럴듯하게 연출한다. 죽음은 매우 즐겨 쓰는 소재다. 하지만 이 시에서 눈물과 비애는 없다. 꽃들이 숨어 있듯 상투적인 슬픔 따윈 숨겨두었다. 단수지만 단수의 맛을 아는, 잘 의도된 작품이다.
물 소리 염불 소리
목청 좋은 장끼 소리
석단(石壇) 밑 외진 뜰에
불두화 웃는 소리
초파일 걸린 등마다
축원 타는 촛불 소리
-오철규 <연등. 경남시조 19호>
초파일날 정경을 먼 곳에서 가까운 곳으로 시각을 이동시키며 본다. 초장에선 절을 휘감고 흐르는 물소리와 은은히 들리는 염불소리, 뒷산 장끼 소리를 노래하고 둘째 수에선 석단 밑에 핀 불두화에 눈을 주고, 마지막엔 등 속에 오롯이 앉은 촛불 타는 소리에 눈길이 머문다.
잘 못 보면 ‘소리’란 말이 중복되어 나오는 것 같지만 이 시조에서 중복은 시인의 의도된 노림수다. 초장의 ‘물 소리 염불 소리/ 목청 좋은 장끼 소리’는 3음절에서 4음절로 다시 4음절과 4음절이 합쳐진 것으로 리듬을 잘 살리고 있다. 그러다 중장에선 빙그레 ‘불두화 웃는 소리’를 불러내면서 약간 쉬어가다가 종장에선 축원하는 ‘촛불 소리’로 맺는다.
형식이 잘 갖춰진 시조다. 유난히 불교적 소재가 많은 시인이다. 불두화는 왜 대웅전 아래 피는가. 초파일 지나 연등도 무심이 흔들리는 조용한 날이었다면 더 좋았을 걸.
추적추적 비가 오면 공룡이 살아난다
낙엽은 그 발자국을 묻으려고 애쓰지만
제 몸을 던져서라도 지키려는 듯
비가 온다
바위는 흥건하게 젖어서도 빛나고
발자국 사이로 공룡처럼 나도 걷지만
걸어온 내 발자국을
지우면서
비 온다
-임영주 <상족암에 오는 비. 경남시조 22호>
상족암에서 비를 맞는다. 이제 막 땅이 솟아올라 연기 사이로 공룡들이 어디론가 혼비백산 달아난다. 용암은 넓은 암반을 이루고 기암절벽이 솟아난다. 달아나는 공룡들의 발자국이 선명하다. 그들은 역사 속으로 지고 발자국만으로 남았다.
시인은 중생대 백악기를 빠져나와 현재를 걷는다. 물론 그날의 공룡처럼 바쁜 걸음은 아니다. 빗방울에 씻긴 바위는 공룡발자국을 더욱 선명하게 보여준다. 예전 사람들은 코끼리 발자국이라고 생각했단다. 하긴 이미 사라져버린 중생대를 알지 못하는 데 어찌 공룡을 알기나 했을까.
낙엽만이 지우는 것이 아니라 바람과 빗방울, 세월들도 자취를 지운다. 시인은 지워져 가는 흔적을 지키기 위해 한 편의 시조 속에 발자국을 남긴다. 언젠가 시인에 대한 기억도 사라질 것이다. 시인의 발자국은 바로 그가 남긴 시 한 편이다.
풀꾹새 울음들도 나른해진 한낮에
텃밭 매다 등 뜨거워 호미 놓고 돌아와
대청에 벌렁 누워서 세월만 탓합니다
이웃집 꼴머슴 따라 꽃반지 얻어 끼고
호적에 먹물 마르기 전에 청상으로 남겨져
청정한 소나무처럼 혼자일 수 있을까
창 너머 빈 들판에 노을을 바라보며
넓은 사랑 살아있듯 못 버리는 지금도
잔잔한 주름살 위로 묻어버린 꼴머슴
-송기순 <석이 고모. 경남시조 19호>
송기순 시인은 사변성이 강하다. 능한 얘기꾼에 가깝다. 잘 하면 몇 개의 소재들을 알맞게 늘어놓아 독자에게 읽는 재미를 주기도 하고, 잘 못하면 사변성이 지나쳐 축약 없이 너절한 글이 될 위험을 동시에 지닌다. 장점을 살리면 좋은 시인이 될 수도 있다. 모르긴 해도 소재가 많은 시인이 아닐까 싶다.
이 시조 ‘석이 고모’도 그녀 주변의 한 여인이 대상인 듯 하다. 그녀는 우리 주변에 흔히 보는 농사짓는 여인으로 일찍 청상이 되었지만 생활력 강하고 낙천적인 성격의 소유자다. 제 아무리 낙천적인 그녀라 할지라도 주름살과 옛정은 어쩌지 못한다. ‘청청한 소나무’를 너무 강요해선 안 된다. 등 굽은 소나무일망정 뒷산을 지키면 얼마나 다행인가. 시인은 연민과 애정이 담뿍 담긴 시선으로 석이 고모의 일상에 다가가고 있다. 꽃반지 끼워준 꼴머슴은 진작 가고 없지만 가슴에 영원히 묻고 사는 석이 고모. 이런 사람 내 주변에도 있다.
낙엽은 색색 엮어 화려한 꽃목걸이
피 묻은 짐승가죽 살생한 조리 식품
주검의 잔재로 빚은 조립된 저 웃음들
간자의 식은 살이 산자의 일용품이 되는
마른 잎 더미 높이에 거나한 취기를 보면
탕 안의 저 왜소한 나상이 왜 이리 눈물질까
의지에 뭉키었던 허상의 날개들이
구름의 발길질에 와자작 부서질 때
고엽의 울음을 껴안은
내 짧은 날 잘려나간다
나는 살아야지
생명은 허둥거려야지
고엽에 꿈을 찍고 썩는 살맛 내 삼키며
마침내 뒤 올 자의 일용품
고엽이 되기 위하여
-김무원 <고엽. 경남시조 23호>
낙엽은 지구의 비료다. 바람에 스러지고 비에 젖어 마침내 흙이 된다. 우리는 이 낙엽의 잿더미 위에서 일용할 양식을 얻어간다. 지상에서 화려했던 것, 월계관이나 면류관도 결국은 흙 속에 묻힌다. 우리가 꿈꾸었던 것, 찾아 헤맨 모든 것들은 허상 같은 것, 부서진 구름 같은 것. 하지만 올해도 어김없이 잎들은 무성해 지고 또 낙엽은 떨어질 것이다. 사람도 덧없이 사라지겠지만 산 사람은 어쨌든 살아야 한다. 그래서 폴 발레리는 ‘해변의 묘지’에서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세찬 마파람은 내 책을 펼치고 또한 닫으며 물결은 부서져 바위로부터 굳세게 뛰쳐나온다.”고 노래하였다. 그대여, 명예의 허울에 사로잡히더라도, 허욕의 감옥에 갇히더라도 생명을 가진 자여 피의 맥박에 맞춰 달려야 한다. 아직 고엽을 말 할 때가 아니다.
오롯이
살아 있는
기억의 한 모퉁이
오늘도
남천에는
물보라 저 이는가
골짜기
모여든 물이
어깨 서로 비비던.
물소리엔
깨어난
가곡동 벚나무들
움츠린
가슴들이
기지개 켜던 그날
삼문교
다리 위에도
꽃다발이 걸렸지.
-배상섭 <밀양 삼문동. 경남시조 20호>
밀양이 뜬다. 영화 밀양에서 밀양은 은밀한 햇볕 비추는 곳으로 소개된다. 하지만 그것은 영화 속 문학적 해석이다. 실제는 햇볕 빽빽이 쬐는 곳이다. 밀(密)은 빽빽할 밀자로 읽어야 제대로 된 해석이다. 다시 말해 밀양은 볕 밝은 땅이다.
밀양 남천은 그 중에서도 가장 밝은 빛을 가진 곳이다. 밀양의 남쪽에서 다시 남으로 흐르는 강은 이문열의 소설 ‘변경’에서도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 곳이다.
소설 속에서도 밀양은 기억의 한 부분이었듯, 이 시에서도 시인의 기억 중심에 존재하는 도시다. 남천의 물소리, 그 물소리에 잠깬 가곡동 벚나무, 삼문교 다리 위에 걸린 꽃다발 등등. 어디 이들 뿐이랴. 2수로 축약시킨 유년의 기억이지만 상상의 공간은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여백 많은 삽화 한 장을 읽는다. 이 시인이 에스키스를 묶어 펴낸 책이 생각난다.
아무도 없는 산마루에
외로운 돌이 되어
눈길은 오직 한 곳
그이를 기다린다.
수없이
빠져나오는
군상(群像)들을 향해서
기약 없는 그리움은
날마다 괴어 있고
기억은 울렷건만
오늘도 허탕이라
그래도
내일이 있다
희망 안고 내려온다.
-김정배<기다림. 17호>
원래 기다림은 하염없다. 기다림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사뮤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에서도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 두 사람은 기다린다. 무의미한 말을 주고받으며 막연히 그냥 중얼거리며 고도를 기다린다. 하지만 끝내 고도는 나타나지 않는다. 어쩌면 존재하지 않는 그 무엇, 기다리지만 내심 오지 않기를 바라는 어떤 누구는 아닌가.
하지만 이 시조에서 기다리는 그는 고도와 같은 존재는 아닌 듯싶다. 고도는 희망을 위해 기다리는 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기약없이 기다리는 님은 나를 구원할 희망의 전령사이기 때문이다.
날이면
오는 밤을
즐겨 버릇 내 못하고
개 짖는
소리 만나
오던 임도 돌아가니
눈썹달
별밭에 뜰 즘
수탉이 홰를 친다
-이종광 <시골의 밤. 경남시조 23호>
초장 ‘날이면/오는 밤을/즐겨 버릇 내 못하고’ 같은 표현은 젊은 시인에겐 금물이다. 어느 정도 연륜이 쌓인 시인이라야 이런 눙치고 푸는 언어의 맛을 낼 수 있다. 첫 시작만 보아도 웬만큼 연조가 있는 시인임을 알아챈다. 이와 함께 종장의 ‘눈썹달/별밭에 뜰 즘/수탉이 홰를 친다’는 표현도 첫 시작과 대귀를 이루며 마무리가 된다.
어느 시골의 옛적, 정분난 연인의 얘기도 심심찮게 오르내렸나 보다. 늙으면 새벽잠이 없다는데 뒤척이던 노인은 멀리서 개짓는 소리에 놀라 돌아가는 청년의 발자국 소리도 들었던 게다. 아니면 밤새 정미소 사랑에서 막걸리 놓고 누구네 집 머슴 도망나간 얘기, 식모살이 간 아무개 누이 소식 등등 갖가지 사연 꿰다가 휘뿌염 날이 새는 시각, 문을 여니 눈썹달은 산에 걸려 있고, 수탉은 홰를 친다. 그날 밤은 영영 오지 않는다. 오직 기억 속에서만, 시 속에서만 있다.
그대, 밀하를 꿈꾸며 손짓하는가
깊은 눈물, 깊은 숨, 강물처럼 들이키며
뭍으로 떠도는 혼령 슬픈 깃을 세우네
비우면 비운대로 등 떠밀던 길이 있어
산 안개 걷어내면 환하던 그대, 들길에
분분한 바이러스가 꽃물 적셔 놓았다
바람에 실린 종소리 시린 이마 짚으며
하늘엔 반쪽뿐인 노을을 쓸고 있다
매듭 푼 옷자락마다 서걱이며 오는 이
언젠가 거듭거듭 나누었던 은은함을
결 없이도 아름다운 스님같은 옷을 입고
한 생의 눈물을 모아 확, 지면서 피었다.
-김영미 <억새꽃. 경남시조 16호>
억새에 기대어 풀어내는 상상력의 넌출거림이 좋다. 억새는 왜 슬픈가. 사연이 많다. ‘혼령’이라 표현한 것으로 보아 대상과는 사별한 사이로 보인다. 화자가 선 곳은 강가 억새밭이다. 서서히 생각은 강에서 뭍으로 옮겨온다. 누군가에게 등 떠밀려 온 듯 시인은 어느새 들길 지나 산기슭에 선다. 어디선가 종소리가 들려오고 해는 진다. 해지고 바람 부는 시각, 억새의 서걱임은 절정에 이른다. 왜 억새는 한꺼번에 확 피었다가 또 지면서 피는가. 혼자서는 너무 슬퍼서, 감당할 그 무엇이 없어서 무리를 이루어 피는 걸까. 한 생의 눈물을 모아서 피었으니 이제 맘도 좀 밝아진 것일까. 떠난 이보다 남은 이가 더 서러운 법. 시인이여, 슬픈날은 더 슬픈 시를 지어라. 눈물은 눈물을 이기는 카타르시스의 묘약이니.
두 하늘
음각으로
하이얀
소리쟁이
파아란
눈물 속에
바위마저
숨어사는
마무도
들을 수 없는
메아리만
초롱
초롱
-석성환 <폭포수. 경남시조 22호>
석성환 시인의 동시조에 눈길이 간다. 우선 정형을 엄수하려는 의지가 돋보인다. 조운의 ‘구룡폭포’와 비교해 보자. 조운의 시조는 거대한 물줄기의 우렁참이 돋보이는 남성적 기운이 특징인데 이 작품은 ‘메아리만 /초롱 /초롱’이란 표현을 보듯 폭포의 작은 물방울, 작은 손 하늘로 펼치는 초록빛 소리쟁이 같은 영롱함에 더 기대는 시다. 흘러내리는 물살을 눈물로 비유하고 폭포를 폭포이게 만든 묵중한 바위를 숨어산다고 말함으로써 거대한 대상을 작은 장난감처럼 치환시켜 버린다. 동심이란 무한한 것을 가져와 손바닥 위의 놀이개로 쓸 수 있을 만치 자유자재한 것이다. ‘아무도/ 들을 수 없는/ 메아리’를 혼자 듣는다. 그렇다. 동심은 상상을 넘어서는 꿈이요, 환타지가 아닌가.
사월의 끝자락에 매달린 산 101번지
그 흔한 봄볕도 소망처럼 비껴가고
아이의 둥그런 눈이 미끄럼틀을 내려온다.
누가 썼나 붉은 글씨 철거순번 307호
대물림한 사슬처럼 끊어지지 않는 고리
일탈을 꿈꾸는 개나리 페인트 피를 토한다.
-김종길 <난곡 아리랑. 경남시조 23호>
왜 하필 사월인가. 너무도 아름답고 아름다워서 차라리 잔인한 달 사월. 엘리어트는 지상의 모든 피어나는 것들에 대한 환희를 ‘황무지’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피워내고/추억과 욕망을 뒤섞으며/봄비로 무감각한 뿌리들을 뒤흔든다. 차라리 겨울이 더 따스했거니.” 라고.
그 사월에 온갖 것들이 미치도록 피어나고 화들짝 얼굴을 드러내는 때에 난곡엔 철거가 한창이다. 폐허의 산 101번지는 김광섭의 ‘성북동 비둘기’의 산 1번지와 동일한 공간이다. 비둘기도 날아오지 않는 산마을에 소망은 늘 비껴간다. 철거 번호 붉은 페인트로 307호라고 그려진 곳에 노란 개나리는 그것도 모르고 피어난다. 철거를 위한 붉은 글씨와 피어나는 노란 개나리는 묘한 대조를 이룬다. 색의 대비를 통해 드러난 내 이웃의 아픔은 일단 성공적이다.
감꽃 필 무렵이면
허기도 고비였다
청보리 익어가는
보리밭 이랑마다
긴긴해
부황을 물고
꿈을 캐고 살았겄다
등이 휘는
모진 목숨
땅심 닮은
농심이라
주린 허리
추슬러도
가슴에
한이 쌓여
보리밭
언덕빼기에
뻐꾸기도 목메게 울었다
-윤태환 <보릿고개를 아는가. 경남시조 23호>
어느 강의실에서 국민가요라고 애창되는 ‘처녀뱃사공’을 부른 적이 있다. 그런데 좀 놀란 것은 20~30대의 청년들이 그 노래를 모르는 것이었다. 처음엔 다소 의아했지만 문제는 내게 있었다. 내겐 너무 낯익은 것이라 하더라도 젊은 세대들에겐 생소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월은 빨리 변한다. 체험해 보지 못한 것에 대한 생소함은 더 하다.
이제 농경사회의 배고픔은 일부러 체험해 보려 해도 할 길이 없다. 보릿고개는 너무 진부한 소재가 아닌가 하고 퍼뜩 생각했지만 시방 젊은이들에겐 너무나 새로운 것으로 읽힐 수도 있으리라. 바람이 한 방향으로만 불지는 않는다. 뒤로 불기도 하다가 나무의 뿌리를 뽑고 물구나무를 세우게도 한다.
젊은이가 이 시를 읽고 감꽃 필 무렵에 왜 허기가 졌느냐고 물으면 대답은 길 수 밖에 없다. 필자의 어린 시절에도 감꽃은 훌륭한 구황식품이었다. 볏짚을 가지런히 추려 묶어 감꽃을 걸고 목걸이를 만들어 하나 씩 떼어 먹던 꽃 맛은 약간 씁쓸하고 달콤했다. 그땐 작년의 쌀은 떨어쳤고, 보리는 채 익지 않았다. 부황을 이기기 위해 묵은 김장김치를 물에 빨아 기름장을 올려 쌈 해 먹던 기억도 새롭다. 그때 그 ‘보리밭/언덕빼기’엔 속절없이 뻐꾸기는 울어대었다.
속세를 떠난 삶이 오히려 속세답다
금강문 앞에 줄선 아이들의 재잘거림 속
가을은
활활 타면서
온 산을 물들이고.
부처님 온화하신 얼굴을 보고나니
살아온 지난날 보다 살아갈 앞날들이
별처럼
총총 빛나며
발길을 밝혀주고.
-정현대 <속리산 법주사에서. 경남시조 24호>
“속세를 떠난 삶이 오히려 속세답다” 첫수 초장이 의미심장하다. 더불어 어느 시인의 시 구절이 생각난다. “원효가 없는 것이 더 원효다웠다.” 금강문 앞에서 아이들은 재잘거리고, 그 보다 더 단풍들은 거나히 술을 걸쳤는지, 활활 온 산에 불은 지르고 내달리며 아우성을 쏟아내는 것인지, 과연 속리산은 속세 중에서 가장 시끄러운 저자거리를 연상케 한다.
그래도 부처님을 뵈니 마음이 좀 가라앉는 모양이다. 도통 길은 보이지 않고 불콰한 산들만 앞서거니 뒷서거니 나그네를 채근하였는데 대웅전을 걸어나오자 별들이 길을 비춰준다.
첫수에는 얘기는 끌어오고 다음 수에선 맺고 제대로 장단이 어우러진 시조다.
바람이 부서져 내리는 언덕마다
빛 좋은 봄 자락이 한 묶음씩 걸려있고
태고 적 잉태된 생명들 하늘 문 활짝 연다
안개는 제 색깔을 풀어놓고 춤을 춘다
바닥까지 드리워 환희를 부르는
몸 낮춘 춤사위는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습한 내음 갈기갈기 뻗어있는 수면 위를
새 한 마리 하얀 가슴 되비치고 날아가면
미끄덩 빠져나오는 아침 해가 눈 시리다
내 잠시 세상의 얘기들을 접어두고
젖가슴 헤치고 끌어안은 이 침묵을
숨죽여 견뎌 내리라 소리 없는 그림자 되어
-김명희 <우포늪. 경남시조 24호>
우포의 아침을 4수의 시조로 노래한다. 소가 드러누운 것 같다고 쇠벌이라 했다. 얼마나 많은 시인들이 이곳을 노래했는가. 그러므로 우포 시는 뭔가 다른 이야기가 아니면 성공할 수 없다. 하지만 위험한 소재를 잘 다루면 그 또한 쾌감이 크다.
이제 막 봄이 왔지만 우포늪의 풀들은 웃자라 있다. 그 모양을 “빛 좋은 봄 자락이 한 묶음씩 걸려있고”라고 노래한다. 이곳은 태고와 현재가 공존한다. 아직 여명이 밝아오기 전, 안개는 바람에 몸을 풀어 놓는다. 수면 위로 새 한 마리 날아오르자 마침내 해가 뜬다. 이 순간 아무런 말은 필요없다. 침묵으로 웅변하는 우포의 아침나절, 시인은 그냥 그림자 드리고 서 있을 수밖에.
4수는 시조에선 비교적 긴 시다. 이를 풀어내기 위해 적잖은 언어를 차용해 왔지만 결국은 침묵하고 돌아온 얘기로 끝을 맺고 있다.
크레인보다 튼실하던 그 사람 어깨죽지
바다를 집어삼킬 서슬 푸른 눈빛으로
생선짝 너 댓개 쯤은 한 번에 거뜬하던
굵어진 주름 속에 금이 간 날개 접고
비린 반평생 칼바람에 시달려도
소금기 버석거리며 절뚝절뚝 걸어간다.
국수 한 그릇에 막걸리 한 사발로
선술집 의자에다 하루를 풀어 놓으며
온 쉼표 눌러 찍는다, 느티나무 그림자같이
-성정현<부둣가 해가 저물면. 경남시조 24호>
성정현 시인은 여성성에 의존하는 시조를 거부한다. 좀 더 남성적이고 생활이 듬뿍 묻어 있는 시를 쓰고 싶어 한다. 이 시조 역시 굵은 근육과 힘센 핏줄로 이루어져 있다.
주인공은 지금 나이도 들고 몸도 시원치 않지만 한 때는 부둣가를 울리던 사나이다. 바다를 품고 바다의 날개 죽지에 기대어 삶을 영위하였다. 그 바다가 고향이므로 “굵어진 주름 속에 금이 간 날개”를 접고, “소금기 버석거리며 절뚝절뚝 걸어”가지만 이곳을 떠나지 못한다. 아니, 떠날 곳도 없고 버리지도 못한다. “느티나무 그림자같이” 움직이지 못하는 사내의 숙명. 고단하지만 그래도 막걸리 한 사발이면 하루가 끝난다.
부옇게 일어나는 산안개를 헤집고
한 모롱이 돌아들면 온 만큼 멀어지며
길고 긴 능선이 되어
손짓하는 삶의 길.
얼마나 또 가야만 목적지에 닿는 걸까
속도계 비상경고 모른 체 질주하다
순식간 뇌세포 하나
창밖으로 빠진다.
흐릿한 시야 속에 깜박이는 휴게소 불빛
사르르 잦아드는 지친 불혹을 내려놓고
천천히 한숨 돌리며
머물렀다 일어선다.
-이분헌 <삶의 여정. 경남시조 24호>
시인은 불혹을 맞고 이 시를 쓴다. 불혹이란 참 많은 것을 생각게 하는 나이다. 세상에서 가정에서 자신에게서 불혹은 대책없이 강요한다. “혹하지 마라.”고 하지만 어찌 삶의 고비마다 혹하지 않고 살 수 있으랴. 차라리 미쳐버리면 편할 걸 무슨 말라비틀어진 노장(老莊)의 비움이 명제인 양 사람들은 쉽게 “비워라!”고 말한다.
이 시인에게도 불혹은 강요된다. 씨줄과 날줄로 엮여 있는 매듭은 다 어쩌란 말인지. 아직 목적지는 멀다. 생의 속도계는 고장나버렸는데 또 누군 말한다. “불혹, 불혹이니...” 그래, 불혹이 어쨌단 말인가. 삶은 갈수록 척박하고 적막한 것을.
햇살이 사금파리로 솟는
옥천사 가을 숲은
길섶마다 구절초
해맑은 웃음이 있어
숲 누빈 계곡 물소리
그 여정(旅情)도 훈훈하다.
버림으로써 다시 얻는 계절
상수리는 지천에 깔리고
하늘을 바라보고 선
눈빛 그윽한 노송(老松)
사천왕(四天王) 부릅뜬 눈조차
품어 안아 다독인다.
웃으면서 산화(散華)하는
뜨락의 은행나무
얼마나 영혼이 맑으면
저렇듯 눈부실까
이 가을 소슬한 가슴에
화롯불로 담긴다.
-김설영 < 옥천사 가을 숲은. 경남시조 24집>
김설영의 신작 3편은 비교적 안정된 수준을 나타내고 있다. 습작과정을 충실히 보낸 흔적이 역력하다. 첫수는 옥천사 숲의 가을정경을 햇살과 물소리로 얘기하고 있고, 둘째 수는 시선을 가까이 두고 상수리나무 잎 떨어진 산사, 노송과 어우러진 일주문을, 셋째 수는 버리고 떠나는 가을의 맑은 영혼을 그려내고 있다.
첫수의 "햇살이 사금파리로 솟는/옥천사 가을 숲"은 손끝에 잡힐 듯 튀어 오르는 가을 햇살 이미지를 잘 포착한 것이다. 첫수 초장을 성공적으로 살려내면 시조의 절반은 건진 셈이다. 감각이 살아 있으면 다음 장은 어렵지 않게 진행된다. 마지막 수의 “웃으면서 산화(散華)하는/뜨락의 은행나무/얼마나 영혼이 맑으면/저렇듯 눈부실까”는 평범하지만 첫수의 생동감 있는 표현과 맞물리면서 스러지는 가을, 소멸과 회생의 삶을 무리없이 그려내고 있다.
신새벽 창 너머에 유난떠는 물안개
괜스런 수줍음에 옷깃만 저미다가
나절이 훌쩍 지나고 물안개가 걷히면
척박한 일상이 맴돌았을 뿐인데
신기루 그루터기에 저문 시선이 꽂혀있다
아직도 노청맹(老靑盲) 마른 가슴에 순애보가 새파랗다
-허철회<기다림. 경남시조 24집>
이른 아침 창밖에 찾아온 물안개와 걷혀가는 시간의 흐름을 눈길을 준 시조다. 대개 이런 경우, 지나친 서정으로 인해 독자를 지겹게 할 위험이 있다. ‘그리움’이란 제목 또한 얼마나 고루한 것인가. 하지만 이 시는 그런 오류에 빠지지 않는다. 이유는 바로 밝고 감각적인 시어들 때문이다. 자욱하게 밀려오는 물안개를 “유난떠는”이라 표현한다든지 “괜스런 수줍음에 옷깃만” 저민다든지 하는 표현들은 자칫 식상할 수도 있는 소재를 발랄하게 전개시킨다. 첫수의 경쾌함은 다음 수에 따라오는 무거움에 적절한 균형을 취하게 한다. 물론 둘째 수의 “신기루 그루터기에 저문 시선이 꽂혀있다” 같은 표현도 신선하다.
가벼운 감상에 빠지지도 않으면서 적절히 연륜이 스며있는 모습이 좋다. 문단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혼자 조용히 작품을 써온 셈이다. 다작하는 시인은 아니다. 하지만 앞으로는 창작에 더 많은 관심과 애정을 쏟기를 권해본다.
맺는 글
41분의 경남시조시인협회 회원들의 작품을 주마간산 격으로 살펴보았다. <경남시조 40년사>에 수록되는 원고치고는 모든 면에서 미흡함을 솔직히 인정한다. 촉박한 시간 탓도 있고, 한꺼번에 회원 절반이 넘는 시인들의 작품을 조명하는 것이 난망한 일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이번 기회에 그동안의 <경남시조>의 역사를 더듬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이 책은 이들 시인들의 징검돌을 되밟으며 걷는 여정이 아닌가 싶다. <20>호 이전에 참여한 시인들의 작품이 잘 보이지 않는 점은 안타깝다. 이미 고인이 되기도, 먼 곳으로 이사를 간 탓도, 이런 저런 이유로 참여치 못하는 경우도 있다. <20>호를 넘기면서 회원 수도 많이 늘어났다.
경남 시조는 한국시조의 발전과 그 궤를 같이 해 왔다. 한국시조의 발자취를 따라가면 경남시조의 궤적도 쉽게 만날 수 있다. 박재두, 김교한, 김춘랑, 이우걸, 홍진기, 김정희, 이수정, 김연동, 김복근, 강호인, 하순희, 강경주, 서일옥, 강현덕, 원은희, 문희숙, 옥영숙, 최영효, 임성구, 손영희 등등 그냥 떠올려 본 시인들은 한국 시조의 초석 혹은 중추로 활약하고 있다. 바로 경남시조가 배출해 낸 값진 유산인 것이다.
비록 금전적 예산의 부족으로 인해 화려한 책을 내지 못했지만, 소박하나마 매년 한 권씩 의미 있는 책을 펴내었고, 백일장을 열어 청소년들에게 시조를 가까이 사랑하게 하였으며 세미나를 통해 안팎의 소통을 원활하게 하였다. 물론 이런 일들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무엇보다 40년을 버텨온 가장 중요한 힘은 회원 상호간 경남시조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치열하게 창작활동을 권하는 분위기 때문이었다.
경남시조의 장점은 서로에게 격려가 되는 분위기를 이끌되 작품에서만큼은 냉철해야 한다는 의식이 저변에 깔려 있다. 이런 점을 공유하고 비판한다. 이 지역 시조인들이 한국시조단에서 인정받는 이유는 바로 우수한 시인이 살아남는다는 의식의 토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번 글은 비평적 관점에서 쓴 글이 아니다. 만약 비평이었다면 쓴 소리를 많이 한 작품도 있었으리라. <경남시조> 40년을 맞아 전 회원들의 작품을 한 번 소개해 보는 기회를 갖자는 소박한 생각에서 이뤄진 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자의 사견 역시 피해가지는 못했을 수도 있다. 혹시 문맥이 거슬리는 부분이 있으면 널리 이해해 주시기를 부탁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