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균 칼럼

사라예보엔 코리아의 혼이 숨쉰다

이달균 2007. 2. 26. 13:44

 

 

사라예보엔 코리아의 혼이 숨쉰다

<사라예보 윈터 페스티벌>에 다녀와서
 이달균(moon1509)   

 

 

▲ 사라예보 윈터 페스티벌에서 연주하여 호평을 받은 '이병욱과 어울림'
ⓒ 이광호

 

 

 

사라예보, 그 역사의 현장에서

 

 

사라예보의 겨울 축제, 2007년 올해는 2월 7일부터 3월 21일까지 열리고, 지구촌 곳곳에서 예술인들이 모여든다. 그들은 조금씩 사라예보에 동화되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평화주의자가 되고 만다. 한국예술인 24명도 사라예보를 찾았다. 우린 누구라 할 것 없이 맨 먼저 역사의 진원지, 그 유명한 ‘사라예보 사건’이 난 곳을 찾아갔다. 그랬다. 이곳에서 우리의 일정은 시작되었다.

1914년 6월 28일 두 발의 총성이 울렸다. 사라예보 시내를 가로지르는 밀야츠카강변 도로, 느닷없이 나타난 한 청년은 주저 없이 권총을 쏘았다. 순간 햇살은 정지되고 오스트리아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 부인 조세핀은 쓰러졌다. 세칭 ‘사라예보 사건’이라 불린 이 총성은 일차대전의 발발을 불러온다. 이후에도 치열한 내전으로 수십만의 사상자를 내었다.

이슬람계, 세르비아계, 크로아티아계의 복잡한 다민족국가 수도 사라예보를 찾아온 우리들의 심회 또한 명쾌하진 않았다. 10년간 이 축제에 참가해온 종합예술기획 ‘Nine Dragon Heads’ 예술감독 박병욱씨의 설명이 있었지만 ‘사라예보 윈터 페스티벌’에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참여하고 이바지할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라예보는 지금까지 열 번의 축제를 열어 세계 예술인들을 초청하고 있다. 한마디로 문화와 예술로써 역사의 아픔을 치유하겠다는 신념의 표현이다.

이곳의 축제에 지구촌 유일의 분단국가인 한국의 예술단이 찾은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한국 일행은 두 그룹으로 나눠지는데 그 하나는 현대미술대표작가전을 여는 미술가 그룹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음악그룹 ‘어울림’ 공연단이었다.

특히 우리음악과 서양음악의 접목을 통해 한국음악의 세계화를 위해 한길을 걸어온 ‘어울림’ (대표 이병욱. 서원대 교수)실내악단이 찾은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시선을 끌 만한 일이다. ‘어울림’은 말 그대로 세대와 이념, 국경을 초월하여 한국음악과 서양음악의 공동선을 지향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만들어진 그룹이므로 이 축제의 기본 취지와도 잘 맞는다.

2월 7일 저녁 4시 30분. 개막식에 앞서 프랑스팀의 거대한 퍼포먼스가 펼쳐졌다. 개막식장은 소박하지만 나름대로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대통령을 비롯하여 전 문화부장관을 역임한 대회조직위원장 및 관계자의 인사말이 있었다. 밤이 이슥하여 우린 숙소로 돌아왔다.

 



축제, 그리고 대한민국

 

 



▲ ‘터기 문화센터에서 열린 한국현대미술대표작가전 개막식(왼쪽에서 두번째 조직위원장, 세번째 터키문화원장) ⓒ 조희섭

 

 

2월 8일. 한국현대미술대표작가전이 ‘터기 문화센터’에서 열렸다. 큐레이터 김이선, 스텝 강동원, 김정한, 정경환과 출품작가, 행위예술가들이 참여하였다. 이들과 현지 미술인, 미술 애호가들이 가득 갤러리를 메운 가운데 감격스런 오프닝이 진행되었다. ‘어울림’ 그룹의 연주로 막이 열렸고 참가 작가들의 이름이 불리면서 열기를 띠어갔다.

인형들의 발칙한 성적 상상력이 돋보이는 작품을 선보인 감연희, 하나의 동물이면서 다면성의 욕망을 드러낸 다소 그로테스크한 형상의 조각을 보여준 김종구, 액세서리, 목걸이 등 감각적 소재들을 실용성에 접목시킨 김화진, 여성성을 드러내는 소품들의 내밀한 자극을 표현한 김난영, 유화이면서 동양의 선(禪)과 여백미를 표출한 박현효가 있었다.

또 먹과 채색으로 한국적 정서를 현대적으로 살려낸 조희섭, 숨겨진 거대한 문명의 그늘 아래 신음하는 우리 이웃들을 은유적인 영상으로 표현한 이중재, 정치적 배경의 쿠바보다는 소시민들의 삶을 따뜻한 시각으로 렌즈에 담아낸 이광호, 민화 속 동물들을 전혀 다른 질감의 익살스런 조각으로 표현한 최성환씨 등의 작품들이 소개되었다.

곧바로 행위예술가 방효성씨의 몸으로 표현하는 ‘행위’가 이어진다. 해금 연주자 윤주희의 글루미썬데이에 맞춰 하얀 옷에 마구 덧칠되는 검은 먹, 정지된 왼손을 공격하는 오른손의 광기, 급기야 가위질에 잘리는 옷. 해금 대신에 더 무거운 음악, 준비한 먹도장을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찍는 것으로 ‘행위’는 끝난다.

그는 말했다. “오른손과 왼손은 떨어져 있지만 한 몸의 것이다.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각각의 인종은 다르지만 결국은 하나다. 오늘 내 행위는 왼손과 오른손 사이에 그어진 금을 없애고 하나의 몸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방효성씨는 우리가 이곳에 온 이유를 몸으로 말해주었다.

2월 10일 오전 10시. 같은 장소 터키 문화센터에서 워크숍이 있었다. ‘어울림’ 대표 이병욱씨의 ‘한국음악의 이해’와 미술팀 김이선 큐레이터의 ‘한국현대미술의 동향’이 예정되어 있다. 처음엔 솔직히 ‘한국 참가자들만의 맥빠진 잔치로 끝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가 있었다. 하지만, 그 우려는 기우였다. 미술팀의 오프닝이 입소문을 탄 듯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현지의 축제 관계자, 문화인, 취재기자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먼저, 이병욱 교수의 “한국 음악은 시김새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멜로디 선이 다양한 변주를 가진다.”라는 부분과 ‘꺾는 청과 떠는 청, 꾸밈새의 특성으로 한국음악의 고유성을 드러낸다.’에 대한 설명은 이날 워크숍 중 가장 관심을 끈 부분이 되었다.

가야금(김순진)과 해금(윤주희)의 ‘꺾고 떠는 청’ 실연에 이어 장구(박준형)의 거친듯하면서 호흡을 조율하는 섬세함에 이국의 눈들은 탄성을 자아낸다. 마지막 진도아리랑의 합창에서는 동서양의 봇물이 한꺼번에 터지는 감격을 맛볼 수 있었다. 일행 중 몇은 눈물이 글썽거릴 정도로 자부심을 느꼈다고 말했다.

미술팀 김이선 큐레이터는 한국현대미술의 동향과 미래에 대해 말했는데 주로 부산의 바다 미술제와 앙코르와트 특별전을 중심으로 설명하였다. 항구 도시 부산의 독특한 해양미술양식을 구현하기 위해 바다미술제가 기획되었다. 기존의 예술과 삶은 유리될 수 있는 위험이 있었지만 이 비엔날레를 통해 도심의 환경 속에 예술을 스며들게 하여 시민들과의 자연스런 소통을 펼쳐낸다.

도심 속에 큰 백사장을 가진 천혜의 자연환경을 이용하여 이뤄지는 '샌드 아트(Sand Art)', 주변 도로에서 펼치는 '퍼블릭 퍼니처(Public Furniture)'와 '리빙 퍼니처(Living Furniture)' 등 여러 실험을 하고 있는데 부산 바다미술제에 많은 국제적 관심을 보여줄 것을 호소하였다. 앙코르와트 특별전은 영상으로 꾸며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도 했다.

워크숍은 끝났지만 현지 예술인들과 한국예술인들은 한동안 일어서지 못했다. 준비해간 한국 음식들과 전통차를 마시면서 한껏 우의를 다졌다. 이날부터 우리가 묵었던 호텔엔 그들의 방문이 끊이지 않았고, 그곳의 대중주인 ‘로사’를 마시며 밤을 새운 이들이 많았다.

 



어울림, 우린 모두 하나다



 

                                 

 

                                  어울림 공연을 여는 무용가 황경애씨의 태평무 ⓒ이광호

 

 

 

 

2월 11일 오후 8시 드디어 한국팀의 피날레인 ‘어울림’ 공연이 시작되었다. 이번엔 누구도 관람자의 숫자를 걱정하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공연장인 유스하우스(Youth House)엔 시민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주최측에서도 모든 일정을 미뤄두고 이곳으로 집결하였다. 그만큼 지난 며칠 동안 보여준 한국 참가자들의 정성이 제대로 홍보효과를 나타내고 있었다.

드디어 불이 꺼지고, 여는 무대로 무용가 황경애씨의 ‘태평무’가 펼쳐졌다. 나라의 안녕과 태평성대를 염원하는 춤은 평화를 간절히 기원하는 이곳 사라예보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아름다운 의상에 걸맞은 춤사위에 서서히 홀은 기대감으로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무대가 조용해지자 곧바로 첫 음악 ‘어울림을 위한 2007(Oulim for 2007)'이 연주되었다. 주자별로 악기의 특성을 살린 것이 특징이다. 기타, 첼로, 플루트 등 서양의 낯익은 양악기와 해금, 가야금, 장구 등 낯선 한국 악기들의 앙상블에 여기저기서 탄성이 이어졌다. 이 악단의 존재이유를 제대로 보여주는 곡이다.

이어서 ‘우리민요 주제에 의한 환상곡(fantasy on a Korean folk song)'이 연주된다. 우리나라 여러 지역에 산재한 민요들을 주제로 하여 기타 해금, 장구의 실내악 트리오 3중주의 절묘한 조화를 표현한 곡이다. 좀 전의 낯섦에서 조금씩 낯익음으로 동화되는 듯 분위기는 고조된다.

계속해서 ‘달아 높이곰’, ‘한강 아라리’, ‘오 금강산’이 이어지면서 사라예보 땅에 한국의 혼은 점점 퍼지고 있었다. 만국의 공통어인 음악은 그들에게도 촉촉이 젖어드는지 어느새 익숙해진 손뼉장단과 추임새로 흥을 돋워가고 있었다.

 


 

▲ 사라예보 윈터 페스티벌에서 축시를 읽는 이달균 시인

ⓒ 이광호

 

 

다음은 시와 음악이 어우러지는 순서였다. ‘축제의 사라예보’를 작사한 시인 이달균은 ‘어울림’의 반주에 맞춰 축시 ‘축제의 도시 사라예보에서 노래하라’를 낭송하였다.

“유난히 빛나는 별이 있어 동방의 길을 떠나왔네
별은 동방의 친구를 오라 손짓하고
이마 맞대며 서로의 어둠 밝혀주며
미리내에 닿아 미리내의 바다에 닿아
아드리아에서 불어오는 해풍에 가슴을 적신다ㆍㆍㆍ“

6연 54행으로 된 시는 한지에 두루마리로 쓴 것인데, 한글 원문으로 읽었지만 느낌은 모두가 공유하는 듯했다. 마지막 구절 “절정은 왔다 지금 여기 절정은 왔다 / 사라예보여”를 외치자 공연장은 한동안 박수와 환호의 물결로 뒤덮였다.

분위기는 절정에 이르고 있었다. 이 흥분을 그대로 이어가려는 듯 박수가 채 끝나기도 전에 곧바로 이번 공연의 주제음악 ‘축제의 사라예보’가 연주된다.


“그리운 날은 사라예보에 옵니다
그리운 날은 사라예보에 옵니다
먼 바다 아드리아를 달려온 기적소리
멀고도 가까운 동방의 친구들 우리 모두 하나 되어
축제의 사라예보,
평화의 축제, 축제의 한마당
산맥에 내린 눈, 바람이 소망하고
축제의 종소리 울려 퍼지네
사라예보, 평화의 종소리
축제의 사라예보“


이미 미술전 오프닝과 워크숍을 통해 몇 차례 따라 불러본 노래이고, 애초부터 보스니아 특유의 음률을 살려내어 작곡하였으므로 그 공감의 폭은 훨씬 커보였다. 그들도 흥겨운 가락에 몸을 흔들고 휘파람을 쏟아내었다. 공연장은 벌써 합일과 상생의 기운으로 동서양을 구별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참가자 모두 감격에 젖어 있었다.

 


 

▲ 사라예보 윈터 페스티벌에서 조직위원장에게 ‘축제의 사라예보’ 노래와 축시 ‘축제의 도시 사라예보에서 노래하라’를 헌정하는 이병욱 교수(왼쪽에서 4번째)와 이달균 시인(5번째)

ⓒ 이광호

 

 

이윽고 대회 조직위원장이 무대로 올라왔다. 이병욱 교수와 이달균 시인은 ‘축제의 사라예보’ 노래와 축시 ‘축제의 도시 사라예보에서 노래하라’를 헌정하였고, 그는 조직위원회를 대표하여 인사말과 보스니아 대표작가의 판화를 선물하였다.

곧이어 앙코르가 쏟아져 한국 예술단들과 조직위원회 사무국 인사들이 모두 무대 위로 올라와 손에 손을 잡고 축제의 사라예보를 소리 높여 불렀다. 가히 민간외교, 문화예술교류의 필요성을 유감없이 보여준 장이었다. 그곳에 사는 유일한 한국인인 이선이네 식구들은 이런 감동은 처음이며 영원히 잊을 수 없으리라 하였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취임으로 한국의 외교적 위상은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이와 함께 문화예술인들의 활발한 교류 또한 절실히 요구된다. 우리 것을 알리는 데는 역시 유구한 우리 문화와 예술 이상은 없다. 어디에 내놔도 손색없는 한국적인 것을 알림으로써 세계화는 저절로 구현되는 것이 아닐까. 이번 사라예보 ‘윈터 페스티벌’은 누구나 아는 사실을 직접 체험케 해 주었다.

이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엔 한국이 있다. 아직 국교도 체결되지 않았고, 정부 인사 한 사람 그곳에 있지 않았지만 사라예보인들의 가슴 가슴엔 코리아의 혼이 숨 쉬고 있다. 멀리 아드리아해, 트레베비치산과 밀야츠카강, 지난 역사에 가슴 아파하고 새로운 미래를 꿈꾸는 맑은 눈을 가진 사람들의 도시 사라예보를 두고 우리는 떠나왔다.