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룡(李小龍)이 온다
비틀즈의 예스터데이가 자주 들려오는 2층 서재. 한 쪽엔 중국의 고대 병기들이 걸려있고, 벽면엔 각종 철학서들과 무술서적들이 빼곡히 자리하고 있다. 책상 위에는 쓰다 만 각본의 비망록들. 창가에 앉아 철학과 영화에 대해, 가끔은 예언자처럼 죽음에 대해 말하곤 했다. 1973년 7월 20일 퀸 엘리자베스 병원에서 33세의 나이로 요절. 장례식장엔 좀처럼 얼굴을 나타내지 않는 낯익은 한 사람, 스티브 맥퀸이 슬픔에 잠겨 있었다. 동양인 최초의 미국영화의 주연배우였으며, 경이적 무술 실력으로 헐리우드를 평정한 이력의 소유자. 그는 ‘당산대형’, ‘정무문’, ‘용쟁호투’, ‘용맹과강’, ‘사망유희’ 등의 명편을 남기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 전설적 액션배우 이소룡(李小龍)이다.
60년대의 극장가에는 ‘외팔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사나이 왕우가 있었다. 홍콩에서 날아온 검객은 우릴 열광시켰다. 줄이 보이는 어설픈 와이어 액션이었지만, 숲을 날아다니고 밧줄에 묶인 채 상대를 베어 넘기던 장면은 엄격한 학교생활의 탈출구를 찾던 우리들을 매혹시켰다. 그때 이소룡은 차이나타운에서 왕우 주연의 ‘용호투’를 보면서 “칼 대신 발을 쓰란 말이야!”하고 외쳤다고 한다.
그렇게 왕우의 60년대가 저물고 70년대 이소룡의 시대가 왔다. 쌍절곤과 맨발, 이상한 괴성, 그가 창안했다는 절권도라는 무술은 쉽게 왕우를 망각하게 했다. 이소룡은 그렇게 한 시절을 지배했다. 당시를 그린 영화 속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친구’에서 ‘말죽거리 잔혹사’까지. ‘말죽거리 잔혹사’는 이소룡으로 시작하여 성룡으로 끝난다.
80년대의 서막이었다. 이소룡 영화에서 스턴트맨으로 참여한 성룡의 시대가 시작되고 있었다. 79년 ‘취권’이 소개되면서 이소룡에서 성룡으로 바톤은 넘어간다. 박력있는 절권도에서 술에 취해 휘청거리다 상대를 제압하는 코믹액션으로 시선이 옮겨지면서 이소룡은 기억에서 멀어진다.
우리나라의 청소년들에게 홍콩 무협영화는 거쳐야 될 통과의례처럼 자연스러웠다. 우리가 매혹된 스타들. 깡따위, 츄룡, 로례 등등. 독자들이여, 그들과 함께 성장기를 보낸 친구들이 그립지 않은가?
이소룡이 죽은 지 30년이 지난 지금, 그는 영화 속에서 부활이 예고되고 있다. 제작자 신철은 ‘드래곤 워리어(Dragon Warrior)’(가제)라는 영화를 미국에서 준비하고 있다. 총 제작비 1천 2백억원 가량이 소요되는 대형 기획이다. 2006년 컴퓨터로 되살려 내는 주인공 이소룡은 산자의 모습 그대로 일까? 아니면 성급하게 부활한 어릿광대의 모습일까? 벌써부터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